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더 플래닛 오브 더 데드 (1)
지이잉.
성좌의 고향별로 가는 던전 문은 포탈처럼 부드럽게 열렸다.
승지는 집 계약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바로 던전으로 넘어왔던 것이다.
썩은 치즈 같은 열쇠를 돌려 나타난 문은 레이저처럼 지글거리는 빛으로 되어있더니, 승지가 통과하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여기가 바로.”
[내 고향…!]
승지는 기억 속에서 봤던 풍경과 지금 보이는 모습을 대조해 보았다.
“…제대로 온 거 맞아?”
[으음…….]
밤과 다를 게 없는 짙푸른 남색 하늘 밑으로 다 쓰러져가는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대부분 벽이 무너져있거나 그을린 자국이 있었고, 괴괴한 바람 소리가 말라붙은 풀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완전히 을씨년스러운 폐허였다.
[어라? 왜, 왜 이렇게까지 됐지?]
성좌는 당황을 멈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안 보여?]
“안 보이는데.”
승지가 저벅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어쨌든 여기도 던전이니까 뭐라도 곧 나타날 거 아냐?”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는 아직 사는 사람들도 있었는걸! 여긴 완전히 죽은 별 같잖아.]
성좌는 승지보다도 달라진 별의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다. 원래 자신이 살던 곳이니 변화가 더욱 낯선 모양이다.
“말하면서 확인해보자고. 여기선 마왕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잖아?”
[응. 정확히는 여기엔 웃음의 마왕의 제일 큰 숙주가 있으니까 우리가 말해도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숙주?”
단어만 들어도 벌써 불길했다.
숙주라면 벌레 같은 게 기생해서 사는 거 아냐. 피 빨리는 거.
[웃음의 마왕은 숙주와 감염자로 부하를 만들어. 마왕의 힘을 이어받은 사람은 숙주, 그리고 숙주에게 감염된 사람은 숙주에게 조종당하게 되지.]
성좌의 상태창이 나타나는 소리 말고는 주변에 가득 찬 정적은 더욱 분위기를 음울하게 만들었다.
“조종이라니 살벌하잖아.”
[승지도 봤다시피 감염의 첫 증상은 웃음이야. 상대방을 따라 웃게 만드는 건 지배의 첫 시작이니까.]
원치 않는데 깔깔거리던 인간들을 떠올리니 다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럼 내가 상대해야 할 것들도 그렇게 마왕에게 조종당하는 인간이라는 거냐?”
[아마도. 하지만 내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는 마녀와 체자라가 팽팽하게 싸우고 있던 상황이라서 아직 조종당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었어.]
“그 금테 안경 말이지.”
승지가 중얼거린 순간.
파스락!
수풀이 움직이며 검은 그림자가 하나 튀어나왔다.
“워어!”
[꺄아아악!!!! 좀비다!]
성좌가 비명을 지른 대로 상태가 많이 심각한 인간이 승지를 향해 손을 치켜들고 달려왔다.
뒤로 돌아간 한 쪽 눈, 썩어버린 뺨으로 보이는 이빨, 그리고 피 칠갑이 되어있는 내장까지!
“진짜 좀비잖아!”
“그으으어…!”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다가온 좀비가 신선한 승지의 살 냄새를 맡고는 입을 벌렸다.
승지는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주먹으로 머리를 날렸다.
콰앙!
연약해져있던 두개골이 그대로 박살났다.
[ 1콤보! ]
점토를 터트린 것처럼 산산이 부서진 좀비가 그대로 쓰러졌다.
[으아! 승지야 대단해!]
“아니 여기서 왜 좀비가 나와.”
승지가 꺼림칙하게 손을 털었다.
“웃음의 마왕이 죽은 사람까지 조종할 수 있는 거였냐?”
[아… 아니. 시체를 조종하는 건 원래 네크로멘서, 그러니까 다른 마왕의 힘을 쓰는 흑마술사들의 힘이야.]
“그 할머니가 각성이라도 했나? 새로운 직업이라도 얻은 모양인데?”
[으앙, 설마 그럴 리가?! 게다가 시간이 엄청 많이 지났는걸!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괴물이지!]
“괴물들 천지인 거 안 보이냐.”
원래는 성좌의 고향이었더라도 여긴 던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강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어어….”
“으워어….”
메아리처럼 정석적인 신음을 흘리며 좀비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 조져볼까.”
승지가 커다란 도끼를 꺼냈다. 이세계 여행 때 귀족에게서 뜯어낸 무기 중 하나였다.
