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너른 들판으로 (1)
푹. 노동의 땀방울이 흐르는 건설적인 현장에 푸른 나뭇잎이 흩날렸다.
"길드장님! 또 나뭇가지를 건드리시면 어떡해요! 으아, 다 부러졌네!”
"아하, 이런! 미안하네!”
번태가 사과했다. 그는 약속대로 어둑시니 길드원들과 함께 정원에 나무를 옮겨 심고 있었다.
새하얀 땀수건까지 목에 두른 번태가 제법 농촌 활성화 공익 광고에 나올법한 장면으로 땀을 훔쳤다.
"간만에 자네들과 친목 활동을 하니 즐거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썬크림부터 바르세요. 뒷목 다 타요.”
“밀짚모자 쓰실래요?”
“길드장님!”
마지막 목소리는 제법 다급했다. 번태가 등을 돌리자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었다.
“무슨 일인가? 그렇게 다급하게.”
“이것 좀 꼭 보셔야겠습니다.”
“봐야할 건 메신저로 보내도 된다네!”
“그럴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뛰어온 거 아닙니까!”
홱 팔을 펼치는 동작을 본 번태가 허리를 숙였다. 길드연합에게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을 처리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길드원이 가져온 영상은 글라세로 토벌전 때 다각도로 찍어놓은 전투 영상이었다.
영상을 들여다보던 번태는 곧바로 익숙한 얼굴을 하나 잡아냈다.
“이거 글라세로 잡은 친구 아닌가? 생각보다 카메라를 잘 받는구만! 그런데 이 친구가 왜?”
“길드장님. 이 사람 우리 길드로 데려와야만 합니다. 반드시!”
그가 비장하게 손가락으로 화면에 나온 승지의 얼굴을 쿡쿡 찔렀다.
“이 자가 이세계 복구의 열쇠를 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요!”
* * *
“유-층.”
“유청.”
“배곱프다.”
“배고프다.”
유청의 말을 열심히 듣던 거스가 다시 고쳐 말했다.
“배고프다.”
“…잘했습니다.”
유청이 슥 접시를 밀어주자 거스가 허겁지겁 퍼먹었다.
“@#@^&$#!! #@$.”
“원래 말로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
“…그쪽도 내 말 못 알아듣겠지만.”
쿵. 유청이 식탁에 머리를 박았다.
시간이 이렇게 안가는 물건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채승지가 거스 대왕을 돌려보내겠다며 마왕에게 간지 벌써 사흘 째. 금방 갔다 올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있었다.
류의건의 집이라 나갈 필요도 없이 의식주가 해결되긴 했지만.
그동안 할 일이 없어서 진짜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말았잖은가!
유청은 답답함에 미칠 것 같았다. 이럴 시간에 던전이라도 하나 더 가고 미션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진짜 머슴처럼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다니.
아직 자신이 다시 싸울 수 있을지 확인해보지도 못해서 초조함은 더욱 커져만 갔다.
덜컹. 그 때 며칠 째 잠잠하던 문이 드디어 열렸다. 채승지 일행이 돌아온 것이다.
거스가 벌떡 일어났다.
“채승지! 게 새끼! 나뿐 놈!”
욕부터 가르쳐놓은 유청의 교육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정작 회심의 일격을 받은 건 엉뚱한 사람이었다.
“우리 없는 동안 뭘 가르쳐놓은 거야?”
유월이 의아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류의건이 머쓱한 표정으로 뒤따랐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나타난 사람은 빨간 대가리가 아니라 큐라였다.
그가 싱긋 웃었다.
“안녕?”
“왜 둘뿐이야?”
“어라, 난 보이지도 않는 거야?”
완벽하게 큐라를 무시한 유청이 따지듯이 물었다. 류의건은 난감하게 시선을 피했다.
“일이 좀 있었습니다.”
“무슨….”
삐리리리! 삐리리리!
일이 몰아닥칠 때는 한꺼번에 몰아닥친다더니. 사흘간 잠잠하던 벨까지 갑자기 울려댔다.
유월이 요란스러워진 현관을 쳐다보았다.
“그새 손님까지 불렀어?”
“내가? 그런 적 없는데…?”
“류의건 선생! 나일세!”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의문의 목소리는 바로 번태였다. 당황한 류의건이 되물었다.
“어둑시니 길드장님?”
“오! 안에 있으니 그냥 들어가겠네!”
콰르릉!
대답도 하기 전에 벼락이 꽝꽝 내려치며 번태가 나타났다.
