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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그를 잃었다 (1)

유월은 한시적으로 큐라의 도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채승지를 찾으려면 무조건 큐라가 살아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살짝살짝 나타나도 지금의 심판자는 잡을 수 없다고 장담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가 없으면 대화가 안 됐다.

“@#@%@#@. @#[email protected]”

“지금 출항할 수 있는 배가 있냐고 묻고 있어.”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있기는 하지만 왜 날아가지 않냐고 되묻네?”

큐라가 열심히 동시통역을 해주었다.

유월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긴 하지만, 이 서큐버스 무지 귀찮네.

게다가 틈만 나면 자꾸 어딜 만지려고 들었다. 유월이 한 번만 더 손을 대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고 협박한 뒤에야 간신히 멈추긴 했지만. 여전히 은근한 집착이 느껴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큐라가 나타날 때마다 찌르는 듯한 심판자의 시선이 압박해대서 거슬렸다.

가면을 쓰고 있는데 대체 어떻게 하는진 모르겠지만.

“거스에게 이리오라고 해. 신의 심판자에게서 멀리 떨어지면 다시 승지 씨한테 가는 차원 문을 열 수 있겠지.”

“안 될 걸~. 지금 도망치면 신의 심판자한테 완전히 찍혀버릴 거야. 마왕의 편이라고 오해받아도 좋아?”

“상관없어.”

어차피 유월이 사는 현실은 이세계가 아니다.

“난 빨리 승지 씨를 찾아서 돌아가기만 하면 돼.”

“치 재미없어라~.”

그러나 서큐버스가 거스에게 가기도 전에 심판자가 먼저 유월에게 돌아왔다.

“#@$#@@%, @#[email protected]”

유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내가 나와서 통역해도 좋다는데?”

불쑥 튀어나온 큐라가 속삭였다. 심판자의 고개가 큐라 쪽으로 돌아갔지만 이번에는 검을 뽑지 않았다.

큐라는 혹시라도 공격할까 봐 유월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

빼꼼히 머리를 내민 큐라를 본 심판자는 매우 심기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풀풀 날리고 있었지만 참아냈다.

“지금 자기가 힘을 봉인당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대. 지금 눈앞에 있는 서큐버스도 대신 죽여주면 좋겠지만 당장 필요하니 그러지 않겠지? 하고 아쉬워하네. 뭐야! 듣는 서큐버스 기분 나쁘게!”

큐라가 투덜거렸다. 유월이 대답했다.

“통역해. 난 찾을 사람이 있어서 안 된다고.”

“그 사람이 혹시 빨간 머리였냐고 물어보네?”

“승지 씨를 봤습니까?”

유월의 표정이 달라졌다. 심판자가 고개를 숙였다.

“보긴 했지만 드래곤의 추종자라서 죽여야 한대. 어머나! 자길 도와줬으니까 죽이기 전에 잠깐 대화는 할 수 있게 해준대.”

너무 덤덤하게 말해서 말의 내용이 가져다온 충격이 살짝 늦게 왔다.

“오해입니다. 승지 씨는 드래곤 같은 거 안 믿을 텐데요?”

큐라가 갸웃거리며 전해주자 철가면이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신전에서 발견된 인간도 똑같이 대답하긴 했대. 자기랑 관련 없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유월의 요청에 심판자가 곱슬머리를 데려왔다. 포로로 잡혔는데도 어딜 묶어 두진 않았는데, 어차피 도망가 봤자 심판자가 날개 한 번 펄럭이면 바로 따라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얌전히 끌려나온 곱슬머리가 울망한 눈으로 유월을 쳐다보았다.

“승지 씨와 같이 있었습니까?”

“승지@#.”

곱슬머리의 입에서 정확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유월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의 이름이다.

“후후, 정말로 대화한 모양이야. 하긴 자기는 성좌신의 가호로 말이 서로 통했으니까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었겠지.”

심판자가 끼어들었다.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그 사람이 성좌신의 가호를 받고 있냐고 되묻네? 그래요, 철가면 씨. 드래곤을 믿는 사람이 성좌신의 가호를 받을 리가 없겠지?”

