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곤장 한 대요!
최자림의 광폭한 운전 속에서도 서명구의 추적 스킬은 정확함을 발휘했다.
“다음에 우회전! 우욱, 바로 저기 앞이에요!”
“저긴 공사장이잖니, 명구야!”
“가벽입니다! 잠깐 멈춰서…!”
“이 차는 후진 같은 거 모릅니다!!”
후진이 아니라 정지하라고 했는데!
류의건의 말을 무시한 최자림이 그대로 가벽을 뚫고 들어갔다.
끼기기긱!
“악! 아악!”
“승지 씨!! 아, 확성기 가져올 걸. 승지 씨! 어디 계세요!”
최자림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공사장을 질주했다. 어디 철근에라도 갖다 박는 게 아닐까 조마조마하게 보던 서명구가 펄쩍 뛰어올랐다.
“아악 각성자님! 앞에 구덩이요!”
“구덩이?”
“잠깐! 저 아래쪽입니다!”
창밖으로 한껏 몸을 내민 류의건이 거대한 구덩이 바닥에서 사람 두 명을 발견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류의건의 시각은 그것이 묶여있는 유청과 칼을 든 채승지라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안 됩니다, 승지 씨!”
놀란 류의건이 그대로 뒷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끼야아아악!”
“우리도 내리자 명구야!”
최자림이 차를 버리고 조수석으로 몸을 굴렸다. 눈물콧물이 된 명구는 반 기절 상태가 되어서 같이 떨어졌다.
그대로 날아서 구덩이를 통과한 차는 벽에 부딪쳐 산산이 터져버렸다.
콰아앙!
유일하게 공사장에서 불타지 않았던 부분에 타이어가 굴러가며 장렬한 불바다를 남겼다.
이 모든 꼴을 보니 아무리 승지라도 잠깐 동안은 얼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니들은 뭔데 나보다 화려하게 등장하냐?”
“승지 씨! 무사하신 모습을 보니 반갑네요!”
“지금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승… 구에에엑.”
한꺼번에 쏟아지는 걸 본 승지가 인상을 썼다.
“뭔 짓들이야, 지금.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훗! 저번에 승지 씨를 쫓아온 거랑 같은 방법이죠!”
서명구에게 화를 내려던 승지는 이미 빈사상태인 그를 보고 말을 접었다.
게다가 무지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접근한 류의건까지 보니 그냥 그걸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류의건은 생생하게 4D로 살아있는 승지를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몇 번이나 다시 훑어보았다.
“정말 살아 계셨군요.”
“보시다시피.”
승지는 가볍게 으쓱했다. 그나마 내가 살아 돌아온 걸 제대로 기뻐하는 인간이 있기는 하군.
“최자림 씨! 류의건 씨! 이것 좀 풀어주십시오!”
다른 각성자들의 목소리가 들리자 유청이 다급하게 버둥거렸다. 승지가 경고했다.
“미리 말하는데 끼어들지 마라.”
“갑자기 웬 곤장 체험이에요?”
“곤장이 아니라 처형대야.”
주변을 기웃거리던 최자림이 놀라 덜그렁 곤장을 떨어트렸다.
류의건은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승지 씨. 유청 씨가 당신을 버리고 가서 화가 난 건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오, 버려서란다. 들었냐?”
“…….”
구해달라고 소리치던 유청도 그 말엔 입을 다물었다. 아마 유청에게 남아있던 마지막 한 톨의 양심이었나 보다.
유청의 반응에 류의건이 되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을 구해내지 못해서 버리는 걸 택한 게 아닙니까?”
더 대꾸하고 싶지도 않아진 승지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러나 아래로 떨어진 승지의 검을 류의건이 급히 막아냈다. 랭킹 2위다운 반사속도였다.
“일단 멈춰주세요!”
“싫은데?”
“자자, 여기서 교통정리 한 번 들어갑시다.”
구경하고 있던 최자림이 박수를 짝짝 치며 끼어들었다.
“승지 씨는 유청 씨를 죽일 거고, 류의건 씨는 그걸 말릴 거고, 여기서 문제! 유청 씨는 뭘 바라죠?”
“풀어주십시오!”
“으음, 그건 승지 씨가 안 된대요. 다른 건요?”
