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찍혔다 (4)
“랭, 랭커님들! 빨리 구해주세요! 저러다 정말 죽겠어요!”
“저런 잡몹 정도는 잡을 줄 알고 들어오신 거 아닌가요? 무기까지 빌려드렸는데요.”
“하지만…!”
“스킬 발동 조건으로 빈사상태에 빠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희 임의대로 나설 순 없어요.”
소리친 각성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스킬이란 게 내 것만 구릴 줄 알았더니.
다른 스킬들도 조건이 제법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진짜로 죽어가는 사람 같지만.
스킬을 위해 빈사 상태에 빠진다기엔 공포에 질린 표정이 너무 생생했다.
에이씨. 꿈자리 사납게.
승지가 슬쩍 날아다니는 날개에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몰래 프레임 컨트롤을 사용했다.
“끽!”
갑자기 느려진 날개의 움직임에 박쥐 몬스터가 눈에 띄게 둔해졌다.
저 정도면 알아서 잡겠지.
쐐애액!
“끼악!”
그 때 쏜살같이 날아간 암기가 몬스터를 꿰뚫었다.
암기에 맞은 몬스터는 사람을 떨어트린 건 물론, 그대로 벽에 꽂힌 채 즉사해버렸다.
최자림의 짓이었다.
뭐야, 몸 사리고 있길래 약한 줄 알았더니 꽤 세잖아?
“각성자님!”
그리고 부담스럽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뭐, 뭐요?”
“저 방금 다 봤습니다!”
보긴 뭘 봐.
최자림이 덥석 손을 붙잡았다.
“각성자님이야 말로 저희 길드에 딱 알맞은 인재 같네요!”
“나… 아닌데요.”
승지가 어설프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 최자림은 귓등으로도 알아 처먹질 않았다.
“촤하핫, 2차 각성자 중에선 마법사가 드물어서 감추시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니라고요.”
“예예, 일단 그런 걸로 해드릴게요.”
최자림이 눈까지 찡긋거렸다.
“지금 저희가 길드에 마법사가 꼭 필요해서요. 아시다시피 제대로 된 마법사는 어디든 꽉 잡고 절대로 안 빌려준단 말이죠!”
“아, 글쎄….”
“정체를 감추고 싶으셨으면 무기부터 감추셨어야죠?”
하, 씨. 맞다. 무기.
유치찬란하긴 했지만 리본 달린 마법 지팡이는 누가 봐도 법사처럼 보였다.
“마법사가 아닌데 누가 그런 약해빠진 무기를 고르겠어요?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나는 제정신인데 내 성좌가 문제지.
은근히 막말하는 최자림을 쳐다보니 그가 벙긋벙긋 웃었다.
“물론 지팡이로 때려잡는 건 조금 신선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어요. 던전을 공략하려면 너무 비실비실해서도 안 되거든요.”
[아닌데! 우리 승지 허약한데!]
넌 조용히 해.
상태창을 밀어낸 승지가 한숨을 쉬었다.
“미스핏 길드엔 관심 없습니다.”
“알아요. 청월량이 더 취향이시죠?”
최자림이 냉큼 말을 받았다.
“아까부터 청이 씨 쪽을 계속 구경하는 것도 다 봤답니다.”
그 말에 승지가 힐끗 유청을 곁눈질했다.
잠깐의 소란에도 유청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몬스터 사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한 번 불러내니까 끝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던 것이다.
절도 있는 유청의 움직임은 나중에 체력이나 민첩 스탯을 한참 더 올린다고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났다.
승지의 눈이 슬쩍 번뜩였다.
조종해보고 싶다.
그가 캐릭터였다면 어디까지 콤보를 넣고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직접 붙어보고 싶었다.
“거봐요. 흥미 있으시죠?”
“…뭐, 약간은.”
“안타깝지만 청월량 길드는 외부인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미스핏 길드와는 꾸준히 교류하는 사이기 때문에 원한다면 자리를 마련해드릴 수 있어요!”
최자림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그러나 승지에겐 효과가 없었다!
승지가 원하는 건 유청의 싸움 실력이지 팬미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건 별로 관심 없습니다.”
“으엥? 정말이요? 진짠데! 저희 친해요!”
최자림이 호들갑을 떨었다.
