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즐거운 나의 집 (1)
철컹.
유청이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도 채승지를 찾으러 간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지만, 미션을 하러 갈 때마다 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각성자로서의 네 삶은 끝난 거다.’
팔을 자를 때 들었던 채승지의 목소리가 귓가에 저주처럼 쟁쟁 울렸다.
아무리 채승지가 자신을 하인처럼 부린다고 해도 정신까지 진짜 굴복한 것은 아니건만.
반발심에 유청은 그가 이세계로 떠나있는 동안 몰래몰래 사냥을 하고 미션을 깼다.
류의건의 팔다리가 인질로 잡혀있으니 잘린 팔을 복구하진 못하더라도 싸울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
띠링!
[ 메인 미션 : 219회차 고블린 습격 토벌전.
자격 : 알림이 뜬 구역에 있는 모든 각성자.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배분됩니다. ]
평소 같았으면 너무 쉬운 미션이라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미션이지만.
유청 정도 되는 각성자가 이제 막 각성한 햇병아리들과 함께 사냥을 나가는 건 몹시도 굴욕적인 일이다. 류의건처럼 선한 의도로 사람들을 구출하기 때문에 무슨 미션을 하든 욕을 안 먹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2차 각성자의 수가 크게 늘어난 지금은 할 게 없어서 초보자들 사냥감까지 빼앗느냐는 소리를 듣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유청은 이를 꽉 물었다.
이미 채승지 밑에 있으면서 자존심은 계속 운동화 밑창처럼 닳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그걸 감수할 만큼 사냥에 나갈 이유가 있었다.
띠링!
[ 서브 미션 : 몬스터의 시체 만들기
적에게 확실한 죽음에 이르는 일격을 준다.
0/100
보상 : 스탯 분배치 10 ]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타난 미션 창을 유청이 빤히 바라보았다.
원래 자신의 성좌는 이토록 자주 서브 미션을 주지 않는다. 저렇게 많은 스탯 분배치를 한꺼번에 준적도 없다.
다른 서브 미션과 달리 검은 테두리를 두른 상태창은 크게 어려운 미션을 하지 않았는데도 보상을 크게 줬다.
“…….”
유청도 알고 있었다. 저 미션은 글라세로가 죽은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는 걸.
그 때문에 처음에는 일부러 저 미션을 수행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꺼림칙함 때문이다.
…하지만 글라세로는 이미 죽었잖아?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리는 각성자를 만날 때마다, 랭커들이 왜 팔을 복구하지 않냐고 물어볼 때마다 유청은 점점 더 힘을 향한 갈망이 강해졌다.
성좌신이 마왕은 죽었다고 보상까지 확실히 줬다. 자신 혼자 그걸 의심한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꿀꺽 침을 삼킨 유청이 미션 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공기가 빨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슈우웅!
무슨 소리가?
유청이 주변을 둘러본 순간 명랑한 큐라의 목소리와 함께 차원문에서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도~~착~!”
“?!”
이세계에 갔던 채승지와 유월이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유청은 곧장 서브 미션 따윈 깡그리 잊어버렸다.
정장과 드레스를 입은 채승지와 유월을 보고 머리와 턱이 분리될 만큼 기겁해버렸으니까.
“너, 너…!!”
“?”
유월이 사뿐히 착지하며 드레스 자락이 우아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십이 년 동안 쌍둥이로 살아오면서 처음 본 모습이다.
혈육이 꾸민 모습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자기 눈을 찌르고 싶어진다.
“너 그 꼴로, 지금… 저 인간을 만난 거냐?”
“왜 별로야?”
“그게 아니…!”
유월이 자기 드레스를 내려다보는 모습에 소름이 쫙 끼친 유청이 말까지 더듬었다.
각성자 연말 파티에도 귀찮다고 던전에서 나온 모습 그대로 가던 쟤가, 드레스를 입었다고. 그것도 채승지 저 인간을 만날 때?
급격히 현실부정하고 싶어지는 유청의 어깨를 채승지가 턱 붙잡았다.
“어이, 머슴. 간만에 본다!”
그의 눈이 매우 진지했기에 유청은 더욱 식겁했다.
이 인간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결혼 허락이라도 받으려는 건 아니겠지?
유청이 질색했다.
“뭡니까!”
