125. 더 플래닛 오브 더 데드 (2)
회색빛으로 물든 피부는 다른 시체들과 달리 푹 꺼져있지 않았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머리카락도 멀쩡하고, 코에는 삐뚤게 안경까지 걸려있었다.
…안경?
[저 사람, 아니 저 괴물 어쩐지 낯이 익은 걸?]
“나도 그 생각 중이었다.”
몹시 해지긴 했지만 그는 제복까지 갖춰 입었고, 좀비 치고는 동작이 재빨랐다. 한 쪽 발목이 꺾이지만 않았더라면 진작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 설마, 체자라?]
성좌가 놀라 외친 말과 함께 그가 돌진했다.
“우웃!”
채앵!
날렵하게 날아온 얇은 검 끝이 매섭게 꽂혔다. 승지는 반사적으로 도끼를 들어 막았지만. 붉은 도끼날에 꽂힌 검을 따라 쩌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좀비가…!”
승지가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곧바로 검을 회수해 가슴 앞에 세운 체자라는 다시 검을 내뻗으며 달려들었다.
휘잉!
얇고 가는 검 끝은 손쉽게 휘어지고 채찍처럼 날아들었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발이 오히려 축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젠장!”
물론 승지도 가만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상단 중단 하단의 효과로 그의 방어는 신속하고 정확했다.
그러나 민첩한 방어와는 달리 방패 대신 휘두른 도끼는 공격을 한 번 막을 때마다 허무하게 부서져갔다.
저게 진짜 시체라고?
“야! 내 말 들려?”
승지가 고함을 질렀지만 그럴수록 입으로 썩은 냄새만 파고들었다.
제길, 시체인건 확실한데. 어떻게 움직이는 거야?
공격 한 번, 한 번이 송곳처럼 승지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타앙! 탕! 빠직!
한 번 무기가 맞붙을 때마다 소리는 점점 불길해졌다.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이럴 리가 없어!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 체자라는 분명히 마녀한테서 이기고 있었단 말이야!]
[본체만 찾아내면 곧 싸움도 끝난다고 나랑 다나우한테 안심하라고 했었는걸!]
성좌가 뭐라뭐라 떠들어댔지만 눈이 뒤집힌 시체랑 싸우는데 읽을 정신도 없었다.
자루만 남은 도끼를 휘두르며 승지가 이를 빠득 거렸다.
까앙!
똑같이 세게 후려친 자리가 충격을 못 이기고 부르르 떨렸다. 이상을 감지한 체자라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눈을 찌푸렸다. 그 눈으로 단단히 굳은 승지의 표정이 비쳤다.
“이젠 나도 못 봐준다.”
기억 속에서 잠깐 본 얼굴이지만 그래도 성좌를 도와준 녀석이니 약간은 봐줄 생각이 있었다.
그걸 날려버린 건 본인이다.
“!”
체자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순수한 힘으로 대치하고 있던 승지가 갑자기 팔을 옆으로 확 돌리며 검을 쳐냈던 것이다.
체자라도 당연히 예상한 것처럼 손목을 당겨 칼을 회수했지만 이어지는 승지의 공격은 상체가 아니라 하체를 후리는 거였다.
[ 1콤보! ]
지금까지 체중을 버티고 있던 다리가 순간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휘청거리면서도 두 번째 공격을 송곳처럼 찔러 넣었다.
다리를 차느라 몸을 빼낼 수 없었던 승지는 당연히 위협을 대비하고는 아슬아슬하게 옆구리 쪽으로 공격을 흘렸다.
“잘못 찔렀지?”
승지가 눈을 번득이며 얇은 칼을 움켜쥐었다. 지금까지 빠르게 치고 빠지는 공격을 퍼붓느라 잡기 어려웠지만, 크게 한 방 내지르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던 것이다.
승지는 검을 잡는 즉시 날을 위로 꺾어 못 쓰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
[꺄악! 승지야! 손… 손!]
잔뜩 힘이 들어간 팔에도 불구하고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날이 꺾이지 않았다.
젠장, 뭘로 만든 거야?
스탯이 오른 뒤로 돌이나 쇠도 뚫던 힘이다. 그런데 고작 저만한 두께도 꺾지 못한다니?
[마법이야! 마법으로 보호한 칼이라 그냥 물리력으론 안 돼!]
“뒤진 놈이 마법까지 쓰면 반칙이지!”
체자라가 끼릭거리며 칼을 빼내려고 힘을 주었지만 움켜진 승지의 손에 생채기를 내며 피만 낼 뿐이었다.
놓아줄 거 같냐.