“청이 씨! 이리로 잠깐만 와보세요!”
몬스터를 잡던 유청이 잠깐 돌아보더니 반갑게 붕붕거리는 최자림을 무시했다.
“저 녀석이…! 아, 아니. 저희 진짜 친하거든요!”
“아, 예.”
승지가 슬슬 자리를 피했다. 최자림이 울상을 지었지만 더는 붙잡지 않았다.
[저 사람 재밌어 보이던데 가보지 그래?]
“너무 사람을 관찰해서 기분 나빠.”
게다가 수상하기도 했고.
“자아, 이 정도면 맛보기는 충분히 한 것 같네요!”
어느새 이동했는지 최자림이 던전 중앙에서 소리쳤다.
초보 각성자들이 대부분 몬스터를 한 번씩 잡아본 시점이었다.
“이 정도면 던전도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겁니다.”
던전이?
마지막 몬스터를 쳐낸 유청이 가볍게 양 손을 털었다.
쿠르릉!
[뭐야? 뭐야?]
기다렸다는 듯이 던전의 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유청이 몸을 돌렸다.
“간단한 미로 변형입니다. 방문자의 존재를 알아차린 던전은 여러 가지 함정을 준비합니다.”
“하, 함정이라고요!”
겁에 질린 목소리가 비명을 질렀다.
“걱정 마세요. 이 던전은 단순히 사람들을 흩어놓을 뿐이니까.”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최자림이 진정시켰다.
“다들 옆에 있는 분을 꼬옥 잡아주세요! 최대한 많이 붙을수록 안전하겠죠?”
최자림이 웃으며 뒤쪽에 있던 각성자와 팔짱을 끼자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순식간에 짝을 짓는 걸 본 승지만 어정쩡하게 몸을 폈다.
“잠깐만, 그럼 혼자인 사람은….”
쿠구궁!
승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던전 벽이 확 움츠러들었다.
“우왓!”
승지는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사람을 으깨버릴 줄 알았던 던전은 순식간에 다시 확장되며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까가 지상이었다면 지금은 지하였다. 넓은 공간에서 음산하게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젠장할.
[어떡해! 혼자 남겨져 버렸어!]
성좌가 호들갑을 떨었다.
승지는 상태창을 무시하고 뺨에 축축하게 닿는 공기를 문질렀다.
느낌이 안 좋은데.
동떨어져도 너무 동떨어진 곳으로 와버렸다.
게다가 바닥에 눌러붙은 행운 스탯이 또 한 번 큰일을 해주셨다.
“…저것들은 또 뭐야?”
동굴 바닥에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둥근 덩어리가 깔려있었다. 얄팍하게 덮인 피막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알이다!]
“윽.”
[뭐가 깨어날진 나도 모르겠어. 그치만 건들지 않는 게 좋겠는걸.]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다.
승지가 찝찝한 얼굴로 발꿈치를 들어올렸다.
“원래 던전에선 이렇게 이상한 것들만 나와?”
[우리 세계에서도 던전은 무언갈 보호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어. 정령이나 축복을 감춰둔 곳도 있었지만.]
성좌가 시무룩하게 말을 이었다.
[마왕이나 위험이 도사린 곳도 많았지. 이것들도 그 중 하나일지도 몰라.]
“뭐, 어쨌든 마지막 탐사만 끝나면 알아서 던전이 사라진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승지가 알을 터트리지 않도록 조심해서 움직였다.
[승지 넌 무섭지 않아?]
“그 길드에서 온 애들이 그랬잖아. 마지막 공략만 끝나면 던전이 알아서 사라지니까 쫄지 말라고.”
무사히 알을 가로지른 승지가 벽을 짚었다.
“쫄지 말라는 데 겁먹는 것도 웃기지.”
[그것보단 친절하게 말한 것 같지만… 어! 승지야!]
“왜? 뭐?”
[여기 벽 좀 봐봐! 글씨가 적혀있어! 손 좀 치워봐!]
승지가 손을 떼자 벽에 새겨진 문자가 보였다.
뭐라고 적힌 거야.
처음 보는 문자에 승지가 인상을 썼다. 그러나 성좌가 오히려 반갑다는 듯이 대화창을 띄웠다.
