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Clap your hands (1)
유월의 말에 이제는 이쪽이 당황해서 마구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언제 만났는데?”
“1년 전에, 던전에서.”
“어떻게 만났습니까!?”
“사냥하다가 욱하는 고질병이 또 발동해서, 쫓아가다가 함정에 빠졌어요.”
“만났는데 안 죽였습니까?”
“괜찮던데요.”
유월이 고개를 기울이며 회상했다.
“클랩은 마왕 중에서 가장 인간에 가깝게 생겼으니까요. 딱히 먼저 공격하지도 않았고 대화했더니 잘 보내줬습니다.”
[허엉! 맙소사! 신기하네!]
나도. 정말 대화가 통하는 마왕이 있는 거냐?
글라세로 같은 찐득이를 생각하고 있던 승지가 약간 개념을 수정했다. 인간에 가깝게 생기면 말이 통하는 건가.
염소 대가리… 는 마왕이 아니었으니 빼야겠지.
유월은 딱히 말을 유창하게 하는 성격도 아니라 더욱 믿음이 갔다.
류의건이 조심스레 말했다.
“정말… 안전을 담보받을 수만 있다면 접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그런데 클랩이 공격적이진 않지만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착해 보이진 않던데요.”
유월이 소파를 짚으며 말했다.
[아냐! 승지한테 서큐버스를 보내서 먼저 접촉할 정도면 우리한테도 패가 있는 거잖아? 꺄앙! 마왕들이 승지한테 보내는 관심이 너무 뜨거워!]
“일단은 가보자고. 여차할 때 위험하면 고리로 열고 튈 수 있으니까.”
“그렇긴 하지만….”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클랩 마왕을 본 적이 있으니까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유월이 파티 가입을 요청했다. 승지는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길드장님은 언제든 환영이죠.”
승지의 말을 들은 유청은 토하고 싶은지 소파 뒤로 머리를 숙였다. 승지가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넌 남아서 저거나 관리해라.”
“저거라니! 폐하라고 못할까!”
거스 놈이 반발했지만 이미 그를 지칭하는 대명사는 저거로 굳어진 상태였다.
실컷 소리없는 욕을 하던 유청도 헉하고 머리를 들었다.
“저걸 무슨 수로 데리고 있습니까? 말도 안 통하는데…!”
“잘됐네. 네가 가르쳐라. 우리 갔다 오는 동안 한글은 떼게 만들어놓을 수 있지?”
승지가 얄밉게 이죽거렸다. 머슴 처지에 주인 말 안 따르면 어쩔 거냐.
“빌어먹을…….”
이미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지만 막상 거스와 함께 남을 생각을 하니 아찔해진 유청이었다.
* * *
[그럼 승지의 이번 조합은! 청 코너~~! 류의건! ◝(・ω・)◟홍 코너~~! 유월! 되시겠습니다!]
출발하기 전에 들뜬 성좌가 요란하게 대화창을 돌렸다.
“싸우는 거 아니거든.”
[알아! 그치만 승지가 딱 중간이니까! 심판이야 심판!]
심판자는 저놈이고.
승지가 문득 류의건을 보고 위기감을 느꼈다. 가만, 생각해보니 유월이 같이 가는 건 좋은데 류의건을 데려가는 건 실수 아니냐?
돈 많고, 잘생기고, 성격 좋고, 본인 입으로 인기 많다고 인정한 놈이잖아?
승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유월은 딱히 류의건한테 호감이 있어 보이진 않았지만 사람 일 모르는 거 아닌가.
이제 와서 유월과 단둘이 가자고 하는 건 완전 이상해 보일 테고. 마왕을 만날 땐 류의건의 신성스킬이 있어야 하니.
서큐버스고 뭐고 그냥 혼자 후딱 다녀올 걸 그랬나.
“승지 씨.”
그 때 승지의 시선을 느낀 유월이 다가왔다. 바로 표정관리를 하려던 승지는 유월이 귓가에 손을 올리자 바로 긴장해버렸다.
유월이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의건 씨는 내버려 두고 바로 우리 둘이 도망치죠.”
“……예?”
“의건 씨는 미끼로 써버리고 승지 씨가 빨리 문을 열어야 하니까요. 의건 씨야 남겨둬도 알아서 도망 올 사람이니 바로 튀겠습니다. 괜찮죠?”
