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도 아니면 개 (3)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건 승지뿐만이 아니었다.
멀리서 슬쩍슬쩍 보였다가 사라지는 초록색 헬멧도 각성자들에게 밀려서 쉽사리 올라가지 못했다.
“팀장 잡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유월, 유월이 너네 팀이지?”
뭘 알고 덤비나 했더니 딴에는 속셈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가 유월을 상대할 순 없지만…!”
“하지만 팀장이 떨어지면 뭐라도 좀 손해 보겠지!”
“쯧, 생각하는 거 하고는.”
너무 하찮은 이유에 코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나저나 어이없네. 내가 유월보다 약해보이나?
[승지가 누군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흥! 다 쓸어버리자! 우리 승지 완전 세다구!]
성좌가 앞장서서 공격을 부추겼다.
무심코 손을 휘적거리던 승지는 여전히 목에 감긴 오조희의 팔을 깨달았다.
“싸, 싸울 거예요?”
“붙잡을 수 있냐?”
“…어쩌면요!”
오조희가 빠르게 속삭였지만 썩 미덥진 않았다. 승지가 오조희의 종아리를 다잡았지만 종잇장처럼 가벼운 게 그냥 숨만 쉬어도 튕겨나갈 거 같다.
사람이 넷밖에 없는데 벌써 한 명을 떨구고 시작하긴 좀 그렇지.
“최대한 안 뛸 테니까 버텨봐.”
그냥 주먹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가려던 승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거기 밑에 싸우는 겁니까?”
류의건이었다. 팀원을 뽑아가려고 날아온 그를 본 각성자들이 순식간에 무기를 감췄다.
“그, 그럴 리가요?”
“저도 뽑아가 주십쇼, 팀장님!”
와, 이 자식들이.
바퀴벌레보다 더 빠르게 사사삭 움직이는 동작에 승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류의건은 엄숙한 심판처럼 그들을 내려다보다가 승지라면 괜찮겠지, 하고 생각한 듯 다시 팀원 하나를 뽑아 올라갔다.
누가 신의 심판자랑 계약한 게 아니랄까봐. 하는 짓이 똑 닮았네.
물론 류의건이 사라지자마자 다른 인간들은 바로 태도를 싹 갈아 끼웠다.
“보아하니 어쩌다 운 좋게 상위 랭커들이랑 친해진 놈인가 본데.”
“여기서 다 밑천 보여주게 해주지!”
“얼굴도 모르는 2차 각성자 놈이 감히 어딜!”
승지는 쏟아지는 험악한 분위기에도 태평했다.
“하. 내가 이렇게 무시 받고 산다, 성좌야.”
[٩(๑˃̵ᴗ˂̵)و본 때를 보여줘!]
“쳐!”
각성자들이 달려들었다.
승지는 제일 먼저 달려든 각성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붙잡았다.
“우풉?!”
“너네도 알겠지만.”
그의 손아귀가 점점 조여들며 두피를 누르자 각성자가 죽는 소리를 내질렀다.
“끄아악!”
“대한민국에선 선빵 친 놈이 죄다. 알았냐?”
승지가 휙 그를 옆으로 던져버렸다. 80kg은 나갈 법한 사람이 무게 없는 인형처럼 공중으로 날아갔다.
“으아아아악!”
비명이 가로지르며 통로 밑으로 사라졌다. 공격하려던 각성자들이 돌연 긴장했다.
“더, 던졌어?”
“저 미친놈이…! 각성자라도 던전에선 무사하지 못한데!”
“꼴에 던전이란 건 기억하고 있냐?”
승지가 이죽거렸다.
날아간 각성자는 곧 무간지옥처럼 어두운 암흑에 먹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비명까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게 승지가 들어도 제법 섬뜩했다.
그래봤자 어차피 떨어져도 안 죽는 거 알거든.
클랩 때처럼 바닥으로 떨어진 인간은 경기장 바깥에 튀어나올 테지만, 승지는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다.
다 죽여 버릴 거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게 훨씬 나으니까.
[그냥 진짜로 다 죽여 버려도 되는데! 사람 많아서 콤보는 잘 쌓일 거잖아!]
“보는 눈이 많아서 인심 좀 썼다.”
[꺅! 필살기를 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너그러워!]
승지는 무기를 꺼내지도 않고 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또 와 봐.”
“…!”
“쫄았냐?”
승지의 도발에 욱한 각성자가 떼로 달려들었다.
