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뒤통수 (1)
승지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각성자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현실에서도 범윤오가 잠적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자신이 던전에서 보았던 게 얼마나 현실과 맞아 떨어질지는 몰라도, 범윤오의 갑작스러운 실종은 충분한 증거였다.
윷놀이가 있던 그 날이 범윤오를 볼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었다.
며칠간 사라졌다가 나타난 승지가 강요하듯 범윤오를 수배했지만 번태는 순순히 승낙했다.
“안 그래도 갑자기 길드장이 자리를 비워 난리가 났다고는 들었네. 설마 도망쳤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번태는 승지의 연락을 받자마자 빠르게 길드원을 연결해 국내외 랭커들에게 현상수배를 전했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신속하고 빠른 대처였다.
다만.
“범윤오 포획은 내일까지는 공표되지 않을 걸세.”
“미쳤어?”
직감은 당장이라도 잡아들이라고 소리치는 통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그 새끼는 위험해.”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알러트 보스를 잡은 기쁨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어. 이제 와서 알러트 보스가 따로 있다고 하면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나겠는가.”
번태의 말에 승지의 혈압이 치솟았다.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냐?”
“신뢰의 문제라네. 사실은 얘가 범인이었다, 아니다, 이렇게 자꾸 말을 바꿀수록 사람들 사이엔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게야.”
“그러니까 처음부터 밝히시던지.”
“드러난다고 모두 진실로 받아들여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번태가 엄하게 말했다.
“자네는 지금 류의건 선생처럼 말하고 있네.”
자신이 아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를 들먹이자 승지의 머리가 약간 식었다.
그 때를 틈타 번태가 말을 이었다.
“악은 제거된 다음에야 공표하는 걸세. 그 전에는 사람들이 동요하고 오히려 함정으로 몰려 들어가게 만들 수도 있다네. 공포가 늘 그렇듯이.”
“개소리하지 마. 인간들이 다 빡대가리인줄 아냐?”
“아니지. 절대 아니야. 다들 영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합리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챙기게 된다네. 그러니 가끔은 그들도 위험을 감수해야지!”
번태는 정말로 자신이 무슨 변신 영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승지의 표정이 점점 더 구겨졌다.
류의건이었다면 무조건 반대하고 바로 알러트 보스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알렸을 것이다.
혹시라도 남은 사람들이 모르고 당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이 알러트 보스가 살아있다는 걸 알아봤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번태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모른 채로 놔두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승지가 어금니를 짓씹었다.
“연락할 인간을 잘못 골랐네.”
“아하, 전혀 아닐세.”
번태가 돌아가려는 승지를 막아 세웠다.
“자고로 선량한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키는 게 영웅의 미덕 아니겠나!”
“그것도 입이라고 터졌냐?”
승지가 번태의 턱 밑으로 뿅망치를 거세게 들이밀었다.
“너도 이게 뭔지 모르겠다며?”
그건 승지가 다른 랭커가 아니라 번태에게 먼저 연락을 취한 이유였다.
갑자기 돌변한 마왕의 무기를 확인해보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와서 이딴 개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면 생각을 바꿔먹었겠지만.
번태는 턱 밑에서 하찮게 주름을 드러낸 뿅망치를 재밌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사라진 마왕의 무기. 닿는 것마다 모두 삼키고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만, 정작 왜 뿅망치로 변했는지는 전혀 모르겠군.”
번태는 마치 칼이라도 들이댄 것처럼 뿅망치를 신중하게 대했다.
물론 미소는 떠나가지 않았지만.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지. 자네가 처음으로 쓴 무기였기 때문에 그 형상을 취했다던가, 그 괴상한 던전에서 영향을 받았다던가.”
“쓸모없다.”
“더욱 쓸모없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이지.”
번태가 턱으로 뿅망치를 누르자 쀼악하고 작은 소리가 났다.
“승지 군.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알릴 걸세.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
“지금은 알러트를 소탕한 기쁨이 너무 커. 그만큼 반작용이 클까봐 걱정될 뿐이야.”
번태는 양 손을 든 채 계속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건 어느 쪽의 위험을 감수할지 택하는 거였으니까.
그저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험악한 표정을 한 승지가 목을 치듯 손을 올렸다.
“그러다 일이 잘못 되면.”
“전부 내 탓으로 해두지.”
승지가 뿅망치를 내렸다. 번태가 어깨를 으쓱하며 요란하게 목을 풀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던전에 있어서 모를 거 같으니 지금 말해주겠네. 내일이 바로 알러트 소탕 기념 파티가 있어!”
“기껏 빼자마자 바로 후회하게 만들래?”
승지의 표정이 와작 구겨졌다.
개소리 하나 넘기면 다음 개소리가 작렬하니 완전히 개판이다.
“당장 각성자 놈들이 그 새끼를 쫓아도 모자랄 판에 얼어 죽을 놈의 파티?”
“진정하게나! 당연히 추적이 가능한 각성자는 참여하지 않지! 어차피 추적 스킬이 없는 각성자들은 모여서 사람들이 안전해졌다는 확신을 주려는 거야.”
“미친놈들.”
진작 번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알아봤어야 하는데.
저 정도면 영웅 심리가 아니라 안전 불감증이다.
그런 하잘 것 없는 파티에 가느니 자신은 범윤오의 길드나 뒤져볼 생각이다.
“죽어도 안 간다.”
“꼭 오게! 자네도 그 주연 아닌가!”
승지는 꺼지라는 듯 중지를 날렸다.
번태는 과장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댔다. 그러다 승지가 보이지 않게 되자 바로 웃음기를 지웠다.
대기하고 있던 어둑시니 길드원들이 속속들이 나타났다.
“국제 팀과 연락 되었나?”
“네. 길드장님.”
