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작전 본부 (1)
잠시 후 도착한 류의건의 집은 정말로 으리으리한 빌딩이었다.
5성급 호텔이 따로 없는 현관에 내린 최자림이 붉은 시트를 밟으며 한껏 우아한 척 했다.
“으음~ 멋있다~. 마트도 넣으셨어요?”
“드립치지 말고 제발 들어가세요.”
서명구도 내심 놀랐지만 최자림을 수습하느라 후다닥 들어갔다.
승지도 차에서 내리며 건물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길 너 혼자 쓴다고?”
“아래층은 다른 길드에게 종종 임대하기도 했었습니다. 대형 메인 미션이 뜰 때 마다요.”
“흠.”
역시 건물주랑 대기업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더니.
어쩐지 류의건이 냉큼 보증을 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정도면 팔다리가 없어도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니까.
실내도 화려한 건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개인적인 물건은 거의 없었다. 집이 아니라 호텔로 안내된 기분이다.
“여기 있는 건 다 편하게 쓰시면 됩니다.”
“헉, 명구야! 여기 술 있다! 술 먹자!”
“안 돼요!”
“와인인데? 비싼 건데?”
“최자림 각성자님은 뭐가 비싼 건지도 모르잖아요!”
결국 각자 술 대신 탄산수 하나씩 받아들고 나서야 본격적인 얘기가 시작되었다.
호쾌하게 탄산수 한 병을 원샷한 최자림이 소리쳤다.
“자! 그럼 브리핑을 시작해보겠습니다.”
“브리핑?”
“옙! 이제부터 여기가 글라세로 대책 회의 본부입니다!”
최자림이 멋대로 말했다. 류의건은 또 착하게 자기 집이 본부로 쓰도록 내버려 두었다.
눈치를 보던 서명구도 거들었다.
“채승지 각성자님이 호위팀과 던전에 가신 동안 대책팀은 글라세로 자료를 모두 긁어다가 최적의 소탕 작전을 짰었어요.”
“좋은 소식이 있다면! 글라세로는 강한 마왕은 아니라는 거예요. 한 번 죽었다 살아나서 힘을 모으느라 크기까지 요만해졌죠.”
“나쁜 소식은 글라세로는 소환된 순간부터 주변을 오염시켜버려요. 공기, 물, 땅, 예외는 없습니다.”
서명구가 힐긋 눈을 굴렸다.
“게다가 본체는 모두 독액과 시체뿐이라 공격을 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할뿐더러 피해를 주기도 힘들죠.”
설명만 들어도 지금까지 넘어온 부하들만큼이나 역겨운 놈이라는 확신이 왔다.
하긴 그놈들 대장이니 어련하겠어.
소파에 길게 다리를 뻗은 승지가 물었다.
“약점도 없어?”
“그럴 리가요! 저흰 일단 글라세로를 해치울 방법을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해봤어요.”
“첫 번째는 신성 마법을 퍼부어서 통째로 정화해버리는 거죠.”
“신성 스킬에선 최강 2위 류의건 씨가 든든하게 한 뚝배기 말아주실 수 있으니까요.”
최강 2위라는 모순적인 수식어에 류의건이 부끄러워했으나 승지도 신성 쪽 스킬이라면 류의건이 탑이라고 알고 있었다.
랭킹 1위 스킬은 뭐였더라. 걔도 번쩍번쩍 하는 거였는데.
최자림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 방법은 어마어마한 마력이 필요한데다가 류의건 씨도 한 열 명 정도는 더 필요해요.
버프랑 아이템으로 류의건 씨를 잔뜩 강화한다 쳐도 최소 다섯 명은 더?”
“하지만 그래도 안 돼요. 길드장님이 해외 랭커들한테 협조 공문을 보냈었는데 벌써 정부쪽에서 막혔거든요. 초창기랑 달리 요샌 다들 각성자 출국에 엄청 예민해져서요.”
최자림과 서명구의 말에 류의건이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만약 저 혼자 마왕을 상대한다면….”
“아-아, 안 돼요, 안 돼. 이미 계산 다 해봤어요. 류의건 씨가 능력 최대치를 찍었던 기록, 저희 쪽에도 있잖아요. 그거 감안하고 계산해 본 거예요.”