“그, 그럼요.”
승지가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예쓰! 좋아! 저건 진짜 류의건한테 아무 사심도 없는 거다!
나한테도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긴 한데. 괜찮아! 난 천천히 꼬시면 돼! 귓속말하는 거 귀엽다!
아직 둘 사이에 제대로 시작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승지는 혼자 남대문 재건축 벽돌부터 다시 쌓을 기세로 호감도를 적립했다.
[인간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성좌가 진지하게 고찰했다.
[썸 타다가 혼자 앞서나가면 망하는 지름길이라던데. 아, 하긴 승지는 아직 썸도 못 탔으니까 해당사항 없겠다. 그치? ^^]
응 고맙다. 식었다 지금. 마음이 아주 차갑게 냉정해지는구나.
승지가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게 잇새로 중얼거렸다.
“자식아, 내가 뭘 하든 응원한다며.”
[응! 물론 응원하지! 근데 연애는 아무리 응원해도 안 될 거 같아!]
성좌가 해맑게 엿을 먹였다.
[우리 승지는 그냥 강해지기만 해야할 듯! 연애 안 돼요~ 못해요~!]
꾸지직.
다행히 승지가 또다시 때릴 수 없는 대화창에다 주먹을 날리기 전에 큐라가 나타났다.
“안녕 자기들? 어머나?”
큐라가 새로 나타난 유월의 얼굴을 핥듯이 눈으로 훑었다.
“사람이 바뀌었네?”
“상관없지?”
승지가 배짱을 부렸다.
“네가 말했던 대로 따라가긴 할 텐데 맨 손으로 갈 순 없잖냐.”
“아하. 무기 대신 각성자를 챙겨보시겠다? 후훗. 귀엽네?”
큐라가 양 손으로 턱을 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아무리 강한 각성자를 데려와도 우리 마왕님을 죽이는 건 포기하는 게 좋아! 글라세로 마왕님과는 차원이 다를걸?”
“너나 우리 죽이지 마라.”
승지가 툭하고 대답하자 큐라가 깔깔거리더니 양 손을 내밀었다.
“자! 내 손을 잡아!”
생긴 건 사악한 마굴로 끌어들이는 마귀 같은 모습을 하고선 정말 어울리지 않는 대사로구만.
아름다운 얼굴 밑으로 쭉 뻗은 긴 손톱을 본 승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큐라가 거미줄을 당기듯이 손목을 감았다.
“나머지는 알아서 붙잡던가 해?”
류의건과 유월이 재빨리 승지의 팔을 각각 팔짱을 꼈다. 그러자 승지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큐라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구멍이 열렸다.
던전과 다르게 열린 차원의 통로는 불길한 색으로 번뜩이며 그들을 빨아들였다.
[꺄아아아!]
절벽 위에서 부는 바람이 낚아채듯 그들의 몸이 휙 딸려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딱 한 번 깜박 감았다 뜨자 그곳은 마왕의 고성이었다.
까악! 까악!
성벽에 올라앉은 검은 까마귀들이 낯선 방문자를 보고 시끄럽게 울어댔다. 승지가 눈동자를 올렸다.
뾰족하게 찌르는 첨탑, 우중충한 하늘, 거대한 철문과 음산한 정원까지. 그야말로 정석적인 마왕성이다.
너무 전통이라 오히려 신선하구만.
“마음에 들어?”
큐라가 씩 웃자 승지가 손목을 털어 큐라를 떼어냈다.
“들겠냐.”
큐라가 키득이며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럼 들어갈까? 마왕성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끼이익. 누구도 손대지 않았는데 저절로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꼭 귀신의 집 같군요.”
“놀이공원에서 가 봤죠.”
승지의 양 쪽에서 팔을 푼 류의건과 유월이 한 마디씩 했다.
놀이공원이라. 알바하기 정말 힘들었던 곳이군. 외향형 인간이 아니면 접근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밥은 맛있었지만.
짧게 감상을 마친 세 사람이 마왕성으로 들어갔다.
“ㅁㅁㅁ…! ㅁ!”
입구에 들어가자 머리가 하얗고 이목구비가 없는 인간이 정장을 입은 채로 나타났다.