최자림이 유청 눈높이에 맞도록 쪼그리고 앉았다.
“애초에 왜 죽은 승지 씨가 어떻게 유청 씨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유청이 사실을 토해냈다.
차라리 죽인 이유를 말하고 풀어달라는 정당성을 확보하려던 모양이다.
“죽이다뇨…? 하지만 지금 멀쩡히.”
“요단강 절반까지 건넜다가 성좌가 건져줬다. 앞으로 비오는 날마다 구멍났던 목이 쑤실 예정이다, 왜?”
승지가 비아냥거리자 류의건이 창백해졌다. 그의 도움을 받기는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유청이 이를 악물었다.
“최자림 씨. 당신은 내가 왜 그랬는지 알지 않습니까.”
드물게도 최자림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으음, 알죠. 그러니까 전 빠질래요.”
“최자림 씨!”
“둘 다 이해가 가는 걸 어떡합니까? 이렇게 된 거 승지 씨랑 유청 씨가 둘이서 해결하게 두죠!”
“그래도 살인은 안 됩니다!”
아주 지들끼리 개판이구만.
더는 혈압이 혈관을 감당할 수 없어진 승지가 거기 있던 인간들에게 싹 다 무대 매너를 걸었다.
“!”
“공연 볼 땐 조용히.”
승지의 스탯으로는 아주 잠깐 그들을 멈춰둘 수 있었을 뿐이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영화 속 화면분할처럼 떨어지는 검과 유청의 얼굴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왔다.
써걱!
“크으윽!”
유청의 오른쪽 팔뚝이 꿈틀 움직였다. 그러나 나오는 건 오직 피 뿐이었다.
진짜 기분 더럽네.
처음으로 괴물이 아니라 사람을 썰었다. 분명 자르는 감각만큼은 똑같을 텐데도 몹시 불쾌했다.
팔만 잘라도 이런데 살인자 놈들의 신경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승지는 바닥으로 떨어진 오른팔을 주워들었다.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무대 매너에서 풀려난 류의건이 승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손아귀가 몹시 억셌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댁이 보증이라도 설까?”
승지가 자른 오른쪽 팔을 여전히 불타는 사고현장에 던져 넣었다.
“앞으로 유청이 각성자로서는 다시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 예정이었거든.”
본인 입으로 말했던 것처럼 팔 다리를 잘라도 좋다고 했으니 그대로 각성자 인생 종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누구한텐 다행이게도 저 놈이 마법사가 아니라 머리까지 자를 필요는 없었으니까.
승지가 무덤덤하게 류의건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보증하면 남은 팔다리는 안 자를게.”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류의건이 즉답했다.
정말이지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는 호구 같은 놈이다.
승지는 천천히 눈을 내렸다.
“들었지? 네가 허튼 짓하면 대신 류의건 팔 다리가 날아갈 거다. 사람 살리겠다고 나까지 살해했는데 설마 랭킹 2위의 힘을 날려버릴 생각은 없겠지?”
자기 수족을 자른다는 얘기에도 류의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유청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좋아. 넌 이제부터 내 머슴이다.”
원래는 노예라고 할 예정이었지만 여전히 민속촌 형틀에 묶여있는 걸 보니 머슴이 좀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제 풀어주십시오.”
“뭐, 저절로 풀릴 거야. 그런 스킬이거든.”
장면 하나가 끝났으니 소도구가 사라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십자 형틀과 곤장이 남아있었다.
“어이, 성좌. 장면 끝났어.”
[아직이야! 도구를 사용하는 장면은 안 나왔잖아!]
“그냥 스킬을 끝내면 되지 굳이 곤장을 때려야 해?”
승지의 말을 듣고 있던 최자림이 천연덕스럽게 곤장을 집어 들었다.
“곤장 한 대요!”
철썩~!
정말 최자림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른 팔이 잘려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의 엉덩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곤장으로 때리다니.
게다가 저렇게 경쾌하게 할 일인가.
아무튼 최자림이 유청의 곤장을 때리자 그를 구속하고 있던 형틀이 사라졌다.
쓸모를 다한 여덟별도 해제하자 드디어 풀려난 유청이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최자림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를 부축했다.
“고생 많았네요!”
“…….”