[ 전장의 학살자 : 수많은 자의 목을 내리쳐 피로 젖은 칼날은 무디어 질대로 무디어졌다. 그러나 파괴력만큼은 원한을 쌓고 강해졌다!
공격력 + 120 ]
역시 좀비 사냥엔 도끼질이지!
승지가 좀비 무리로 뛰어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공격이 끊긴 다음 생길 페널티가 두려워 지금처럼 강한 무기를 들고 날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메모라이즈 스킬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 보니 더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았다.
투콰앙!
“끄어어…!”
[ 18콤보! ]
투웅!
“우어!”
[ 19콤보! ]
시원시원하게 좀비들의 머리를 찍고 빠져나온 도끼가 공기 중으로 검은 핏줄기를 뿜어냈다.
닥치는 대로 도끼를 휘두른 덕분에 벌써 주변에 있던 좀비가 듬성듬성해졌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콤보가 끊겼을 테지만, 승지는 빠르게 쓰러지는 좀비의 등뼈를 한 번 더 찍어 내렸다.
퍼억!
[ 20콤보! ]
“메모라이즈!”
[ 콤보형 스킬이 저장됩니다. ]
승지는 그대로 더 멀리 있는 좀비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메모라이즈 발동! 다운 어택!”
[ 저장된 콤보형 스킬이 사용 대기 상태로 전환됩니다. ]
공중에서 도끼를 휘두른 승지가 아래로 내리찍자 굉장한 파동이 터져 나왔다.
쿠과광!
뒤집히는 땅과 충격파에 얻어맞은 좀비들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팔 끝으로 전해지는 찌릿찌릿한 충격에 승지가 전율했다.
바로 이거야. 이 맛이지!
마음 내키는 대로 싸우다가 끝자리만 맞춰주면 얼마든지 멈춰서 숨 고르기를 할 수가 있었다.
심지어 그 과정을 거치면서 누적된 힘은 고스란히 다음 콤보 스킬로 발휘할 수 있다니.
처음 스킬을 받았을 때 가졌던 제약이 우스울 만큼 깔끔하게 사라져있었다.
남은 건 한껏 높이 상승한 스탯을 가지고 실컷 날뛰는 일 뿐이다.
찌르고, 베고, 찍고.
승지의 몸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어김없이 좀비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아무런 초식도, 무술도 배우지 않았지만 그것을 받쳐줄만한 스탯이 있었다.
휘두른 도끼를 회수하려고 하면 저절로 반응하는 민첩과 반동을 무시해버리는 힘.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달려드는 좀비 속에서도 정확하게 콤보 수를 읽고 메모라이즈 타이밍을 잡아주는 지능까지.
잡으면 잡을수록 더 신이 나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이거 완전히 상대도 안 되잖아!
시커멓게 밀려드는 놈들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인 승지는 지금까지 알아뒀던 온갖 콤보 스킬들을 다 써보며 실컷 사냥에 매진했다.
[꺄! 완전히 추풍낙엽! 승지 앞에선 아무리 무서운 괴물들도 그냥 풀이나 마찬가지야! 싹 쓸어버리고 있잖아!]
성좌까지 꺅꺅거렸다.
“야 근데 이 사람들 네 고향 사람들 아니냐?”
[난 모르는 얼굴들인 걸… 게다가 이미 죽은 사람이 억지로 움직이는 걸 보느니 차라리 승지가 없애주는 게 나아!]
확실히 어느 모로 봐도 그들의 몰골은 이미 저세상을 건넌 것도 모자라 입주권까지 받아 산 지 오래였다.
승지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때려 부쉈다.
[신성 마법이 있었다면 완전히 정화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럼 더는 저렇게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잖아.]
“혹시라도 부활하면 다시 박살내면 되지.”
찌익. 승지가 질척거리는 것들이 많이 얹힌 도끼날을 적당히 좀비의 옷에다 닦아냈다.
[아! 저기 성이 보여!]
언덕 너머로 얼핏 본 기억이 나는 성의 윤곽이 드러났다.
승지는 반경 15미터 안에 있는 놈들을 싹 정리하고는 언덕길을 올랐다.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 마저 해봐. 웃음의 마왕이 사람들을 감염시키고 뭘 어쨌다고?”
[웃음의 마왕에게 감염 됐을 때까지는 괜찮아. 하지만 제국으로 간 다나우는 바로 격리 당했어. 왜냐면… 숙주였으니까.]
성좌는 슬픈 기억이었는지 다소 우울하게 말했다.
[승지의 세계는 각성자가 나타나기 전엔 우리랑 완전히 교류가 없다고 했었지?]