[여긴 지하왕 글라세로의 무덤이다. 잠든 자는 깨어나리니. 나의 권속들에겐 눈이 있다.]
“너 이게 읽어지냐?”
[이게 원래 우리말인걸!]
“아하.”
자동 번역이라니, 꽤 편리하다.
그 때 뜻밖의 알림창이 떴다.
띠링!
[ 성좌 연결도가 상승하였습니다. ]
“뭐야? 상태 창 열어봐.”
성좌가 상태 창을 열자 분명히 10퍼센트였던 성좌 연결도가 11퍼센트로 올라가 있었다.
“이게 갑자기 왜 올라가?”
[승지랑 나랑 통하는 게 많아질수록 올라가지!]
“헛소리 말고.”
[그리고 아마 이세계에 대해 아는 게 늘어날수록 연결도가 높아질 거야. 지식은 이해를 위한 기반이잖아?]
“…너 갑자기 똑똑한 척 말하니까 안 어울린다.”
[너무해! 나도 성좌라고! 방금 그 발언으로 연결도 1퍼센트 떨어질 뻔 했어!]
호감도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냐.
“아무튼 여기가 무덤이라 이거지.”
승지가 말을 돌렸다. 성좌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대답했다.
[응. 하지만 진짜 지하왕 글라세로의 시체는 여기 없을 거야. 그러기엔 너무 초라한걸.]
“그럼 자기 무덤이라는 소리는 뭐야?”
[왕들은 여기저기 가짜 무덤을 만들어두니까. 그래도 자기 시체를 도굴하러 온 사람이라면 가만둘 순 없다는 뜻이겠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승지가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바닥에 놓여있던 수백 개의 알에서 떠오른 새까만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으악, 시발, 으악!”
[히이익! 저게 뭐야! 너무 징그러워!]
수백 개의 눈동자가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광경은 호러나 마찬가지였다.
기겁한 승지가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 1콤보! ]
[ 2콤보! ]
[ 3콤보! ]
다행히 알은 퍽하고 터지기만 할 뿐, 다른 공격을 해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럼 뭐하냐고.
자신이 움직일 때마다 알 속에서 저 눈동자가 따라 움직이는데!
“악! 으악! 쳐다보지 마!”
[다 터트려버려 승지야! 꺄아악!]
옆에서 성님이 더 요란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나마 대화창이라 귀가 아프진 않았다.
[ 13콤보! ]
[ 14콤보! ]
승지가 지팡이를 퍽퍽 휘둘렀지만, 알의 개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한 번 터트려도 조금만 기다리면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알이 원상복구 되었다.
눈동자와 함께 말이다.
“야, 이것들 계속 되살아나잖아!”
[더 징그러워!]
“불이라도 지르면…!”
승지가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던전이 변형되었어도 분명히 어딘가에 다른 각성자들이 있을 텐데,
대체 어디쯤에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승지야! 콤보! 콤보 끊기면 안 돼!]
“아이 씨!”
승지가 그 와중에도 착실하게 알 하나를 터트렸다.
[ 32콤보! ]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아난 승지가 팔을 걷어붙였다.
“……차라리 튜토리얼 때처럼 다 때려 부수는 게 낫겠어.”
[뭐어? 아, 하긴 그러면 다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막노동도 99번이라는 한계가 있으면 할만하다.
승지가 전투적으로 알을 공격했다.
“유청이랑 최자림이라고 했나? 이딴 던전에 데려오다니 미친 거 아니야?”
[징그럽긴 하지만 딱히 우릴 공격하진 않았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나봐!]
“이걸 보고도 어떻게 공격을 안 해!”
파삭, 파삭.
깨졌다가 다시 생성될 때 눈동자가 먼저 올라오는 꼴을 보니 사흘 전에 먹었던 밥까지 올라올 지경이다.
[조금만 버텨, 승지야! 아까 마지막 과제만 하면 던전이 공략돼서 사라진다고 했으니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이쪽으로 오게 될 거야!]
자신이 봐도 이 알 덩어리들이 던전의 마지막 골칫거리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각성자들이 언제 도착하냐는 거다.
“…내가 이제 와서 멈추면 페널티 먹일 거지?”
[응. :(]
성님이 슬픈 이모티콘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