“게다가 류의건 씨가 제대로 싸울 수 있도록 각성자들을 동시에 대피시키는 것도 꽤나 어려워요. 일단 마왕이 소환됐을 때 최소 이백 명 정도가 같이 소환된 몬스터를 사냥해야 되거든요.”
“역시 그렇습니까.”
류의건은 금세 풀이 죽었다. 힘이 있어도 쓰질 못하니 정말 다른 의미로 골치가 아플 인간이었다.
“어휴 류의건 씨 성좌는 진짜 너무 빡빡하다니까. 본인이 강한 힘을 줘놓고 컨트롤을 못한다며 페널티를 때리는 게 어딨어요?”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류의건 씨는 파트너로 페널티 잡는 각성자 하나만 생겨도 훨씬 편해질 텐데요.”
승지의 눈썹이 잠깐 올라갔지만. 그는 모르는 척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럼 두 번째 방법은?”
“원거리 포격으로 본체를 대부분 날려버린 다음 핵이 드러나면 없애버리는 거예요.”
“화력 싸움이죠! 마왕은! 폭발이다! 우하하하하!”
“뭐 실제로 폭탄을 빌려올 수는 없으니 대부분 스킬 집중이 되겠지만요.”
방정맞은 최자림의 웃음을 본 서명구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원래는 길드 연합에서 함께 화력전을 펼치기로 했었는데, 이젠 승지 씨가 돌아온 걸 밝힐 수 없으니 소수정예로 가야겠죠.”
듣고 있던 승지가 문득 상체를 일으켰다.
“잠깐, 니들 나한테 협력할 거냐?”
“그럼 저희가 왜 모였겠어요?”
“부활한 시체 구경하러?”
승지의 말에 최자림이 낄낄거렸다.
“승지 씨. 승지 씨는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 지 모르죠?”
[꺄악! 나 말고 승지의 매력을 알아본 사람이 또 있단 말이야!?]
대놓고 면전에다 던진 칭찬에 승지는 약간 당황했다. 최자림이 빙글빙글 웃었다.
“저번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저흰 승지 씨를 살려두고 싶다구요~.”
“솔직히 다른 길드들이 승지 씨가 던전에서 죽었다고 했을 때 얼마나 안심했는지 봤어요. 저희가 승지 씨를 데려왔는데 얼마나 마음에 걸리던지….”
짜식들이 뒤에서 그랬단 말이지.
류의건도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또한 길드 연합이 보여준 모습에 많이 실망했습니다. 그들이 대의를 위한다면 저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진지한 발언에도 도무지 분위기를 따라갈 수 없었던 승지가 대충 손을 휘저었다.
“음, 그래. 정의롭지 못하네. 근데 너희 둘은 이미 길드 소속 아니냐?”
“우린 어차피 미스핏에서 내놓은 자식들이니까요! 은혜 갚은 까치 노릇 좀 하겠습니다!”
“정말 호적에서 파고 싶어지는 발언이네요.”
“헐, 명구야. 나랑 같은 호적에 들어가고 싶었니? 진작 말하지!”
“최자림 각성자님이랑 남매가 되느니 차라리 종에다 머리를 박을래요.”
멍청한 대화를 듣다 못한 유청이 결국 인상을 썼다.
“지금 일부러 회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이 계획대로 풀리려면 반드시 끌어들여야 할 길드가 있을 텐데요.”
“머슴아. 똑바로 말해보련?”
“아, 아뇨. 유청 씨의 말이 맞아요.”
명구가 시선을 피하며 대신 대답했다. 그는 아무래도 팔이 잘린 유청을 쳐다보기 힘든 모양이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글라세로를 없애려면 꼭 길드 어둑시니의 도움이 필요해요. 정확히는, 어둑시니의 길드장인 랭킹 1위가요.”
“아, 저번에 직전까지 안 나타났던 사람.”
승지도 기억해냈다. 미스핏 길드장들이 그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네. 그분은 워낙 바쁘고 좀… 자기 내키는 대로 사시는 분이라.”
“오히려 좋아요! 랭킹 1위의 무력! 짱짱한 길드원들! 그리고 딱히 길드 연합을 신경 쓰지도 않는 자유로움! 이번 일을 승낙만 하면 비밀리에 글라세로를 잡는 거야 껌일 겁니다!”
확실히 랭킹 1위면 대단하지만. 이곳저곳에 잘도 보였던 랭킹 2위인 류의건과 달리 랭킹 1위에 대한 인상은 몹시 흐릿했다.