큐라가 정신 사납게 양쪽 대화에 다 끼어드느라 잠깐 혼선이 있었다.

심판자는 잠깐 말이 없다가 이었다.

“자기가 힘을 잃은 건 승지라는 사람 때문이었대. 어머나! 자기가 그렇게 강했단 말이야? 아무튼 그 사람도 성좌신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면 이번 일은 신의 뜻일 테니 죽이진 않겠대.”

고마워해야 하는 건가.

유월은 계속해서 곱슬머리에게 물었다.

“어떻게 같이 다니게 된 겁니까? 지금은 어디로 갔구요?”

“위험에 빠졌을 때 구해준 사람이래. 하지만 마무자의 신전에서 그들에게 실망하고 떠나버렸다지 뭐야. 그 후로는 자기도 모른대.”

구해줬다고….

갑자기 이세계에 날려 와서 혼란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적응을 잘한 모양이다.

하긴 다들 죽었다고 생각한 던전에서도 돌아온 사람이었지. 어쩌면 승지는 현실보다 이세계가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

큐라가 뾰족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쨌든 자기는 결국 이 별에 없다는 거잖아? 다시 차원 문을 열어야겠는걸.”

그때 심판자가 갑자기 팔을 치켜들며 끼어들었다.

“으응? 그건 안 된다니?”

큐라와 심판자가 이세계 말로 마구 떠들기 시작해서 유월은 대신 곱슬머리에게 관심을 돌렸다.

서로 대화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눈을 빵긋이 뜬 곱슬머리는 아주 순해보였다.

“…승지 씨가 잘해줬나요?”

“@#$…?”

어쩐지 동생 생각이 나 유월이 곱슬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어우 정말! 저 고지식한 괴물!”

심판자와 대화를 끝낸 큐라가 잔뜩 씩씩거리며 돌아왔다.

“심판자가 자기도 승지를 만나서 봉인된 힘을 돌려받겠다고 따라오겠대! 그렇지만 차원 문을 타는 건 마왕의 힘을 빌리는 거라 싫다는 거야!”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배를 타고 날아가재! 대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알고 그러는 거야? 게다가 자기가 어느 별에 있을 줄 알고 배를 타!”

“승지 씨가 어느 별에 있는지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감각으로 아는 거지 감각! 어느 쪽인지 어렴풋이는 느껴지지만 그 사이에 별이 얼마나 많은데! 이쪽도 어렵게 반대쪽 좌표를 잡고 쫓아가는 거라구.”

흥미롭게 듣던 유월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승지 씨의 반대 좌표란 뜻이야?”

“뭐… 말하자면?”

큐라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큐라가 의도한대로 유월은 그 뜻을 승지가 자신한테 관심이 있다는 게 아니라 서로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하긴 우린 맞는 게 없었지.”

“게다가 자기가 그쪽 쌍둥이 팔도 잘랐다면서? 아아~ 내가 그 집에서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훤칠하게 생겼던데 정말 아까웠, 웃!”

“입 닥쳐.”

큐라의 볼을 움켜쥔 유월이 경고했다. 힘이 들어간 그의 발밑에서 땅에 쩍하고 금이 갔다.

“남의 가족에게 입 놀리지 마.”

기세가 달라진 유월을 처음 본 큐라가 깜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피가 몰려 붉어졌던 유월의 핏기가 천천히 가셨다. 강철 덫을 벌리듯 다시 손아귀를 펼쳐 큐라를 놓아준 유월이 말했다.

“심판자한테 전해. 난 시간 낭비할 수 없으니 승지 씨를 만나고 싶으면 알아서 쫓아오라고 해. 우린 차원 문을 탈거야.”

“…라는데요?”

큐라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전달하자 심판자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나도 가겠다.”

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큐라가 마지못해 전달했다.

그리고 이 모든 대화를 한 발짝 떨어져서 듣고 있던 거스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다들 이 몸을 잊고 있는 것이오? 도대체 나는 그냥 집에 보내달라고 언제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거스의 소망과는 달리 유월의 일행은 점점 더 늘어났다.

유월, 거스, 신의 심판자, 곱슬머리까지.