오히려 승지는 체자라가 잠깐 칼에 집착한 틈을 타 소리쳤다.
“무기 올려!”
[어어? 응!]
승지가 까딱이는 오른 손을 향해 성좌가 인벤토리에서 튕기듯 무기를 올려 보냈다.
흉악하게 생긴 삐죽한 가시가 달린 철퇴를 꺼낸 승지가 바로 머리를 향해 아래에서 쳐올렸다. 제국 귀족 컬렉션 2탄이었다.
그 지경까지 이르자 체자라도 더 이상 칼에 집착할 수 없는지 손잡이를 놓고 떨어졌다.
지익. 타닥.
승지는 체자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철퇴를 가볍게 돌렸다. 칼날 부분을 잡고 있던 검도 살짝 위로 던져 자신이 손잡이를 잡을 수 있도록 했다.
순식간에 양 손에 무기를 든 건 승지가 되고 빈털터리가 된 건 체자라로 바뀌었다.
“난 너처럼 근사한 검법 같은 건 모르고, 그냥 무식하게 간다!”
승지가 쇄도했다.
종을 치듯 육중한 철퇴가 반원을 그리며 쩔렁거렸다. 체자라는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철구를 보며 양 손으로 눈앞을 막았지만, 충격을 다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콰아앙!
시원하게 1콤보가 쌓인 걸 보며 승지가 그대로 지면을 박찼다.
마법 때문에 칼이 안 부러지면 육체도 그럴 테지!
과연 벽면에 부딪쳤던 체자라의 시체는 조금도 부서진 곳이 없이 도로 땅으로 떨어졌다.
이미 죽었는데도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동자가 제법 형형해보였다.
“잘근잘근 다져주마!”
승지가 소리쳤다.
[꺄아악! 승지야! 멋있어! 멋있지만…! 그 대사는 조금 악당 같지 않나…?]
성좌의 말대로 체자라는 위기에 빠진 주인공처럼 갑자기 이상한 동작을 취했다.
기도하듯 그가 손가락을 교차한 순간 승지의 손에 쥐어져있던 칼이 곤죽처럼 녹아버렸다.
“음?!”
[아닛!]
질척해진 검의 액체는 체자라에게 빨려들 듯이 날아가더니 그의 손에서 다시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와! 개 치사하다! 더러운 수작을!”
[으앙! 승지야! 대사를 하면 할수록 불리하게 들리잖아!]
“누구 맘대로 이게 대사야!”
승지가 버럭 화를 냈다. 게다가 악당으로 따지자면 산 사람을 공격하는 저게 괴물이지!
체자라가 다시 용수철처럼 팽팽하게 근육을 조이더니 뾰족한 검 끝을 날리며 덤벼들었다.
“젠장! 야! 너 이거 약점 같은 거 몰라?!”
[글쎄!? 좀비는 신성 마법이 제 맛인데!]
“내가 쓸 수 있는 걸로!”
철퇴로 빠른 검을 상대하기 빡세단 말이다!
무기의 특성상 크게 크게 휘두를 수밖에 없는 승지의 공격과는 달리 체자라는 약간의 빈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찔러 들어왔다.
차라리 맨 손으로 싸우면 상대하기는 훨씬 편하겠지만 몸 어디 하나에는 구멍이 날 게 뻔했으니.
공격은 힘들고 방어로는 콤보가 안 쌓여서 연계 스킬을 발동할 수가 없다.
쪽팔리지만 이거라도 써볼까!
“광대의 영역 발동시켜!”
띠링!
[ 광대의 영역 발동 조건을 확인합니다!
☆무대 확인! 배경 : 나비스의 성 배역 : 체자라 (임시 악역)
☆관객 확인! 0명의 관객이 관람중입니다!
관객이 없어 발동이 취소됩니다! ]
“뭐야 이 새꺄?!”
승지의 욕설에도 불구하고 스킬은 맥없이 꺼져버렸다.
이놈의 광대 스킬! 중요한 순간엔 항상 말썽이지!
[으앙 미안해 승지야! 여긴 진짜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성좌가 대신 쩔쩔매며 사과했다.
기껏 버프 받고 싸우려던 게 수포로 돌아가니 열이 뻗쳤다.
무리해서라도 콤보를 쌓고 필살기로 마무리해야 하나?
하지만 상대는 자신보다 작고 빨랐다. 프레임 컨트롤도 먹히지 않았다. 죽은 시체 주제에 승지보다 지능이 높았던 것이다.
철퇴로 간신히 그의 공격을 얽어낸 승지가 미간을 구겼다.
“…….”
이대론 안 되겠다.
천천히 손가락을 편 승지가 무기를 버렸다.
