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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우리 고기 먹는 사이잖아요. (1)

후두둑. 후두둑.

붉은 우박이 쏟아져 내렸다.

“윽!”

승지가 비 맞은 개처럼 마구 몸을 털었다. 잘게 조각난 살점이 이리저리 튀어나갔다.

“죽을 때는 좀 깔끔하게 가지.”

끝까지 지저분한 놈이다. 승지가 머리카락을 탈탈 털어 남은 조각까지 떨어트렸다.

[고생했어, 승지야! 마왕이 되려던 나쁜 마녀를 무찌른 거야!]

“다음부턴 조심해라, 너. 던전에서는 성좌라도 보이잖아. 저건 멍청해서 괜찮았지만 또 저주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헤헷! 주의할게!]

쿠르릉!

폭발의 여파를 받은 벽과 천장이 흔들렸다.

[무너진다! 곧 던전 클리어가 될 거야! 머리 조심!]

“잠깐. 아무것도 안 가져갈 순 없지.”

승지는 사방에 널브러진 무기와 살점을 둘러보았다. 어쨌든 여기도 던전이라면 성좌신이 보상을 놔뒀을 것이다.

휘적휘적 걸어간 승지가 날아간 노파의 얼굴 가죽을 찾아냈다. 그가 발끝으로 툭 뒤집자 그 밑에서 결석처럼 생긴 주먹만한 돌이 나왔다.

저거려나.

아이템을 주워서 제대로 확인할 시간은 없었다. 균열이 간 천장에서 승지보다 거대한 돌이 떨어지고 있던 것이다.

인벤토리로 돌을 차 넣자마자 주변이 확 빨려들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던전이 클리어 되고, 승지는 쿵 소리를 들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꺅! 무사 귀환 축하해!]

승지는 열쇠부터 확인했다. 체르마에게서 받았던 열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 보면 확실히 클리어가 된 모양이다.

그럼 이제 다시 그 별로 돌아갈 수 없는 건가.

클리어는 좋았지만 열쇠가 사라지는 점은 별로였다. 당장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없는 게 다행이다.

그런데 폭발한 마녀가 했던 말이 은근히 신경 쓰인단 말이지.

모든 마왕을 박멸하지 못하면 정말 이세계를 복구하는 방법은 시간을 돌려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나?

갑자기 세계의 운명이 성큼 다가왔다.

개 부담스럽네.

승지는 바로 머리를 휘저었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무슨 설레발이냐. 신경 끄자. 각성자가 저래 많은데 다른 놈이 시간 능력 하나쯤은 각성해주겠지.

지금은 착실히 마왕 대가리나 터트리며 지내는 게 속 편했다.

우우웅.

그 때 현실로 돌아온 승지의 인벤토리에서 작은 진동이 울렸다. 성좌가 승지의 스마트폰을 느끼고는 재빨리 열어준 것이다.

[승지양~! (งಠل͜ಠ)ง 문자 왔어용~!]

“얌마, 징그럽다.”

어디서 저런 흉측한 이모티콘을.

승지가 질색하며 화면을 켰다. 문자 내용은 단순했다.

[ 승지 씨. 오늘 저녁 어때요? ]

“…씨바!”

던전이 무너질 때 보다 화들짝 놀란 승지가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오잉? 왜 그래?]

성좌가 빼꼼 대화창을 들이밀었다. 입을 딱 벌린 승지가 멍청하니 화면을 바라보느라 훔쳐보기가 쉬웠다.

그리고 성좌도 바로 승지의 경악에 동참했다.

[헉! 유월이잖아!]

[같이 밥 먹기로 했었잖아!]

[꺄아아악!! 데이트 약속이다!!!!]

데, 뭐?

승지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스물두 살 평생 동안 인연이 없던 단어가 갑자기 어퍼컷을 치며 들어왔다.

세계의 운명은 침착하게 설레발로 치부했던 승지가 이 순간 김칫국을 양동이로 들이마셨다.

물론 성좌도 그 김칫국에 건더기를 푸짐하게 얹어주었다.

[데이트야 데이트! 꺄악! 그것도 오늘 밤! 당장 때 빼고 광내고 준비하자! 이건 승지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이 자식이?

은근히 멕이는 성좌를 승지가 무시했다. 바로 답장을 하려던 승지는 송신 시간을 보고 멈칫했다.

[ 시간 괜찮으면 7시까지 청월량 길드 앞에서 봐요. 못 오면 다음으로 미루죠. ]

“지금 몇 시야!”

