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이세계인을 주웠습니다만 (3)
그리고 이세계인은 대한민국으로 이민 오기엔 엄청나게 쓸모없는 놈으로 밝혀졌다.
와장창!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류의건이 눈을 질끈 감았다. 벌써 세 번째 그릇을 깨먹은 이세계인이 겁먹은 눈으로 둘러보았다.
“나, 나는 대왕이노라!”
변명이 그거냐.
소파에 늘어져라 앉아있던 승지가 한숨을 쉬며 뒷목을 젖혔다.
“아저씨. 도대체 몇 번째야. 이거 진짜 알바였으면 바로 잘렸어.”
“아저씨가 아니라 거스 대왕이라니까!”
발끈한 이세계인, 그러니까 거스가 대꾸했다.
이 인간이 사실 이세계 왕이라니. 그쪽 세계가 왜 망해 돌아가는지 여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이름까지 골 때린다. 본인을 아스파라 왕국의 거스 대왕이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진짜 장난하냐고.
저 인간을 초록 초능력 공룡에 비유했더니 진짜 초록색 야채가 오면 어쩌자는 거냐.
류의건이 애써 친절함을 유지했다.
“괜찮으니 안 해도 된다고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냅둬. 자고로 인간은 강하게 키워야 하는 법이야.”
왕이고 뭐고 적어도 사람 하는 일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승지가 소파에 길게 드러누운 꼴을 본 유청이 성격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그러는 당신도 놀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뭔 소리야. 지금은 가르치는 중이라 그렇지. 내가 저 설거지 하면 10초 만에 끝나. 발가락으로 해도 1분이다.”
[꺄아 역시 승지야! 대단해!]
아르바이트는 기술보다 잡일을 할 경우가 많아서 승지는 허드렛일에는 도가 텄다.
그리고 저런 일은 하면 할수록 진짜 돈 받고 해야지, 남한테 그냥 해주긴 싫다는 특징이 있다.
승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저씨. 집에 못 돌아가면 여기서 노동자 되는 거야. 그 상태로 굶어 죽지 않을 수 있겠어?”
“에이잇! 도저히 못 하겠노라!”
결국 고무장갑을 벗어 던진 거스가 양 손을 들이댔다.
“이 손 빨개진 거 보이노라? 손가락도 퉁퉁 불고 태어나서 이런 일은 처음이니라!”
“민주주의 공화국에 온 걸 환영한다, 대왕 놈아? 그걸 변명이라고 주절거려.”
승지는 거스의 항의를 코딱지보다 더 가볍게 튕겨 보냈다. 울상이 된 거스가 간절하게 류의건을 바라보았다.
“제발 저 광대 놈에게 뭐라고 좀 해주게! 신의 심판자께서 이렇게 극악무도한 짓을 보고만 있을 텐가!”
“어…… 뭐라고 하시는지….”
류의건이 난감하게 승지를 흘긋거렸다. 당연히 승지가 저 말을 통역해줄 리가 없었다.
거스가 가슴을 쳤다.
“아이고 답답해! 누가 나 좀 구출해주게! 장군! 장구운!!”
애타게 찾는 장군은 이미 거대 스켈레톤한테 당하지 않았냐.
싹 쓸려있던 전장을 떠올리자 기분이 얹잖아진 승지가 턱을 괴었다.
“대체 저런 놈이 어떻게 혼자 살아남은 거냐. 참 신기해.”
“무례하도다! 단 한 명뿐인 왕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고귀한 희생을 했거늘!”
“어이구, 더 한심해지시네?”
입으로 나불거리는 것만큼 고귀한 희생이면 고마워하거나 미안해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던지.
왕이랍시고 주둥이만 금칠을 한 꼴이라니. 주둥이부터 빼고 목숨 값을 다시 계산해주고 싶은걸?
“성좌 너도 저런 인간 밑에서 산거냐?”
[히잉. (⋆ʾ ˙̫̮ ʿ⋆) 내 왕은 저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고생 많이 했어. 힘들었지.]
어쩐지 승지가 거스를 구박할 때마다 성좌 녀석이 은근히 상태창에다가 꽃가루를 날린다 했다.
[어쨌든 난 승지가 하는 일이면 다 좋아!]
그 때 거실 한 쪽에서 서성거리던 류의건의 스마트폰이 드디어 띠링 울렸다.
“어둑시니 길드장한테 답장 왔습니다!”
“오, 열쇠 있대?”
덩달아 벌떡 일어난 승지가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잠깐 화색이 되었던 류의건의 안색이 바로 어두워졌다.