흠칫 놀라는 사람과 달리 큐라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마왕님께 기다리던 손님이 왔다고 전해.”
“ㅁㅁ…? ㅁ?”
“아냐~ 털을 벗길 필요는 없어~. 손님이라니깐.”
“방금 불길한 소리를 들었는데.”
“걱정 말고 들어와, 자기.”
실오라기 하나 없는 새하얀 인간 괴물이 자꾸 기웃거렸다. 털을 뽑고 싶은 모양이다.
승지 일행이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안쪽으로 드러난 홀은 용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컸고, 층마다 트인 난간을 통해 복도가 언뜻 보였다.
오페라 하우스처럼 층이 지고 아름다운 천장은 계속해서 날아다니는 마왕의 부하들로 몇 번씩 가려졌다.
클랩의 부하는 대부분 인간 형태였다. 크기가 다르거나 날개가 달리거나 하는 차이만 있을 뿐, 흉물 대 잔치였던 글라세로의 부하들과 극단적으로 차이가 났다.
역시 부하는 대장 따라가는 건가.
붉은 카펫이 깔린 길을 따라가던 승지 일행은 긴 복도가 있는 알현실에 도착했다. 승지는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멀리, 조그맣게 있어서 보이지 않던 클랩 마왕을 드디어 만나는 순간이었다.
큐라가 가볍게 절을 했다.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마왕님.”
“가까이 와.”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답했다.
클랩 마왕은 왕좌에 푹 파묻혀있었다. 파묻혔다는 표현이 너무 적절한 게, 그는 본인 몸집보다도 큰 거대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엔 큼지막한 리본이 달려있었고 온통 레이스와 주름으로 가득한 치마가 의자에 구겨지듯 펼쳐져 있었다.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인 클랩 마왕은 새까만 피부에 흰 머리를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완전히 어린애잖아?
[꺄아아!! ٩(๑>∀<๑)۶ 세상에! 꺄아아! 너~~무 귀엽다! 내 취향이야!]
성좌가 너무 좋아하며 대화창으로 날아다녔다.
클랩을 본 큐라가 가볍게 날아가더니 마왕의 팔걸이에 앉았다. 그리고는 작은 소리로 소곤거렸다. 아마 지금까지 있던 일을 전달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 성에 들어왔어?”
비로소 이야기를 다 들은 클랩이 조그마한 입술을 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과 달리 지독하게 냉정한 눈동자가 무미건조하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난 죽은 글라세로를 받아갈 생각이었어. 내 영토가 너무 좁아져서 새로운 던전이 필요했거든.”
클랩이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너한테 글라세로가 없으니까, 대신 다른 걸 받아갈래.”
“뭐, 목숨? 이런 거 달라고?”
“아니.”
짜악. 클랩이 작은 손으로 박수를 치자 성이 쩌렁 울렸다.
“시간이면 충분해.”
그그그극. 그들이 서있던 알현실 바닥 위로 체스 판이 떠올랐다.
“나랑 놀아주면 부탁을 들어줄게.”
갑자기 발밑에 흑백 발판이 생긴 승지 일행이 난감하게 둘러보았다.
“체스라니….”
“명절 때 방송하는 영화에서 이런 거 본 적 있어요. 실제로 겪게 될 줄은 몰랐네요.”
유월이 발끝으로 툭툭 바닥을 쳐보았다. 승지의 미간이 구겨졌다. 갑자기 게임이라니. 게다가 뜬금없이 웬 체스?
“난 체스 할 줄 몰라.”
“몰라도 상관없어. 너흰 셋이니까.”
클랩이 다시 박수를 치자 갑자기 허공에서 흰 왕관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하게 서있는 승지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웃.”
“넌 킹.”
류의건에게 왕관이 걸쳐졌다.
“넌 퀸.”
유월에게 보석이 박힌 왕관이 씌워졌다.
“그리고 네가 조커야.”
흰 광대 모자가 승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젠장, 여기서까지 광대 짓이냐.
승지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모자를 들어 올리자 거만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는 클랩이 보였다.
“규칙은 간단해. 퀸을 잡거나 퀸이 아닌 두 사람을 모두 잡으면 승리야.”
“잡는다는 건….”
“내가 정한 상대랑 싸워서 이기면 돼. 간단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