유청은 피가 흐르는 팔을 반대쪽 손으로 움켜쥐기만 했다. 그제야 류의건이 다가가 포션을 부어주었다.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습니다.”
“…….”
“어이 머슴~! 뭐하냐, 일어나!”
유청이 자존심을 상해하든 말든 승지가 다그쳤다.
정말 고분고분 해졌나 시험해보는 명령이었는데 유청은 어금니를 박살낼 기세로 이를 갈면서도 결국 일어났다.
오, 말 잘 듣네. 하긴 그래야지.
[짜라란~! 승지가 머슴 1호를 획득했다!]
성좌까지 가볍게 축포를 빵 터트렸다.
[죽이지 못한 건 아쉽지만 평~생 노예로 사는 거라면 감히 승지를 죽인 걸 봐줄 수 있어!]
“오냐, 그래.”
승지는 씩씩한 성좌의 대화창을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으으… 다들 어떻게 된 건가요?”
일이 다 끝나고서야 정신을 수습한 명구가 눈을 깜박였다.
“헉! 유청 각성자님 팔이!”
“저런, 명구야. 중요한 장면을 다 놓쳤구나. 다시보기도 안 되는데 어떡하지?”
최자림이 키득거리며 놀리자 유청은 참 할 말이 많은 얼굴로 눈만 굴렸다.
“…이제 어떡할 생각입니까.”
“어허, 어디 머슴이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리지?”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유청이 빠득빠득 철근을 씹는 심정으로 한 마디씩 내뱉었다.
“싸가지는 없지만 허락하마.”
“이 다음 계획은 있습니까?”
없다.
승지는 여전히 고압적인 표정을 유지하며 생각하는 척 했다. 물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유청의 눈이 다시 가늘어지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류의건이 구원투수로 나서주었다.
“안 그래도 저희가 글라세로 문제 때문에 승지 씨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럼 자리를 옮겨서 얘기 할까요!”
최자림의 말에 동의한 류의건이 전화 몇 통을 걸었다. 하나는 망가진 공사장 복구 문제로, 다른 하나는 차를 한 대 보내달라는 얘기였다.
그 결과가 리무진이 될 줄은 몰랐지만.
“우와우!”
공사장과 어울리지 않는 미끈한 차가 멈춰 서자 최자림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아 지금 저 설레도 되는 부분입니까?”
“왜 최자림 각성자님이 설레요!? 꿈도 꾸지 마세요!”
“…큰 차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이럴 줄은 몰랐네요.”
류의건이 어울리지 않게 민망해했다.
“다들 저희 집으로 가서 얘기할까요. 안전은 보장할 수 있습니다.”
“알겠다. 어이, 머슴! 문 열어!”
“…….”
유청은 당장이라도 네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하고 성질을 내고 싶은 표정이었다. 심지어 손이 없는 쪽은 자신이건만.
승지가 쿡쿡 손가락으로 류의건의 팔다리를 가리키자 결국 유청이 인내심을 발휘하며 뒷문을 열었다.
각성자들을 태운 리무진은 조용히 도시 중심부를 빠져나갔다.
그동안 승지는 차 안에서 호기심어린 시선들을 견뎌야 했다.
“그만 쳐다봐.”
“신기하잖아요. 살아만 있어도 놀라운데 이렇게까지 멀쩡할 줄이야. 어디 못 쓰게 된 관절도 없어요?”
“없어.”
“성좌가 어떻게 승지 씨를 살린 거예요?”
“저 놈 앞에선 말 못하지.”
승지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조용히 있던 유청이 시선을 내렸다.
일단 상황이 진정되고 나니 더는 싸울 수 없게 된 상황이 비로소 실감이 나는 모양이었다.
사라진 팔을 잡고 있던 유청의 표정이 계속 어두워졌다.
류의건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유청 씨의 팔은 이대로 아물었지만, 회복시킬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글라세로를 생각하면 싸울 각성자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부족하면 내가 채우면 되지?”
승지가 가볍게 받아 넘겼다.
만약에 글라세로를 잡을 때 아이쿠 유청이 없어서 못 잡아버렸네? 하는 상황이 온다고?
웃기고 있네.
“쪽수로 될 거 같았으면 분신술 스킬이라도 얻어두라고 그래.”
그러자 류의건도 더는 말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