유월은 곱슬머리는 떼어놓고 가고 싶었지만 심판자가 죄인은 데려간다고 말한 데다 본인도 적극적으로 따라오겠다고 해서 합류하게 되었다.

“자 다들 이쪽으로 서.”

큐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도 유월에게 잡혔던 일이 앙금으로 남아있는지 큐라는 전처럼 말을 늘이지 않고 뾰족하게 말했다.

“말해두지만 별을 이동한다고 바로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알고 있어.”

유월이 덤덤하게 말했다.

“클랩 마왕의 힘은 공간 지배가 아니잖아. 마왕이니까 당연히 별을 건너올 순 있겠지만, 차원 문을 건널 때마다 그 거리만큼 시간이 걸릴 테지.”

“…그래 맞아. 바로 이동했다고 느끼는 건 서큐버스인 내 힘으로 최면을 걸어준 덕분이지.”

어서 감사하라는 듯 큐라가 턱을 치켜들었지만 일행은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큐라의 표정이 점점 더 심술궂어졌다.

“하지만 신의 심판자는 나보다 강해서 최면이 통하지 않을 테니 아주, 아주, 아주 지루할 거야? 괜찮겠어? 지금이라도 빠져도 되는데.”

“#@[email protected]”

큐라가 통역해주지 않았지만 유월은 심판자가 상관없다, 라고 말한 것 같았다.

나도 지능 스탯을 더 올려뒀으면 저 심판자처럼 견뎌야 했으려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시간만 느껴야 한다니 완전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체력만 올려두길 잘했네.

유월은 과거의 자신을 칭찬했다.

게다가 차원문을 넘을 때마다 몸이 느꼈던 위화감을 알았으니 기분까지 개운해졌다.

지금은 협력하고 있지만 저 서큐버스도 언젠가 사냥해야 할 존재다.

차원문을 연 큐라의 손목을 잡으며 유월은 그를 사냥할 미래를 생각했다.

“자! 도착이야!”

최면이 잘 먹혀들었는지 눈 깜박할 사이에 다른 별로 도착한 것처럼 느껴졌다.

또다시 낯선 별이다.

“승지 씨?”

괴괴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또 한 발 늦은 거 같지~?”

큐라가 히죽 웃었다. 그들이 도착한 지점은 강가였다.

파헤쳐진 무수히 많은 무덤들과 검은 웅덩이를 본 유월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 *

촤아악.

차가운 물이 전신에 뒤집어씌워졌다.

“…!”

승지가 소리 없이 파들거리며 움찔거렸다.

“깨어났나?”

“…그래 이 새끼야.”

정신이 확 든 승지가 눈을 치켜떴다.

다친 상처로 물이 흐르며 따끔따끔한 통증을 준 덕분에 알람시계가 따로 필요 없었다.

승지가 있는 곳은 어두컴컴한 실내였다. 혹시 고문실인가 싶었으나 다행히 핏자국이나 고문 기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상황도 아니었지만.

뾰족하게 수염을 기른 남자가 인내심 있게 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 다 뭔데?”

“너는 지금 안식의 제국 황족 살해 혐의를 받고 있다.”

“뭐? 누구?”

뾰족 수염이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끈적한 검은 액체였다.

“네가 쓰러진 땅에서 마왕의 힘을 이용한 네크로멘서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벨타보타?”

승지가 무심코 이름을 말하자 뾰족 수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 분이었나.”

“야, 잠깐만. 뭔가 개 같이 오해하고 있나본데.”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걔가 알아서 자살골 넣은 거거든?

게다가 그 미치광이 노인이 제국의 황족이라고 떠든 게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단 말이냐?

그러나 뭘 설명하기엔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뾰족 수염이 승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크억!”

“아직 덜 나았군. 씻어라. 재판에 참석할 때는 멀쩡한 모습으로 나와야 할 테니까.”

버둥거리는 승지를 본 뾰족 수염이 그를 만졌던 손을 다시 씻었다. 알고 보니 그에게 뿌려졌던 찬 물은 씻으라고 갖다놓은 물통에서 나온 거였다.

재판은 뭔, 씹.

승지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형형하게 불태웠다.

이게 다 뭔 개짓거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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