철그렁.
곧장 바닥으로 떨어진 철퇴를 본 성좌가 기함했다.
[뭐, 뭐하는 짓이야 승지야! 위험해!! 내가 바로 다른 무기 꺼내줄게!]
“필요 없어.”
승지는 무겁고 공격력이 높기 때문에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던 무기를 놓자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까짓 거 배에 구멍 나도 뒤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냐!
프레임 컨트롤 최대 가속을 한 승지가 파고들었다.
체자라는 귀신처럼 승지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기묘하게 휘어지며 승지의 심장을 노렸다.
하지만 단순한 힘 싸움은 내가 이긴다는 걸 아까 확인했거든!
승지가 팔꿈치로 검을 든 체자라의 팔을 찍어 눌렀다.
으득!
시체라 그런지 살이 아닌, 근육과 뼈가 부러지는 느낌이 났다. 승지가 속으로 역겨워하며 그대로 체자라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승지의 공격 따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체자라의 검이 날아왔다.
아까부터 반복적으로 확인한 사실이지만 지금 일로 확실히 알았다.
죽은 체자라는 생전의 검술을 흉내 낼 수는 있었지만 그 외의 변수를 만들어내는 건 할 수 없었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 품으로 파고든 승지를 역으로 붙잡고 움직임을 봉쇄했겠지만, 그는 오로지 검만을 사용해 공격을 해왔다.
시체를 움직이게 만든 자가 누구든 체자라에게서 위협을 느낀 건 검술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투 상황에서 마법은 쓰기도 어렵고, 단순한 격투는 체자라의 몸으로는 큰 타격을 주기 어려울 테니까.
그러니 이런 상황이 닥치면 후회하는 거지!
승지는 붙잡은 체자라의 양쪽 어깨를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뒤로 꺾었다.
우드득!
관절이 아작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앗!]
엄청난 소리에 성좌가 눈을 질끈 감았다.
무슨 마법을 걸어놨는지 칼은 꺾이지 않는다. 그냥 뼈를 부러트려도 어차피 시체라 고통을 느끼지도, 공격을 멈추지도 않는다.
그럼 아예 떼 놓으면 되지!
“크윽…!”
양 어깨가 완전히 등 뒤로 돌아간 체자라가 움찔거렸다. 살아있었다면 목청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겠지만.
시체라 약해져 있던 연골에 승지의 손가락이 파고들며 단단히 썩어있던 두 뼈를 완전히 분리해냈다.
뚜둑! 뜨드득!
ㅆ발. 손에 잡히는 느낌이 굉장히 더러웠다.
칼의 고수라면 팔을 잘라내는 걸로 대신할 수 있었겠지만, 자신이 칼을 휘두르기엔 상대의 검술이 너무 뛰어났다.
같은 검술이라면 막힐 게 뻔했던 것이다.
남의 강점을 상대로 자신의 약점을 들이댈 수야 없지.
단순 무식한 게 낫다. 뜯어내면 끝이지!
근육 몇 가닥을 제외하면 더 이상 체자라와 그의 팔을 연결시킬 수 있는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전히 굳게 검을 잡고 있는 팔이 덜렁 아래로 늘어졌다.
반대쪽에 승지의 옆구리를 걸고서.
[꺄악!! 승지야!! 제대로 찔렸잖아!]
…화끈하네.
승지가 어금니를 지그시 물었다. 칼이 얇아서 찔려도 크게 아프지 않을 줄 알았다.
확실히 고통은 모르겠고, 그냥 목소리가 안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바로 포션 부어줄게! 칼만 빼!]
다행히 성좌도 오래 놀라지 않고 정신을 차렸다.
어깨가 탈구된 체자라는 여전히 공격하고 싶은지 움찔거렸지만 팔은 이미 통제에서 벗어난 뒤였다.
뾰족하게 장기를 찌른 칼에서 몸을 빼내려 천천히 뒤로 움직인 승지가 벌렁 쓰러졌다.
“끄윽… 개 아파…!”
뒤늦게 승지가 신음했다.
지익, 탁. 지익, 탁.
재빨리 발을 끌며 다가온 체자라가 승지를 내려다보며 칼로 다시 찌르고 싶은지 상체를 흔들었다.
살아있는 모빌이 따로 없었다. 물론 진짜 모빌로 썼다간 심장마비 걸리지만.
와, 진짜 살벌해 뒤지겠네. 좀비가 머리맡에 서서 계속 빠진 팔을 흔든다니.
승지는 꺼림칙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옆구리의 상처를 성좌에게 맡겼다.
어쨌든 더는 공격 못 할 테니 내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