[침착해 승지야. 승지가 들고 있는 게 시계잖아.]

물론 성좌의 말은 그대로 승지의 귀를 뚫고 흘러갔다.

이미 시간은 6시 50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씨, 바로 던전 가지 말 걸!

승지가 후회했다. 설마 유월이 이렇게 빨리 밥 먹자고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길드장이라 밀린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승지는 알바에 지각했을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타자를 갈겼다.

[ 30분, 아니 10분만 기다리면 가겠습니다. ]

그대로 메시지를 보내며 현관을 나가려던 승지의 앞으로 성좌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미쳤어! 그 꼴로 가게!?]

“늦는 것보단 낫잖아.”

[방금 뭐 잡았는지 까먹은 거 아니지? 냄새부터 기억해내!]

코를 킁킁거린 승지는 역한 시체 썩는 냄새와 비린내가 뒤섞인 혼종을 맡아버렸다.

“크아악! 젠장!”

스마트폰을 내팽개친 승지가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성좌는 쑥스러운 척 욕실까진 따라가지 않았지만 승지가 초고속으로 샤워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냉큼 따라 붙었다.

[자자 빨리 움직여!]

[내가 머리 말려줄게!]

성좌가 승지의 머리를 반쯤 삼킨 다음 물기를 빨아들였다.

저거 믿어도 되겠지.

승지가 불안하게 성좌를 흘긋 보고는 욕실 서랍을 뒤졌다. 여기 살던 길드장 놈이 분명히 왁스를 썼었는데. 안 놓고 갔나?

승지의 목표를 발견한 성좌가 뜯어말렸다.

[히익 왁스 쓰려고!? 절대 하지 마! 그것도 평소에 하던 사람이나 쓰는 거지!]

[8대 2 가르마 만들려고 그래!]

“미친, 그럴 리가 있겠냐!”

[어차피 시간도 없잖아! 옷부터 입어!]

성좌가 인벤토리에서 옷을 꺼내 퉷퉷 뱉어냈다. 성좌의 코디라는 게 매우 불안했지만 승지는 급하게 바지에 다리를 꿰어 넣었다.

“악, 윽! 젠장할!”

서두르다가 한 발만 바지에 넣고 뜀박질을 하던 승지가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괜찮아? 다행이다! 벽 안 부서졌어!]

“…….”

점점 험상궂어지는 인상과는 별개로 그럭저럭 사람 꼴을 갖춘 승지가 드디어 집밖으로 뛰어나갔다.

[꺄아! 출발이야 출발! 유월이 기다리고 있어! (>///<)!!]

시간은 이미 7시 12분을 가리켰다.

택시 타면 늦는다!

1층이 아니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간 승지가 프레임 컨트롤까지 써가며 건물 지붕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담했던 시간의 딱 중간인 7시 15분이 되자 유월이 고개를 들었다.

청월량 길드 앞에서 승지를 기다리던 그가 위쪽에서 인기척을 느꼈던 것이다.

유월이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사람 그림자 하나가 추락하듯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쿠웅!

지면을 울리는 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 투신자라도 나타난 건가 싶었던 것이다.

유월도 다소 눈이 커져 있었다. 하지만 그도 각성자답게 침착하게 위에서 떨어진 물체를 관찰했다.

“허억…!”

그림자의 정체는 물론 승지였다.

붉은 머리를 확인한 유월이 재밌다는 듯 작게 웃었다.

“하늘에서 떨어지셨네요.”

“……늦어서 미안합니다.”

승지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에겐 다행스럽게도 성좌가 급조한 차림새가 썩 나쁘진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뛰어오긴 했지만 성좌가 꺅꺅거리며 인벤토리로 머리를 보호한 덕분에 미친 바람 삽살개 꼴이 되는 건 막았으니까.

유월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식당에 들어가려면 8시부터니까. 거기까진 차타고 가죠.”

승지는 괜히 지금 쿵쾅거리는 심장이 뛰어온 탓인양 태연하게 유월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던전이었다.

유월과 차를 타고 갈 때만 해도 가슴이 술렁거리던 승지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한 무리의 각성자를 이해하지 못했다.

[?]

“?”

승지와 성좌가 동시에 선명한 물음표를 드러냈다.

“어이! 빨리빨리 와!”

“새치기 하면 가만 안 둡니다!”

시끌시끌하게 모인 사람들은 어느 모로 봐도 각성자였다. 여기저기서 인벤토리를 외치며 물건을 꺼냈다가 뺐던 것이다.