“이야아아!”
“건방진 새끼가!”
탁, 탁!
일부러 팔을 들어 한 대씩 맞아줬지만 간지럽기만 하다. 맞은 그대로 팔꿈치를 빠르게 꺾으니 휙하고 공격한 인간이 휘어졌다.
“어어!?”
부웅!
가볍게 밀쳤는데도 인간 하나가 그대로 날아갔다. 오조희를 업고 있었는데도 승지는 딱 손 하나만 사용해 그들을 양 옆으로 치워버렸다.
뺨을 호되게 갈겨버리면서 말이다.
쫘악!
[ 1콤보! ]
짝! 짝!
[ 2콤보! ]
[ 3콤보! ]
경쾌한 소리와 달리 날아가는 사람은 진짜였다. 당황해서 볼을 부여잡으려고 들면 이미 몸은 계단 밖을 날아가는 식이다.
이쯤 되니 각성자들도 당황해서 수군거렸다.
“뭐야, 2차 각성자라며?”
“누가 덤벼보라고 한 거야? 아까 뒤에서 공격하라던 거 누구냐고…!”
“제엔장! 헬멧이라도 좀 벗겨봐! 사실 랭커 아냐?”
“내 얼굴 보면 니들이 아냐?”
승지는 마주 대꾸하며 나머지도 족치려고 팔을 치켜들었다.
부우웅!
그 때 공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기계 하나가 승지 쪽으로 향해 내려왔다.
[승지야 저기! 드론, 드론!]
멀리서도 눈에 띄는 빨간 헬멧이 사람들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으니 카메라가 냉큼 침을 바르러 온 것이다.
아 씨, 뭘 또 촬영을 하고 그래.
마저 주먹질을 하려던 승지는 목에 감긴 오조희의 팔도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쳇.
승지는 험악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카메라가 니들 살린 줄 알아라. 다 꺼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뛰어올라오는 승지에게 결국 각성자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오조희를 생각해 전속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꽤 빠른 속도로 계단을 질주 할 수 있었다.
“이제 오십니까! 대장!”
올라가자마자 최자림이 인사를 던졌다. 유월은 빤히 승지를 바라보았다.
뭐지? 왜….
“!”
여전히 오조희를 업고 있다는 걸 깨달은 승지가 허둥지둥 오조희를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오호, 오호홍. (灬╹ω╹灬)]
성좌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 전에 승지가 먼저 선수를 쳤다.
“번태는 또 어디 갔어?”
팀원을 데리러 간 류의건은 빼더라도 노란 대가리가 안 보인다. 아직 어둑시니 길드원들은 남아있는데 말이다.
막 유월이 설명하려는 찰나 뒤에서 요란하게 쿵쾅거리는 녀석들이 올라왔다.
“헹, 고맙다, 레드!”
까만 헬멧과 복장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블랙이 얍삽하게 승지가 뚫어놓은 길에 바로 따라 붙었던 것이다. 게다가 행동이 민첩한 건 팀장만이 아니었는지 모 팀원들도 다 함께 올라왔다.
저 얍삽한 놈.
거기까지만 해도 그냥 넘어갔을 텐데 블랙은 승지와 같이 서있는 유월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엇! 유월 누님!”
[누, 누님?]
동생? 일리가 없다. 유량 말고 동생 없잖아?
승지의 눈이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블랙이 유월에게 친한 척을 해댔다.
“크아 누님도 여기 참가하는 거였습니까? 아! 제가 먼저 팀으로 영입할걸!”
엄청난 친한 척에도 유월은 모르는 눈치였다.
“누구라고요?”
“아 저 윤오입니다! 범윤오! 랭킹 8위요!”
딸칵. 헬멧에 달린 눈가리개까지 연 범윤오가 징그러운 눈웃음을 보냈다.
“크으 역시 언제 봐도 미인이십니다.”
“응, 거기까지.”
“뭐야?”
승지가 덥석 범윤오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냈다. 물론 바로 끌려오진 않았다. 발꿈치에 힘을 줘서 버틴 그가 당장에 눈초리가 험악해졌다.
“뭐야, 씨발?”
“아가리 영근 게 아주 보람차게도 자랐다, 새끼야. 남의 팀원한테 집적거리지 말고 꺼져.”
“댁이 유월 누님 팀 팀장이라고?”
썩 미덥지 않은 목소리였다. 애 새끼가 의심만 많아가지곤.
기억을 더듬던 범윤오가 뒤늦게 기억을 건진 모양이다.