듣기로는 인터뷰도 거절할 만큼 바쁘게 살고 싶다나.
대충 그가 얼마나 강할지 상상해보던 승지가 물었다.
“흐음… 랭킹 1위를 어떻게 같이 싸워달라고 설득할 건데?”
“일단 만나기만 하면 됩니다!”
최자림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왕을 잡을 기회가 있다고 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을 사람이거든요! 어쩌면 비밀로 해달라는 것도 쉽게 승낙할걸요?”
“문제는 아무나 만나기가 힘들다는 거지만… 뭐, 의건 씨랑 승지 씨가 있으니까 괜찮겠죠.”
“니들 계획 너무 대충인 거 아니냐.”
“어허, 5년간 각성자들의 자료만 분석한 저희들의 정보력을 얕보지 마시죠! 확신이 있으니까 들이미는 겁니다!”
최자림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마왕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뛰어나올 사람이니까 안 들키게 살짝 흘려만 주세요.”
그럼 어둑시니 길드가 참전한다고 생각해보면 내 전력이 어느 정도 되는 거지?
일단 랭킹 1, 2위가 동시에 들어오면 마왕 몸체를 날려버릴 화력은 충분할 거고.
마왕의 핵은 뭐… 내가 잡으면 되잖아? 쌉 가능이지.
그럼 쪽수를 맞춰줘야 하는 건 쫄따구정도겠네.
대충 각성자 200명쯤이 마왕의 부하를 잡아줘야 한다고 치면…….
승지가 몸을 돌렸다.
“어이, 머슴. 너네 길드에선 몇 명이나 동원할 수 있냐?”
“…한 명이다.”
“장난치지 말고, 자식아.”
“네가 팔을 안 잘랐다면 두 명이었겠지.”
유청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대꾸했다. 성좌도 동의했다.
[기억 안나 승지야? 청월량 길드원은 셋 밖에 없었잖아!]
“나도 아는데 저번에 길드 건물에서 막아섰던 놈들 중에서 각성자도 꽤 있지 않았냐?”
“잠깐, 그게 무슨 뜻이지? 길드라니. 설마 청월량 길드 건물에 갔었나?”
드물게 동요한 유청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이 짧다?”
“……갔었습니까!”
“미친놈이 소리를 지르네. 그래. 갔다. 무슨 빌딩에 카페같은 것도 없이 도장만 주르륵 있냐? 청월량 길드 좀 들어가겠다고 했더니 길드원도 아닌 놈들이 ㅈ나게 막아서던데?”
“…….”
유청이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일어났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왜 저래?]
그러게?
유청 놈의 반응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내 알 바는 아니지.
승지가 툭 내뱉었다.
“아무튼 길드원이 아닌데 빌딩 문지기를 할 정도면 마왕 잡는 데도 쓸 수 있겠지. 같이 데려와라.”
“…….”
“내 말 들었냐?”
“…얘기해보지.”
“어허?”
“……얘기해보겠습니다.”
유청의 태도가 마지못해 고분고분해졌다. 아무래도 본인 처지가 머슴이라는 걸 똑똑히 새겨주려면 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두 사람이 금방이라도 싸울 줄 알았는지 남은 세 사람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다들 씻고 좀 쉬어볼 까요!”
“하하! 정말 그렇네요, 최자림 각성자님!”
“방은 많으니까 아무 곳이나 쓰시면 됩니다. 옷도 많으니 내일 나가실 때 고르시면….”
“아, 참. 그거 말인데.”
승지가 일어나다말고 말했다.
“랭킹 1위 설득하러 갈 때 어둑시니 길드로 나도 간다.”
“네?”
“왜요?”
“궁금하잖아.”
랭킹 1위라니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 없지.
대한민국에서 제일 쎈 놈.
크아, 말만 들어도 피가 끓는다.
다른 각성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괜… 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어둑시니 길드는 연합 때 안 모였으니까 자세한 저주 내용도 모를 테고.”
“그러네.”
“오히려 설득력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그 분 성격이라면 저주에 걸린 당사자를 더 도와주려고 할 테니.”
“앗 그치만 승지 씨가 함께 가려면 한 가지 바꿔야 할 게 있어요!”
“뭔데?”
최자림이 씨익 웃으며 승지의 얼굴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