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잠입…은 무슨! (1)
“그나저나 조직을 향한 충성심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군.”
“윽…!”
무심코 문지기에게 백정민을 경고해버린 말라깽이가 주춤거렸다.
내가 볼 땐 둘 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놈들이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던전에 있는 동안 빠르게 올라가고 있을 글라세로의 저주가 걱정이다.
“됐으니까 문이나 열어.”
백정민은 순순히 열쇠를 돌렸다. 질퍽거리며 문이 열리는 사이 승지가 기절한 문지기 쪽으로 다가가자 백정민이 덧붙였다.
“그건 버리고 간다.”
승지의 눈썹이 까딱 올라갔다.
말라깽이는 자기를 버리겠다는 줄 알고 기겁했다.
“서, 설마 절 여기 버리고 가려고요!”
“거 아저씨 얘기 아니니까 진정하지.”
승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문지기는 자신의 운명이 지금 말 한마디에 갈리게 될 줄도 모르고 여전히 기절해있었다.
“놔두면 죽는다.”
“그래서 놔두고 오라는 거다.”
승지가 잠시 백정민과 시선을 부딪쳤다.
“이래서 양아치 새끼랑은 상대를 안 해.”
“…넌 아닌가?”
“아니야, ㅆ발.”
확고한 승지의 말에 백정민이 어이가 없는지 웃었다.
“나도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조직 폭력배지.”
“응, 거기서 거기야. 깡패 놈아.”
승지가 문지기를 어깨에 들쳐 업었다.
“난 살인자 될 생각 없으니까 입 닫고 따라와라.”
“…….”
백정민은 잠깐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좋다. 결국 네가 책임지겠지.”
곧 빼앗은 열쇠로 열린 문이 완성되었다. 세 사람은 재빨리 문 속으로 뛰어들었다.
던전 밖은 알러트의 본진이라고 해서 웅장하고 비밀스러운 건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주변은 서울과 다르지 않을 만큼 평범한 도시 골목이었다.
“그냥 도시잖아?”
“알러트는 정해진 거점이 없다. 던전 열쇠를 이용하면 어차피 보스가 있는 곳으로 나오게 되니까.”
백정민이 던전 열쇠를 회수하며 답했다.
“대신 이 건물들 중에서 보스를 찾으려면 운이 좀 따라줘야 할 거다.”
“김칫국 한 번 오지게 처먹네. 어차피 보스 잡을 생각도 없어.”
운도 최악이고 말이다.
승지가 문지기를 대충 내려놓고 말라깽이의 뒷목을 붙잡았다.
“야, 너 아직도 분신 안 돌아왔냐?”
“예, 예!”
“그럼 대충 찍어봐! 이 주변은 어차피 다 알러트 놈들만 있을 거 아냐.”
바로 알러트 조직을 뒤져보려는 승지를 백정민이 불러 세웠다.
“잠깐. 오늘 일은 내게 빚진 거다.”
뭔 개소린가 했더니.
인상을 구긴 승지가 중지를 치켜들었다.
“지랄마라. 알러트 배신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가 했잖아?”
“그래서 너도 이득을 보지 않았나?”
백정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다음에 이자를 받으러 가겠다.”
“뭐라는 거야. 지가 줘 놓고.”
“빚을 받으려면 당연히 줘야하지 않겠나.”
컨셉도 적당히 잡아야 웃기지. 승지는 쌍 뻐큐를 날려주고 뛰어갔다. 백정민은 말만 그럴싸하게 했는지 굳이 더 따라오지 않았다.
주변이 잠잠해지자 성좌가 살며시 대화창을 띄웠다.
[승지야. 아무래도 난 저 각성자가 마음에 걸려. 보스라는 사람이 각성자를 만들어냈다는 얘기도 그렇고…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야.]
성좌는 몹시 불안해보였다.
[알러트란 곳에 오래 있으면 안 될 거 같아!]
“나도 오래 있을 생각은 없어.”
승지가 첫 번째 골목을 지나기도 전에 깡패처럼 벽에 기대어있던 사람들이 승지를 발견하고는 일어섰다.
“누구냐?”
“신입?”
“아까 이렇게 생긴 녀석 안 지나갔냐?”
승지가 말라깽이의 목을 붙잡고 내밀었다.
“네가 붙잡고 있는 놈을 누구한테 물어?”
“가만. 저놈이라면…….”
뭔가 실마리가 나오기도 전에 그나마 경계심이 높던 놈이 말을 가로막았다.
“잠깐만. 그 전에 네 소속 먼저 밝혀라.”
소속이라. 그런 건 당연히 모르지.
승지는 바로 알러트인 척 연기하는 걸 포기했다.
“누굴 너네랑 같은 취급이야?”