“자자, 던전 들어가서는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안 됩니다!”

“지시에 잘 따라주세요!”

[…지금 던전이라고 했지? 분명히 들었지!]

[유월이 같이 저녁 먹자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승지의 표정이 매우 볼만했는지 유월이 계속 승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뭐 불편한 거 있으세요?”

“…아니 불편하진 않지만.”

승지가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우리 저녁 먹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먹을 거예요.”

유월이 갸웃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줄을 선 각성자들 앞에서 던전 문이 열렸다.

초록색 잎사귀가 천장을 받치듯이 피어나고 빽빽한 나무줄기가 자라나는 던전이었다.

승지는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던전에서요?”

“네.”

유월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걸 말하듯 답했다.

“던전 식당에서요.”

[!]

그곳은 정말 식당이었다.

유월과 함께 차례를 기다려 들어간 던전 내부는 꽤 넓은 정글이었다.

던전 열쇠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먼저 던전에 들어와 주변을 스킬로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 중 한 명이 인벤토리를 열자 웬만한 식당 뺨치는 규모의 식탁과 의자가 열을 맞춰 튀어나왔다.

인벤토리에 넣을 때부터 각을 잡고 넣었는지 식탁보와 그 위에 놓인 식기까지 흔들리지 않고 가지런했다.

순식간에 야외 식당이 완성되었다.

“자자, 그럼 예약 순으로 들어오세요!”

“기다렸어~!”

“어서 가자구.”

사람들이 모두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제복을 갖춰 입은 각성자들이 마치 웨이터처럼 메뉴판을 나눠주었다.

“우리도 가요.”

승지는 얼떨떨하게 유월을 따라 들어갔다.

정말로 의자를 끌고 앉으니 마치 식물원 내부에 있는 식당에 앉은 것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흐와아! 신기하다~! 던전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신기한 건 승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최대한 두리번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꽤 인기가 좋아요. 랭킹 300위 안에 드는 사람이라면 일반인을 데려올 수도 있어서 예약 잡기 더 어려워졌죠.”

유월이 가볍게 메뉴판을 펼쳤다.

평범한 사람들의 동작과는 달리 식당 바깥쪽에서 슬슬 나타난 몬스터를 잡는지 사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도 무방비해 보이는 손님들의 모습에 승지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던전에 오래 머물면 그렇겠지만 식당이 열리는 시간은 딱 2시간이에요.”

그 정도면 던전 보스가 얼씬도 하기 전에 도망가기 충분했다.

승지는 조금 더 마음을 놓고 등을 기댔다.

“던전을 부동산으로 쓴다는 게 이런 거군요.”

“관광 상품도 있어요. 가격은 식당보다 훨씬 비싸지만.”

대체 얼마길래?

데이트 하러 와서 돈 얘기 하는 건 최악일 거 같아 승지는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지만.

유월은 궁금한 줄 알았는지 스마트폰을 돌려 보여주었다.

“가격은 이정도?”

[히익!!!]

성좌가 깜짝 놀라 괴성을 지를 만큼 높은 가격이었다.

75억을 벌었지만 아직 돈 쓰는 감각이 서민에 머물러있는 승지도 흠칫할 정도였다.

와, 미친놈들. 여행에 이만큼을 쓴다고?

“이거 아무나 절대 못 하겠는데요?”

“각성자면 할인 들어가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으니까. 안전 수당이 빠지죠.”

그래도 여전히 엄두가 나지 않는 가격이다.

각성하기 전부터 돈이 썩어 넘쳐나는 인간이 아니면 절대로 못 하겠는걸.

그런데도 던전 식당은 매우 북적거렸다. 그들에겐 이미 일상인 풍경이었던 것이다.

하긴 나도 저만큼은 벌었으니까 못 올 것도 없지.

잠깐 일한 승지도 실감할 만큼 각성자 들이 벌어들이는 돈은 상상초월의 규모였다.

그러니 남들과 돈 쓰는 단위가 좀 달라도 상관없는 건가.

[승지야! 딴 생각 그만! 지금은 데이트 중이라구!]

승지가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미친, 유월을 앞에 두고 내가 지금 무슨 짓을.

“마음에 들지 않나요?”

유월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승지 씨를 위해서 일부러 예약했는데.”

“물론 마음에 들죠.”

승지는 바로 태세 전환했다. 하, 귀엽잖아. 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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