“마무자의 던전 열쇠가 있긴 하지만 전부 클리어 직전까지 공략이 끝나서 정령석 채굴에만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일단 들어갔다가 원래 거기 살던 인간인 척 방생하면 안 되나?”
“어려울 겁니다. 채굴료를 낸 다른 길드도 함께 있다고 하니.”
“아, 이런. 다른 길드랑 만나는 건 껄끄러운데.”
승지가 이마를 쓸었다.
이세계가 나타나고 각성자니 성좌니 있는 세계지만 아직까지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마법이나 스킬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각성자를 떠나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겠지. 인류의 숙원을 풀어줄 영생의 길이 열린 셈이니까.
각성자들이 가진 스킬도 아직까지는 부위를 재생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어서 비싼 값을 내면 제대로 효과를 보는 고급 병원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승지랑 싸웠던 길드 연합 중 하나인 하얀 길드가 각성자로서는 그리 강하지 않아도 떼돈을 벌어들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던전이나 미션을 하지 않아도 현실에서 몰려드는 환자들로 돈을 벌고, 그걸 코인으로 바꿔서 장비를 마련한다.
일종의 현질 길드인 셈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내가 부활했답시고 나타나면 엄청나게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거기다 글라세로 문제도 있고. 저주가 여전히 있다고 오해하거나, 사실은 마왕을 잡았다고 밝혀도 귀찮아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마 바로 랭커에 올라가고 여기저기 얼굴이 팔리겠지. 우와, 귀찮다.
귀찮은 게 싫어서 거스 놈을 보내버리려는 건데 그러려고 귀찮은 일을 늘리는 건 앞뒤가 안 맞지.
아직 만족할 만큼 강해지지도 못했는데 유명세부터 커졌다간 성가셔질 뿐이다.
류의건만 봐도 유명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미션 의뢰나 방송 요청이 들어왔고, 길거리에 제대로 나가지도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본인의 성격과 능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킹고블린을 잡을 때 막타를 빼앗기지 않았나.
만약 킹고블린을 잡는 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른 놈들이 막타를 훔쳐갈 생각은 못했을 거다.
당연히 보복이 들어올 테니까.
하지만 류의건은 좋게 말하면 선한 인간이고 나쁘게 말하면 호구로 널리 알려진 인간이었으니, 길거리 잡배들도 혹시나 하고 찔러보았던 것이다.
물론 류의건도 아주 멍청이는 아니니 그 놈들을 잡긴 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일이 귀찮아진 셈이다.
내 경우엔 알러트 놈들이 페널티 스킬 때문에 꼬일 테니까 굳이 내가 어디서 뭐하는지 알려줄 필요가 없지.
역시 결론은 하나다.
일단 힘부터 키우고 싹 다 털어먹은 다음에 유명해지지 뭐. 어차피 알러트 놈들은 뒤가 구린 만큼 털면 돈도 제법 나올 테고 말이야.
손을 까딱거려본 승지가 물었다.
“다른 길드는? 네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열쇠도 없냐?”
“예. 안타깝지만 마무자의 던전은 가진 바가 없습니다.”
“흐음. 그러냐.”
랭킹 1위만큼은 못해도 2등만큼은 가지고 있을 줄 알았더니. 류의건이 머쓱하게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어둑시니 길드장님이 또 비밀스러운 일이면 자기도 껴달라고 하는 말을 흔쾌히 덧붙여주셨는데요.”
“딱히 힘을 쓸 일도 아니라 필요 없어.”
승지는 바로 거절했다. 다만 길드장이라는 단어에 떠오른 사람은 하나 있었다.
최대한 가볍게 물어보는 척 승지가 말을 던졌다.
“근데 청월량 길드장에게도 던전 열쇠가 꽤 있지 않냐?”
“유월 말입니까?”
본인 쌍둥이 얘긴데도 표정이 구겨진 유청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꽤 있습니다만. 이번 일에 협력 할지는 모르겠는데요.”
“그럼 내가 연락….”
“제가 연락하죠!”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고자 유청이 허겁지겁 끼어들었다.
[걱정이 많네! 어차피 승지는 모솔이라 먼저 연락해도 잘 안 될 텐데 말이야!]
“…….”
불만과 초조가 가득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두들기던 유청의 눈썹이 곤두섰다.
“젠ㅈ… 마침 근처라 직접 오겠다네요.”
* * *
“안녕하세요?”
현관으로 들어온 유월이 인사했다.
“마무자의 던전이 필요하다면서요?”