“승지 군이 더 많은 사람한테 얘기하기 전에 범윤오를 붙잡아 와야 하네. 사람들이 성좌에 대해 관심을 가질수록 마왕들이 유리해져.”
늘 얼간이처럼 웃고 다니던 번태의 표정이 드물게 심각해졌다.
“끝까지 알러트의 존재를 감출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테지만… 승지 군의 성좌가 엮이는 바람에 일이 좀 복잡해졌군.”
“저희가 수집한 다나우의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은 성좌라 방심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우리가 갖고 있는 건 제국의 기록뿐이니까. 그들 눈엔 광대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러나 그 광대가 성좌가 되었을 때 그의 계약자는 모든 것을 바꿀 변수가 되었다.
번태는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모든 것은 제국에서부터 시작되었어.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각성해서 싸워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어둑시니 길드원들은 누구보다 사람들의 안전을 바라는 번태를 안타깝게 응시했다.
어둑시니 길드원들이 지키는 비밀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언제나 선뜻 받아드는 번태 덕분에 그들은 일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들이 따르는 영웅.
번태는 금세 기운을 차렸다.
“어쩔 수 없지! 성좌신은 이미 우리한테 나타나 버렸으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세!”
* * *
승지는 어둑시니 길드를 나오자마자 바로 범윤오가 살던 집이나 길드로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범윤오가 살던 집은 새까맣게 불타버린 뒤였으니까.
“뭐야?”
눈을 부릅뜬 승지가 아직도 불티가 날리는 철조를 노려보았다.
불이 났다 꺼진지 얼마 안 되었는지 재투성이가 된 소방관들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건물을 드나들고 있었다.
불구경을 하러 몰려든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찰칵거리며 촬영을 하기 바빴다.
분명히 휴대폰으로 검색해서 온 범윤오의 집이었기에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단순히 본인만 몸을 숨기고 잠적한 게 아니었나.
승지가 급하게 사진을 찍던 인간 하나의 팔을 붙잡았다.
“이봐! 여기 불 언제 난 거야?”
“네? 글쎄요. 저도 소방차 소리 듣고 깨서 잘 몰라요….”
승지가 등장했을 때부터 흘긋거리던 구경꾼이 끼어들었다.
“아마 몬스터가 나타났다던데요. 각성자들 미션이 그렇죠, 뭘.”
“근데 어디서 본 얼굴 같은데 혹시 각성자세요?”
승지는 관심을 보이는 인간들을 밀어내고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각성자 일 때문에 왔습니다!”
승지가 화재 때문에 떨어지는 철근을 신경질적으로 쳐내자 소방관들이 떨어졌다.
그를 쫓아내는 대신 소방관들이 당부했다.
“함부로 건드리시면 안됩니다. 어떻게 화재가 났는지 안쪽에서부터 폭발해서 잘못 건드렸다간 다 무너질 거예요.”
“드물게 단독 주택이라 다행이긴 하지만… 이런 부잣집에서 이만큼 불이 번지기도 힘든데.”
잔뜩 표정이 일그러진 승지가 소방관을 놔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탄내가 풍기는 가구들은 하나같이 고급품이었다. 어린 녀석이 잔뜩 허세에 쩔어 이것저것 구입하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그러나 정작 자세한 서류라던지 기록한 걸 찾아낼 수는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불이 혓바닥으로 핥고 간 것처럼 겉가죽이 아닌 내용물들만 모두 전소해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불이 난 게 아니다.
의도적으로 불을 낸 것보다 한 차원 위인 조종하는 수준이었다.
승지는 당혹스러워졌다.
던전에서 자신의 정체를 들켰다고 이렇게까지 하나?
이건 단순히 범윤오를 다나우 성좌가 조종해서 도망가기 위한 짓이라기엔 너무 과했다.
성좌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달라.]
“뭐가.”
[알러트 보스라고 밝혀진 채 죽은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은 별로 눈에 띄는 활동을 안 했지?]
“어. 랭커긴 했지만 그냥 적당히 각성자 생활 하는 놈이었지.”
[다나우에게 조종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나우를 조종하는 사람이라면 알러트를 이용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겠지?]
승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성좌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얼핏 감이 왔던 것이다.
성좌가 조심스럽게 대화창을 띄웠다.
[이거, 다나우보다는 범윤오를 위해서 난 화재 같지 않아?]
승지가 미간을 좁혔다.
만약 다나우가 그저 자신을 숨기려고 했다면 숙주인 계약자만 데리고 도망치면 된다. 그러다 다른 각성자의 몸으로 갈아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만약, 범윤오가 본체라면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추기 위해서 증거 인멸을 시도할 것이다.
지금처럼.
“범윤오가 다나우를 조종했을지도 모른다는 거냐?”
[그것까진 과하지만…. 애초에 성좌를 옮겨 다닐 수 있을 정도라면 진짜 최초로 다나우와 계약한 사람은 범윤오일 지도 몰라.]
[성좌는 막 각성자와 만났을 때까진 별로 강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아. 나만 해도 승지가 강해진 뒤에야 조금씩 현실에 발휘하는 영향력이 커졌는걸.]
“그렇다면….”
[범윤오는 단순히 조종당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알면서도 다나우한테 협조했을지도 몰라. 미션을 깨서 보상 대신 인벤토리를 늘렸던 알러트 부하처럼.]
“미션으로 얻은 힘을 자신이 아니라 모두 성좌에 몰아주었다…?”
그리고 강해진 성좌는 마왕과 다시 접촉해 힘을 얻어내고 도로 각성자에게 마왕의 힘을 뱉어냈다면?
섬찟한 예감으로 승지의 뒤통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그 열기는 착각이 아니었다.
띠링!
[ 메인 미션 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