“야! 마왕 진짜 개 같더라!”
승지는 마침내 지구로 돌아왔다는 기쁨 때문에 유청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네가 왜 마왕 싫어하는지 알겠더라고! 와, 씨! 어떻게 가는 곳마다 마왕 새끼들이 튀어나오냐?”
“그, 그렇습니까.”
“어! 마왕은 다 죽여야 해! 근데 역시 마왕 때문에 날 죽인 건 ㅈ나 선 넘은 거 같다! 생각하니까 새삼 빡치네! 가서 대가리 박아.”
“예?”
어이가 없어진 유청이 벙 쪘다. 승지가 킥킥거렸다.
“농담이다.”
유청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저 미친놈이.
채승지는 차라리 기분이 나쁜 편이 상대하기 편했다. 기분이 좋으니까 인간이 더 돌겠다.
“아무튼 네가 생각하는 일 같은 거 없었으니까 오버하지 마라.”
내가 무슨 생각까지 한 줄 알고?
저렇게 말하니 대체 채승지와 유월이 어디까지 갔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져서 더 혼란스러웠다.
젠장. 분명히 유월이 저 놈한테 별로 호감이 없어 보였는데 언제 저렇게 옷까지 차려입고 만나게 된 거야?
저걸 한 집안에 들인다는 생각만 해도 오장육부가 뒤집혔다.
채승지에게 도저히 존재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미지의 매력이라도 있는 건지. 빌어먹을.
유청은 채승지가 서큐버스와 대화하는 틈을 타 유월에게 물었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유월이 환장하게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나 조금 후회했어.”
“뭐? 뭐 때문에?”
지금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설마 더 충격적인 얘기를 할까봐 유청이 긴장했다.
그런데 유월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승지 씨, 그곳에서 잘 어울리더라. 내가 데리러가지 않았더라도 엄청 잘 살 것 같았어.”
유청도 덩달아 혼란에 빠졌다. 좀 남녀 간의 그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던 것이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여기선 승지 씨가 별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잖아. 다른 길드장들도 다 꺼림칙해하고 심지어 내 쌍둥이란 애는 본인을 죽이기나 하고 말이야.”
갑자기 찔린 유청이 볼멘소리를 했다.
“…그 얘기가 왜 나와.”
“아무튼 훨씬 좋아보였어.”
이세계에서 만난 승지는 당당하고 멋있었다.
승지가 유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설계한 그림이었고, 의도대로 먹혀들어 갔지만.
유월은 오히려 위화감을 느꼈다.
홀로 서있는 자.
단 셋 뿐인 길드를 위해서 길드장을 맡은 유월은 묘하게 승지의 모습에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자신의 검에는 언제나 지킬 게 있고, 싸워야 하고, 복구해야만 하는 세계를 그려두었다.
류의건처럼 모든 정의는 아니지만 딱 자기 품에 들어오는 세계만으로도 지키기 바빴다. 그 외엔 별로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승지에게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채승지의 무게는 가벼웠다. 그대로 날아가도 괜찮을 만큼.
“굳이 내가 갈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드네.”
* * *
[어때?]
성좌가 승지와 유월을 번갈아 확인했다.
[유월이 충분히 감명 받은 거 같지? 도저히 승지한테서 시선을 못 떼는 걸!]
훗. 후훗. 역시 그런가.
승지가 속으로 매우 뿌듯해했다. 역시 이세계에서 구를 때가 아니라 받을 거 다 받을 때 부르는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니까.
유월이 도착하고 나서도 귀족들이 줄지어 자신에게 선물을 바치는 꼬락서니는 정말 두고두고 보기 아까울 만큼 가관이었다.
있는 놈들이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귀한 물건을 내놓는 모습은 언제봐도 아주 짜릿하다 이 말이야!
[덕분에 인벤토리도 빵빵해졌어!
٩(๑>∀<๑)۶ 우리 승지는 이제 완전 부자다!]
[대박이야! 꺄!]
가뜩이나 기분이 좋았던 승지의 입매가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번 이세계 일로 대체 얼마를 번거지? 크아. 이제 돈 셀 일만 남았구만!
순수한 자본주의로 활짝 피어난 승지의 웃음을 오해했는지 큐라가 은근슬쩍 달라붙었다.