계속 비어있던 집이 순식간에 사람으로 꽉 차 버렸다. 어이가 없어진 유청이 말을 안 하는 사이 번태가 주황색 반바지를 입은 종아리를 턱하니 의자에 올렸다.
“아하, 이거 또 뭔가 재밌는 일을 벌이고 있었구만! 사람이 많은걸!”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나마 집주인인 류의건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번태가 허리에 손을 짚고 둘러보았다.
“채승지 각성자 안에 있나? 여기 산다고 들었는데!”
“채승지 씨요?”
“왜 어둑시니 길드장님까지 그 인간을 찾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진 나머지 유청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채승지라니. 그 인간을 다들 왜 자꾸 찾는단 말인가.
번태가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아주 중대한 일이야! 각성자가 생겨난 이후로 언제나 중요하게 다뤄줘야 할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가 왔네!”
“어머나. 그런 얘기라면 나도 듣고 싶은 걸~?”
큐라까지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몬스터를 본 번태가 머리를 갸웃했다.
“자넨 어디 소속인가!”
“난 클랩 마왕님….”
“으악, 으악!”
마왕의 이름을 들은 거스까지 갑자기 비명을 질러대는 바람에 가뜩이나 시끄럽던 집이 완전히 개판이 됐다.
가뜩이나 홧병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던 유청이 예의고 뭐고 탁자를 쾅쾅 내리쳤다.
“다들 그만! 그마안!!”
놀란 사람들이 엉겁결에 집중했다. 분에 못 이겨 상체를 한 번 휘청거린 유청이 이를 빠득이며 물었다.
“지금 그래서 그 놈의 채승지 각성자가 뭘 하고 있다는 겁니까!”
* * *
마왕 클랩의 창고는 보물이 가득 차 있으리란 예상과 달리 지저분한 다락방에 가까웠다.
온갖 잡동사니가 제멋대로 쌓여있었는데, 값비싼 보석왕관이 먼지가 풀풀 날리는 책 위에 쌓여있는가 하면, 괴기스러운 청동 동상에 피 얼룩이 가득한 무기가 걸려있는 식이었다.
이래서야 어떤 게 좋은 물건인지 알 수가 없잖아. 진짜 아무거나 가져가라고 내기에 걸었구만.
승지 일행을 창고까지 안내한 쭈구렁 밤송이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편하게 둘러보시고 필요하면 불러주십시오.”
덜컹.
문이 닫히자마자 유월이 몸을 돌렸다. 어두운 창고에서 눈동자가 올빼미처럼 빛났다.
“아까 마왕과 있었던 일, 뭐였어요?”
[( ˃⍨˂̥̥ )]
성좌가 빠르게 대화창을 띄웠다. 다른 사람한텐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겠지.
“그냥 게임이었습니다.”
“두 번이나요?”
유월이 무심코 옆에 있던 기사 갑옷을 건드렸다가 박살내버렸다. 그가 머쓱하게 옆으로 비켰다.
“체스판도 부쉈잖아요. 그것도 이긴 다음에.”
[(୨୧ ˃⍨˂̥̥)]
저거 설마 손 모아 비는 거냐.
대강 둘러대려던 승지가 결국 진실을 털었다.
“기분이 나쁘잖습니까. 남의 기억을 갖고 노는 게.”
원래라면 여기서 끊었겠지만, 유월 앞이라 망할 놈의 혓바닥이 멋대로 더 움직여 버렸다.
“게다가 아무한테나 말하고 싶은 기억은 아니라서.”
“아아.”
유월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이겼으니까 좋은 거 하나씩 갖고 가죠.”
“…그렇게 하죠.”
승지가 괜히 앞에 있는 검에 관심이 있는 척 시선을 돌렸다.
원래라면 이때 바로 성좌가 이래서 유월이 눈치 채겠냐느니,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줄 수 있다는 얘기를 지금 대놓고 해야 하는 거라고 난리를 피웠을 거다.
…젠장. 별 소릴 다 들었더니 나도 완전히 성좌의 패턴에 익숙해져 버렸잖아.
승지가 여전히 말이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안 어울리게 왜 잠잠하냐?”
[。:゚(;´∩`;)゚:。]
“그냥 평소처럼 해. 뭐라고 안 할 테니까.”
[(☍﹏⁰)]
승지는 삐걱거리며 검을 빼보고는 한 쪽으로 던져 놨다. 그리고는 물건을 살펴보는 척 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사람에게서 떨어졌다.