“어.”
[하지만 각성한 이후로는 미션 때문에 괴물들이나 던전에 다닌 사람들이 많았지? 지금도 그렇고.]
“맞아.”
[사실 웃음의 마왕은… 숙주가 없어도 감염자끼리도 감염이 돼. 그러니까 승지의 세계도 이미 감염자가 많은 상태일 거야!]
바로 승지의 걸음이 멈췄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지금 그러니까 이세계 때문에 우리까지 완전히 마왕이니 뭐니 하는 거에 감염이 됐다는 거냐?
성좌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너무 놀라지는 마! 우리도 대부분은 그런 걸! 원래 막기 힘들어! 게다가 웃음의 마왕은 감염되기만 한 상태로는 안전해!]
“뭔 개풀 뜯어먹는 소리야. 아안전? 마왕이 개뿔이 안전해!?”
[으아아! 진짜야! 숙주 없는 감염은 그냥 웃는 방법일 뿐이야. 그래서 웃음의 마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라고!]
“하지만 그 다음 문제가 있겠지?”
[맞아, 하지만…! 멀쩡하던 감염자도 숙주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게 돼. 물론 숙주가 마왕의 힘을 많이 받은 상태여야겠지만….]
“하….”
어이가 너무 없어지면 헛웃음이 나오나보다.
이세계가 뭔가 문제가 있을 줄은 알았지. 복구가 쉬울 거란 기대도 안 했지만.
이건 또 무슨 역병이냐.
승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좋아. 웃음의 마왕은 어떻게 잡는데?”
[웃음의 마왕은 본체가 없어! 다만 어디선가 자꾸만 숙주가 생겨나는 독특한 마왕이야. 그래서 봉인하는 수밖에 없고.]
“뭐야. 그럼 계속 이대로 방치해왔다고? 이세계 놈들 돌았냐?”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거든! 최대한 빨리 숙주를 찾아내서 마왕의 힘을 빼내면 평범한 감염자로 돌아가.]
[원래 다나우가 받았던 치료도 그거였어. 그런데 다나우를 치료하던 마녀가 마왕의 힘을 정화해서 없애버리는 대신 자기 몸에 넣어서 문제가 생긴 거지.]
“그 결과가 이거냐.”
승지는 수백 명의 병사가 쓰러져있는 언덕을 참담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윤이 났을 갑옷은 붉은 녹이 슬어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 할 사람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성문에서 걸어 나온 무언가를 막듯이 둥글게 퍼져있는 병사의 무리들은 저마다 기괴한 자세로 고꾸라져 있었다.
[이상해, 정말 이상해.]
성좌가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저런 건 나도 처음 봐. 웃음의 마왕에겐 이런 힘까진 없는데….]
[내가 다른 곳에서 승지에게 웃음의 마왕 얘기를 못 해준 건 숙주가 없는 별에서 자꾸만 마왕의 얘기를 하다보면 저절로 숙주가 생겨나기 때문이야.]
[살아있는 사람이 승지뿐이라면 이렇게 마왕의 얘기를 하는 동안 승지가 숙주로 변해야 하는 데 전혀 그렇지가 않잖아!]
“네가 그런 것도 알아?”
[난 승지의 성좌인걸! 그쯤은 바로 알지!]
이 와중에도 성좌는 착실하게 자신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역시… 이 별엔 승지 말고 살아있는 사람이 있는 게 분명해.]
“흐음.”
성좌의 대화창이 제법 오싹하게 울렸다. 다 쓰러져가는 좀비 천지의 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라.
대체 몇 살이야?
승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이 별에 돌아온 다음에 내가 여기 온 게 얼마나 나중이냐?”
[응? 그, 글쎄? 정확히는 모르겠는걸?]
“대충만 말해봐.”
승지에게 나이를 알려주고 싶지 않아서 우물거리던 성좌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200년.]
“허.”
생각보다 제법 나이를 먹었잖아?
[그치만! 그치만 실제로 죽은 나이는 훨씬 젊으니까! 다시 성좌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이 200년이라는 거야!]
“예, 알겠습니다. 어르신.”
[씨잉! 안 돼! 귀여워 해줘!]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승지가 한 쪽으로 기울어져 낡아 빠진 성문을 슬쩍 곁눈질했다.
“지금 마침 중간 보스 정도가 등장해준 모양이다.”
지익. 터벅. 지익. 터벅.
더러운 흙바닥에 칼을 질질 끌며 나타난 좀비 하나가 승지를 향해 무거운 괴성을 흘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