“아, 그 비리비리하게 생긴 빨간 염색머리?”
“뒤지고 싶냐?”
당장에 승지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얕보이는 걸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니 당장 이 녀석의 정신머리를 고쳐놓을 작정이었으나.
그들을 둘러싼 카메라가 수십 대에 아직 게임 중이다.
“게임 안 해요?”
유월이 그를 상기시켜주듯 반복했다.
“아닙니다! 해야죠, 누님!”
어떻게 했는지 순식간에 승지 손에서 풀려난 범윤오가 폴짝 폴짝 뒤로 뛰어갔다.
동작이 날랜 게 무슨 청설모 같다.
“근데 어떻게 하는 건데요?”
“윷을 던져야지!”
최자림이 우렁차게 말했다. 저 짜증나는 녀석과 유월이 계속 말하느니 최자림이 끼어드는 게 백 번 나았다.
“지금 개 팀과 윷 팀은 벌써 윷을 던져서 나아가 있습니다!”
그가 손가락질하자 비로소 저 멀리 보이는 판에 사람이 하나씩 서 있는 게 보였다.
걸 자리에 번태, 개 자리에 모르는 인간이다.
“던지는 건 도착한 순서대로 한 차례씩입니다!”
“윷을 던진 만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조예요.”
“그럼 다른 팀이 던지기 전까진 못 움직인다는 건가요?”
승지의 팀원들이 차례로 주고받았다. 당연히 이런 게임을 좋아하는 최자림이 신나서 설명했다.
“바로 그렇죠! 아무나 윷을 던질 수 있지만 다른 팀이 다 한 번씩 던져야 나갈 수 있는 윷놀이로 인정이 된다 이겁니다!”
“그럼 말이 겹치면?”
윷에서는 말이 겹치면 잡아먹고 잡아먹은 쪽이 한 번 더 던질 수 있다.
윷놀이랑 규칙이 똑같다고 했으니 그냥 돌아오는 건지 탈락하는 건지 궁금했으나.
던전을 개조한 탓일까, 과연 발상이 살벌했다.
“싸워서 승부하는 겁니다! 이긴 사람은 윷을 한 번 더 던질 수 있지요!”
최자림의 말과 함께 멀리 걸 판에 나가있는 번태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다음 팀도 던지게!”
꽤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있는데도 고작 두 팀만 앞으로 나아가 있다니?
생각하자마자 이유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아하, 왜 지금 아무도 윷을 안 던지고 있는지 알겠다!]
“너 이 자식 혹시라도 던졌다가 걸 나와서 번태랑 붙을까봐 겁나서 안 던진 거지?”
“촤하핫! 무슨 그런 말씀을! 정답입니다!”
최자림이 호쾌하게 웃었다. 유월도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전략상 손해니까요.”
윷놀이는 단순히 운 게임이 아니라 나름대로 꽤 전략이 필요한 게임이었다.
대장이랍시고 덜렁 윷을 던져 나간 랭킹 1위 번태를 상대할 사람은 드물었으니까.
“그럼 저기 나간 다른 녀석은 어떻게 나간 겁니까?”
“류의건 씨 팀이에요. 걸이 나오면 류의건 씨가 가기로 하고 윷을 던졌는데 개가 나와서 팀원을 대신 보냈어요.”
“흐음.”
그리고 지금 다음에 던질 인간을 기다리느라 사람들이 올라와 놓고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뭐야, 다들 겁쟁이잖아?”
범윤오가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럼 네가 던질래?”
“헹, 내가 왜?”
혹시나 하고 떠본 말에 범윤오는 꿈짝도 하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원래 목청만 큰 놈들은 허세만 쩔고 실속이 없는 법이랬다. 승지가 헬멧 밖으로도 다 느껴질 만큼 큰 비웃음을 흘렸다.
“쫄보 자식.”
“뭐야!?”
“잘 봐라.”
승지는 거리낌 없이 윷으로 다가갔다. 평범한 윷이 아닌지 말판 중앙에 놓인 윷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공중에 떠있었다.
[꺅! 걸이 나오면 번태랑 붙고, 개가 나오면 류의건네 팀이랑 붙는 거야!]
성좌가 떨리는지 대화창을 마구 쏟아보냈다. 승지는 가볍게 윷을 모아 쥐었다.
이까짓 거. 누가 나오든 상관없다고.
승지가 거침없이 한 손으로 윷을 높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