승지가 말라깽이를 앞으로 휙 내던졌다.
“어어어! 나, 난 아니야!”
당연히 그에게 쏠리는 시선과 무기를 확인한 승지가 스킬을 날렸다.
“소류겐!”
[ 1콤보! ]
“컥!”
말라깽이에게 정신이 팔렸던 놈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날아갔다.
“이 새끼!”
“뭐하는 놈이야!”
다른 놈들이 바로 위를 쳐다보았다.
승지가 승룡권으로 상승한 몸을 그대로 허공답보로 치고 올라갔던 것이다. 떨어지는 동시에 발끝에 체중을 듬뿍 실은 승지가 다음 상대의 정수리를 찍어 갈겼다.
[ 2콤보! ]
빠악!
“이 쌍놈이…!”
“오, 막았네?”
손목으로 공격을 받아낸 녀석이 두툼한 주먹을 위로 확 뻗어왔다. 승지도 불끈 주먹을 쥐고 맞받아쳤다.
빠각!
[ 3콤보! ]
“으윽!”
거세게 관절끼리 부딪친 주먹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가벼워 보이는 승지와 어깨가 절구만한 알러트 놈이 동시에 때렸는데 서로 힘에 밀려나다니. 힘 스탯의 영향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괴리감이 충격적일만큼 컸다.
승지는 지체하지 않고 밀려나느라 생긴 상대의 빈틈을 프레임 컨트롤로 멈춘 뒤 멱살을 틀어쥐었다.
“이 자식…!? 무슨 스킬을…!”
“숫자 잘 세라.”
그대로 어깨에 착지한 승지가 매달린 채로 힘껏 주먹을 뒤로 뺐다.
빡! 빠악! 빡!
[ 4콤보! ]
[ 5콤보! ]
[ 6콤보! ]
“커어억……!”
연달아 얼굴에 정타를 맞은 덩치가 비틀거렸다. 승지는 피범벅이 된 주먹을 틀어 턱을 올려쳤다.
[ 7콤보! ]
쿠웅!
두개골까지 울리는 충격에 안구가 흔들린 덩치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의 상체에 매달려있던 승지가 가볍게 틀어쥐고 있던 멱살을 놓고 밀어냈다.
“7번! 많이 버텼네.”
순식간에 하나가 무력화 된 걸 본 주변이 조용해졌다. 하필 승지가 골목 앞을 막아선 탓에 위압감이 더욱 커보였다.
승지는 구석에 덜덜 떨고 있는 말라깽이를 가리켰다.
“다시 물어본다. 아까 이렇게 생긴 놈 어디로 갔어?”
“그걸 알아서 어쩌려고!”
“묻는 말에 질문하지 말고, 새꺄. 대답할 줄 모르냐?”
승지가 손을 까딱였다. 이렇게 해도 여전히 페널티가 오는 느낌은 없었다.
오조희한테 미안하지만 좀 더 날뛰어야겠다.
“딱 한 번만 말해주면 알아서 튈게. 진짜 아무도 말할 생각 없냐?”
“죽여!”
대답 대신 다른 녀석들까지 덤벼왔다.
하지만 승지가 처음에 골목부터 노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른 놈한테 들킬 걱정 없이 한 놈씩 잡을 수 있다는 거!
승지가 차례로 달려오는 놈을 보고 자세를 잡았다. 남은 놈들은 아까 쓰러트린 녀석에 비해서 한없이 팔다리가 짧았다. 무기까지 포함해도 닿지 않을 만큼.
승지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뻐억!
“억!”
[ 1콤보! ]
빠악!
[ 2콤보! ]
“크억!”
“이, 비겁한 새끼가!”
겨우 두 대만 때렸는데도 놈들의 눈이 뒤집혔다.
“왜 그래? 덤벼보라니까?”
승지가 가볍게 손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분통 터지게도 놈들은 승지를 공격할 수 없었다.
접근만 하면 승지가 바로 다리를 후려갈겼던 것이다.
분명히 똑같은 자세와 똑같은 패턴으로 날리고 있는데 거리만 좁히면 바로 번개처럼 발이 날아왔다.
“짠발, 짠발, 짠발. 가깝네? 오른손 정타 들어가죠?”
[ 3콤보! ]
[ 4콤보! ]
[ 5콤보! ]
“푸거억!”
열이 뻗친 알러트 일당이 다리만 노리고 달려들면 승지가 바로 패턴을 바꿨다.
“어허, 빈틈 보인다. 소류겐!”
“크아악!!”
얻어맞으면서도 그들은 미쳐 날뛰었다. 상대가 똑같은 기술로 계속 때리니 더 돌아버릴 것 같았던 것이다.