“아이~ 역시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 자기!”
“떨어져. 실컷 붙어 다녀 놓고는.”
“자기가 아니잖아!”
“아무튼 뒷수습 다 끝났으니까 그만 가라.”
승지가 대충 손짓했다. 큐라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 자기를 찾아다니는 동안 계속 붙어서 통역 노릇까지 했다니까. 심판자는 나 죽이려고 하고. 제 때 도망치는 것도 힘들었어.”
“어엉. 그래.”
그래봤자 어차피 니들이 저지른 실수를 본인들이 치우는 거라 승지는 별 감흥도 없었다.
그러게 클랩의 성에서 창고 관리를 잘했어야지.
뾰로통하게 승지를 바라보던 큐라가 점점 더 승지의 귓가로 가까이 다가왔다.
또 뭔 헛소리를 하려고.
승지는 그냥 말하라고 손을 휘저었다. 그러나 큐라는 재빨리 손목을 붙잡더니 확 승지의 귀를 깨물었다.
“웃?!”
“그러니까 이건 내가 주는 선물.”
[ 서큐버스의 선물 버프를 받습니다! ]
[ 서큐버스의 선물 : 매혹의 주술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보는 이들에게 호감을 살 확률 30% 상승. 거래 성공 확률이 높아집니다. ]
“미, 미친!”
[꺄아아아아악! 우리 승지 귀의 순결이이이이이!]
뭐래는 거야, 너도 닥쳐!
가뜩이나 머리가 터질 듯이 놀란 승지가 성좌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러대는 통에 더욱 어질해졌다.
“이딴 거 줘도 안 가진다고! 먼저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승지는 안 맞을 걸 알면서도 큐라가 있던 자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아잉, 자기. 설렜어?”
“설레긴, 미친. 아프다, 이 자식아!”
“후후후후! 그게 좋은 건데.”
“꺼져!”
“그럼 자기, 다음에 또 봐!”
승지를 놀려먹는 게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지 큐라가 깔깔깔 웃으며 사라졌다.
기껏 기분이 좋아졌던 승지의 기분이 다시 곤두박질쳤다.
다시는. 다시는 괴물 같은 마왕 놈의 부하 새끼들이랑 엮이지 않을 테다, 빌어먹을!
결론은 역시 마왕 척살뿐이다.
다음 사냥 1순위는 무조건 클랩 마왕이다. 젠장.
[흑흑… 우리 승지가… 승지가아아…!]
아니, 웃음의 마왕인가.
꺼이꺼이 우는 시늉을 하는 성좌를 보니 다시 화낼 힘도 사라져버렸다.
이럴 때 보면 평소랑 똑같은 바본데.
아직 성좌에게 남은 수상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성좌도 믿었지만, 꺼림칙한 부분을 계속 남겨둘 수도 없었다.
그곳으로 가야 말할 수 있다니까. 체르마에게 받은 성좌의 고향별 던전 열쇠를 빨리 써봐야겠어.
바로는 말고.
승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빵빵거리는 자동차 소음과 콘크리트 건물을 보니 살 것 같았다.
아니, 단순히 사는 것 이상이다.
건물들의 목 부러질 듯한 높이가 처음으로 벅차게 다가왔다.
이제 저 중 하나는 내 거다.
승지는 빌딩 하나를 충분히 사고도 남을 재산을 벌어왔다.
한 번도 이 빌어먹을 도시에 완전히 내 것이 될 집이 있다고는 생각 못 해봤다. 그런데 이젠 한 자리에 제대로 못을 박을 수 있다니.
저 중에 아무거나 골라잡기만 하면 되잖아!
승지는 너무 좋아서 욕이 나왔다.
“젠장! 그래도 돌아온 보람이 생긴다!”
“볼 일 다 끝났습니까.”
유청은 승지가 진정한 걸 확인하고는 슬금슬금 다가왔다. 유월도 함께였다.
이런 젠장, 아까 큐라가 한 짓을 봤나?
승지가 황급히 곁눈질했다. 유월의 표정은 덤덤해서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유청은 저렇게 얼굴 전체에 ㅈ나 싫군… 이라는 기색을 풀풀 풍기고 있는데 말이다.
“당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어둑시니 길드장이 찾아왔습니다.”
“번태 아재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