유월이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거스 놈이 다섯 번째 접시를 깨트렸다. 이번엔 심지어 고의적이었다.
“맙소사.”
입을 헤 벌린 거스가 손을 멍하니 공중에 띄워놓았다.
“태어나서 저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이도다!”
“저건 뭐죠?”
유월이 고개를 까딱였다. 거스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어도 시선이며 멍청한 얼굴이 당연히 거슬렸을 것이다.
거스의 표정이 개개 풀렸다.
“하아, 볼수록 눈의 보배로고. 할 수만 있다면 성까지 데려가고 싶도다!”
저게 죽고 싶나? 어디서 이세계 아재 놈이 침을 발라?
[헉, 승지야! 참자~ 참자~! 뭘 모르는 아저씨잖아!]
참지 않는 승지가 간단하게 그를 교육했다.
“이놈의 주둥이. 주둥이.”
“억! 억!”
승지가 거스의 입술이 얼굴에 파묻힐 때까지 손바닥으로 때리는 동안 유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승지 씨 새로운 머슴이니?”
“머슴이 아니라 왕이야.”
유청이 떨떠름하게 설명했다. 유월이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그는 유청의 설명을 들으며 승지가 거스 대왕을 두들겨 패는 걸 1열에서 관람했다.
“흐응. 이세계에서 온 왕이라니. 집에 돌려보내려면 고생 좀 하겠네.”
“일단 자길 주운 사람부터 운이 더럽게 없는 거야. 저 인간은.”
입술이 퉁퉁 부은 거스가 훌쩍이며 하소연했다.
“너, 너무하도다! 왜 안 말리는가! 신의 심판자! 신의 심판자!”
“이름도 모르는 놈이 불러대기는.”
승지는 짧게 손을 털고는 콤보가 끊겨 미약하게 올라간 페널티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계속해볼까? 아니면 어디 천한 광대 놈한테 빌어보시던가?”
“허… 허어어….”
“거기까지 하시죠.”
정도를 넘을라치면 반드시 끼어드는 류의건이 말렸다. 승지도 딱히 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서 관뒀다.
유월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었다.
“마무자의 던전 열쇠는 가져왔어요. 이 중에 당신 고향을 알아볼 수 있는 게 있나요?”
유월이 손을 짤랑댔다. 다 똑같이 생긴 청회색 열쇠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늬가 달랐다.
승지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거스에게 유월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금세 입술이 가라앉은 거스가 눈을 힐끔거리며 유월과 열쇠를 훔쳐보았다.
“글쎄, 이 중에선 없는 거 같은데… 아마도….”
“똑바로 말 안 해?”
“없어! 없다니까! 내가 있는 곳에선 노랗게 별이 떠야 한다고! 여기 열쇠에 흐르는 것들은 다 까맣거나 파랗잖아!”
지레 겁을 먹은 거스가 꽥꽥 소리를 질렀다.
긴 거스의 말을 승지가 짧게 줄였다.
“없단다.”
“…허무하게 됐군요.”
류의건이 비스듬히 벽에 어깨를 기댔다. 아무리 착한 놈이라지만 간만에 들어온 집에서 한 시간마다 소리를 질러대는 거스 대왕이랑 계속 살아야 한다니 끔찍한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난 완전 착한 세입자지.
“결국 무리해서라도 열쇠를 빌려와야 하겠군요.”
“아니면 서큐버스한테 가지 그럽니까? 매일 밤 찾아온 정성이 있으니.”
저 자식이!
승지가 유청을 노려봤지만 이미 말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입단속 하랬더니 아주 기회만 노리고 있었냐!
가뜩이나 유월한테 팔 자른 놈으로 기억되는 처지에 서큐버스까지 끼고 있는 걸 더하면 어쩌자는 거냐!
과연 유월의 표정이 달라졌다.
“서큐버스?”
“아 그게… 음…….”
승지가 유월을 좋아하는 걸 아는 류의건이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애를 썼다. 별로 도움은 안 됐지만.
에라이. 살면서 거짓말도 안 해봤냐.
결국 승지가 이를 갈며 먼저 불었다.
“서큐버스가 도와줄 테니 자기 마왕을 만나라는 제안을 한 건데, 거절할 겁니다.”
“왜요?”
“…예?”
설마 왜가 나올 줄 몰랐던 승지의 말문이 한 순간 막혔다. 대신 벙 찐 유청이 되물었다.
“너 서큐버스는 신경 안 쓰여? 아니, 그보다 마왕이잖아? 제정신이야?”
“나 만나본적 있는데.”
유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클랩 마왕. 만난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