다행히 두 사람 다 각자 물건을 고르느라 이쪽엔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좋아. 끝까지 대답 안하면 내가 먼저 묻는다. 너 뭐, 옛날에 마왕이었다거나 그런 거냐?”
[…아니야!]
“이제야 말하네.”
[……마왕은 아니지만, 내가 누군지 알면 승지가 날 싫어할까봐 겁나. 무서워.]
“어차피 지금도 썩 좋은 인상은 아니거든?”
[!!!!(*꒦ິ⌓꒦ີ)!!!!]
“아니, 그러진 마라. 네가 더 무섭다.”
괴랄한 이모티콘에 놀란 승지가 대화창을 손으로 치웠다.
[난… 여기가 아니면 좋아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마왕들도 나를 싫어해.]
성좌가 띠롱띠롱 힘없이 대화창을 띄웠다.
“네가 배신자라서?”
[배신자도 아냐!]
잠깐 열을 낸 성좌가 다시 시무룩해졌다.
[난 그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말을 끝으로 성좌가 다시 조용해졌다.
승지는 위로를 잘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이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찔찔거리며 막혀있는 꼴도 못 봤다.
“적어도 난 네가 웃기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한다.”
승지가 턱 끝을 긁적였다.
“뭐… 기운 내라고.”
[스, 승지야아아…! ( o̴̶̷̥᷅⌓o̴̶̷᷄ )]
왈칵 대화창이 쏟아졌다.
[사랑해!!♥♡♥♥♡!! 역시 나한텐 승지밖에 없어! 영원히 함께 하자!!♥♥♡♥♥♡]
[ 성좌 연결도가 올랐습니다! ]
기어이 고백까지 받아버렸군. 젠장.
난 왜 이렇게까지 인간이 아닌 것에만 인기가 많아지는 거 같지?
불길한 예감에 갑자기 등골이 섬뜩해졌다. 승지가 서둘러 유월에게 다가갔다.
아니다, 아니야. 난 사람이 좋아. 인간 여자가 좋다고.
예쁘고, 좋은 냄새가 나는….
“!”
자기도 모르게 유월의 냄새를 맡아버린 승지가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미친, 그래도 정신 줄은 잡고 있어야 될 거 아니냐!
이걸 들켰다간 가뜩이나 없는 호감도가 단숨에 내핵을 뚫을 게 분명했다.
후다닥 물러나던 승지의 뒤꿈치에서 무언가 빠그라지며 밟혔다.
딸칵.
“…딸칵?”
[딸칵?]
뭐지, 이 지뢰 밟는 소리는.
DMZ도 아닌데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지며 발밑으로 신경이 집중되었다.
고개를 내리자 목이 부러진 인형과 눈이 마주쳤다.
[ 튕겨내기 인형 : 자신을 건드린 사람을 절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먼 곳까지 날려버린다. ]
“아 염병.”
짤막한 욕설만을 남긴 그의 몸이 천장을 뚫고 튕겨 나갔다.
“승지 씨?”
콰앙!
대답 대신 지붕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벌써 지상과 작별을 끝낸 승지의 몸이 제대로 부딪쳐 통과했던 것이다.
유월은 당장 보고 있던 물건을 내팽개치고 따라 뛰어올랐다. 지붕이 부서지며 날린 돌먼지에 시야가 가려지긴 했지만 바람의 흐름으로 승지가 날아간 방향은 알 수 있었다.
최소한 마왕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주길 바랐는데, 바람의 포물선은 놀랍도록 수직의 형태를 그렸다.
목이 당기도록 고개를 치켜들던 유월이 신음했다.
“…이런.”
“무슨 일입니까!”
놀란 류의건이 따라 올라왔다. 그러나 이미 상황을 파악한 유월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늘보다 더 높은 곳에, 별이 흐르고 빛이 파도를 치는 곳에서 떠다니는 운반선들.
지상을 향해 하얗게 배를 보인 무수히 많은 비행선 사이로 승지의 그림자가 사라져버렸다.
유월이 손차양을 만들었다.
하필이면. 하나도 보기 힘든 비행선이 저렇게 여러 대일 때 마주치게 되다니.
시선의 방향을 따라간 류의건도 덩달아 사태를 파악하고야 말았다.
“…설마?”
“네. 아무래도 승지 씨가 별의 비행선에 타버린 것 같네요.”
유월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별과 별을 잇는 비행선에 탔다는 이야기는 곧 이세계 미아가 되었다는 뜻과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