캬하, 얍삽이. 내가 당할 땐 개 짜증나는데 내가 하니까 재밌네?
승지가 실실거렸다.
올라간 스탯이 몸을 받쳐주니 격투게임으로 키운 동체시력과 반사 신경을 그대로 써먹을 수 있었다.
아직 민첩 스탯이 부족해서 가끔 놓칠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땐 프레임 컨트롤로 보완하면 그만이다.
음, 좋아. 각성자 상대로도 충분히 잘 먹히네. 기왕 악당 무리에 들어온 거 한 번 얼마나 강해졌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는데 결론은 훌륭하다.
콤보 쌓아서 스킬을 키울 필요도 없잖아?
승지가 장난스럽게 도발했다.
“계속해? 아님 이제 분신 위치 알려줄래?”
“젠장! 우리도 모른다고!”
“그냥 지나가기만 했단 말이다!”
“음. 내가 잘못 골랐네.”
잘못을 인정해도 패는 건 마저 해야겠다. 승지가 남은 녀석들을 쓰러트리는 동안, 불현듯 말라깽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헛…!”
그가 황급히 손을 맞잡았다. 남들 몰래 인벤토리를 열어보기 위해서였다. 덜덜거리는 손바닥 위로 작은 손수건 하나가 떨어졌다.
임무를 완료한 말라깽이의 성좌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순식간에 말라깽이의 안색이 바뀌었다. 처음엔 성좌만 돌아오면 승지를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다른 알러트들과 싸우는 걸 보니 간부급을 불러오지 않는 이상 도저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말라깽이가 슬금슬금 몸을 낮췄다. 차라리 승지가 싸움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분신을 만들어놓고 빠져나갈 속셈이었다.
그러나 말라깽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바로 승지의 성좌였다.
말라깽이의 분신이 생겨난 즉시 상태창이 팟 하고 나타났다.
[승지야! 저 사람 분신이 새로 생겨났어! 성좌가 돌아왔나 봐!]
“분신이 돌아왔다고?”
“힉…! 어, 어떻게!”
승지의 시선을 받자마자 질겁한 말라깽이가 분신이고 뭐고 도망쳤다.
“임마, 어딜 가!”
아직 앞에 놈을 두드리고 있던 승지가 급한 김에 말라깽이 쪽으로 무대 매너를 날렸다.
“……!”
도망가려던 말라깽이가 그대로 마비되더니 고꾸라졌다.
얼레. 진작 쓸 걸 그랬네.
잊고 있던 스킬이 떠오른 승지는 서둘러 나머지 일당들을 처리했다. 매너 모드로 들어간 놈들은 무척이나 평온하게 입을 다물어주었다.
승지가 쓰러진 말라깽이를 뒤집었다.
“야, 분신이 돌아왔으면 말을 했어야지! 다들 어디로 끌고 간 거냐?”
“……!”
“왜 말을 안 해?”
[스킬을 해제해줘야 하지!]
무대 매너가 마비랑 침묵을 한꺼번에 거는 스킬이다 보니 한쪽만 해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약간 귀찮긴 하네.
쯧 소리를 낸 승지가 무대 매너를 풀자마자 말라깽이가 버둥거렸다.
“으악, 다 말하겠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이제 알았다구요!”
“그래?”
“거기가 어디냐면요…!”
말라깽이는 벌벌 떨면서 자기가 본 모든 걸 털어놓았다.
* * *
똑.
오조희는 뺨을 타고 흐르는 액체에 겨우 눈꺼풀을 떨었다.
“선생님! 정신이 드세요?”
“……여기가….”
어디죠, 하고 물으려던 대답은 말라버린 목구멍에 걸렸다.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오조희는 걱정스레 자신을 바라보는 선생들을 발견했다.
“계속 쓰러져계셔서 얼마나 걱정했다구요…!”
“알러트 녀석들이 선생님한테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들이 갇혀있는 곳은 넓은 지하실이었다. 다만 벽면에 말라붙은 오물과 핏자국이 불길한 느낌을 풍겼다.
오조희가 띵 울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건, 페널티 때문이에요. …승지 씨는요? 승지 씨도 잡혀왔나요?”
“선생님이 데려오신 빨간 머리 남자 분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분은 깨어났을 때 안 보였어요!”
“다행이다….”
오조희가 바닥을 짚었다. 겨우 깨어났는데도 계속 몸 상태가 안 좋아졌다. 승지의 생존을 확인할 수 있는 건 다행이지만.
페널티가 올라가는 만큼 혹시 승지가 자신들을 구하러 오는 게 아닐지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차라리 페널티로 몸이 아파지게 되길 바라게 되다니.
끼이익.
자조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오조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바짝 긴장했다.
문이 열리며 지하실에 누군가 들어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