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우린 X나 예전에 망했어 (3)
뭐 어떡하라고. 이 뿅망치야.
뿅망치가 가볍게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잘 생각해보라는 것처럼.
무슨 형태로도 변할 수 있는 자신을 믿어보라는 듯. 승지가 노려보는 동안 그를 밟은 클랩이 드래곤을 향해 소리쳤다.
“여긴 내 영역이야!”
드래곤의 입김에 비하면 한 없이 하찮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부르그골은 클랩을 무시한 채 거대한 발톱을 별에 디뎠다.
쿠웅!
분명 부드러운 착지였으나 드래곤의 발톱 사이에 끼이게 된 큐라는 거의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순식간에 중력을 바꿔가는 데도 승지는 여전히 뿅망치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정말 미친 소리 같군. 뿅망치랑 대화한다니.
뿅망치는 승지의 주의를 끌자 이번에는 가호 스킬창이 떠있는 쪽을 향해 손잡이 부분을 삑삑거리며 들어올렸다.
마치 스킬을 풀라는 것 같았다.
“널 어떻게 믿고.”
뿅망치가 서운하다는 듯 굴렀다.
“어디에 있나.”
그 때 우주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뜨뜻하고 무거운 입김이 승지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드래곤의 입김과 함께 육성이 전해진 것이다.
클랩이 이를 빠득거렸다.
“무슨 소리야.”
“나의 죄인을 어디로 빼돌렸나.”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몸이 아파왔다. 가뜩이나 뒤지기 직전인데 용 새끼까지 한 발 얹어버리고 있었다.
클랩이 날카롭게 웃어댔다.
“이거 왜이래. 너만 심판자를 싫어하는 줄 알아?”
아무리 그래도 마왕은 마왕인지 클랩이 위압적인 부르그골을 향해 대담하게 으르렁거렸다.
“이건 내 거야.”
“보잘 것 없군.”
부르그골은 어렴풋이 치맛폭에 가려진 붉은 머리를 무심히 지나쳤다.
“나를 부른 자가 느껴지건만 보이지 않는군. 성좌신이 또 하나의 기만을 성사시켰는가.”
아무리 누워있던 승지라고 할지라도 완전히 자신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대화에 슬슬 열이 받았다.
이 새끼들이? 나 아직 안 뒤졌다?
그동안 뿅망치는 안절부절 못하며 삑삑거리고 있었다. 드래곤의 등장으로 클랩이 아래쪽에 신경도 안 쓰는 게 다행이었다.
저 녀석이 스킬을 풀어도 죽지는 않는다면 시도해볼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승지가 생각하자마자 뿅망치의 모습이 빠르게 변화했다.
집게 같기도 하고, 의자 같기도 한 모습이 빠르게 스쳐지나가다가 마지막에는 다시 뿅망치가 되었다.
무엇이든 원하는 형태로 될 수 있다는 뜻 같았다.
물끄러미 생각에 잠겨있던 승지가 불쑥 중얼거렸다.
“근데 너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냐?”
흠칫.
분명히 움찔한 뿅망치가 얌전해졌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광대를 닮은 것 같았다.
큐라가 저 무기는 이미 다른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했다.
무의식중에 승지는 지금까지 철석같이 자신이 무기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니까.
하지만.
…썅, 그래. 제정신이면 내가 뿅망치 형태를 무기로 골랐을 리가 없지!
승지가 기절할 것 같은 몸뚱아리를 억지로 뻗었다.
“뭐든 네 마음대로 해도 좋으니까 확실하게만 해!”
뿅망치가 휘리릭 변하는 것과 동시에 승지가 스킬을 해제했다.
[ 가호 스킬이 풀립니다! ]
[ 현재 페널티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폭주까지 남은 시간 10…. ]
승지가 볼 수 있었던 상태창은 저게 마지막이었다. 그대로 기절한 승지의 머리 위로 상태창이 마저 떠올랐다.
[ 광대의 친구 스킬이 해제됩니다! ]
숨조차 제대로 못 쉬고 있던 승지의 몸이 약간은 편하게 늘어졌다.
신의 심판자 성좌가 페널티와 함께 주인에게 돌아갔으니 지금 승지가 겪어야 하는 페널티는 온전히 스킬을 쓴 페널티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죽지 않는다.
꿈틀.
승지의 손이 다시 꿈틀거렸다. 클랩은 여전히 달라진 상황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오히려 이변을 알아챈 건 부르그골 쪽이었다.
“잠깐.”
“뭐.”
분노로 씨근거리던 클랩의 두 팔이 우뚝 멈췄다.
“시작 되었는가.”
“무슨 소리야?”
“너의 발밑에서.”
의아해하던 클랩이 갑자기 공중으로 튀어올랐다. 반강제적인 움직임이었다.
“뭐야!”
“마왕님!”
얼어있던 큐라가 그 와중에 비명을 질렀다. 클랩은 뭐가 자신을 허공으로 차올렸는지 어리둥절하게 내려다보았다.
분명 빨간 머리 인간은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지경이었는데?
실제로 클랩이 목격한 광경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승지의 몸은 축 늘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그의 몸을 들어 올린 채였다.
[ 남아있는 모든 성좌 연결도를 소모해 스킬 하나를 강제 개방합니다. ]
[ 스킬 : 태그 매치!
플레이어 1의 체력이 끝나기 전에 플레이어 2로 교대할 수 있다. 단 태그 매치 중 플레이어 2가 소모하거나 획득한 힘은 플레이어 1의 것으로 인정된다. ]
딸랑.
새끼손가락보다 작았던 광대의 모자가 길게 바닥까지 늘어졌다.
광대의 친구 스킬이 끝나자마자 승지의 곁으로 되돌아온 광대 성좌가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승지를 끌어안았다.
승지를 옮기기 위해서 몸집을 키울 필요가 있었지만, 역시 마왕을 한꺼번에 둘이나 마주하는 건 끔찍하게 무서웠다.
“흥미로운 광경이군.”
“저거다! 저거예요 마왕님! 그 광대!”
큐라가 곧바로 손가락질을 했다. 대역은 침을 꿀꺽 삼키며 승지의 어깨를 받친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마왕의 무기가 아무리 형태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지만 그 사용에는 한계가 있었다.
주인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기 때문이다.
클랩을 날려버릴 만큼 커졌던 뿅망치가 다시 작아진 채 광대의 손으로 날아 들어왔다.
빠르게 눈을 굴리며 그들의 동향을 파악한 대역이 승지를 보호하듯 뿅망치를 등 위로 가로질러 잡았다.
“…안녕하세요, 마왕님들.”
무서워 죽겠는 속마음과 달리 광대의 입에선 가느다란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기절할 만큼 거대한 드래곤이 잡아먹을 듯이 내려다보고 허공에 뜬 클랩은 식인귀처럼 정말 씹어 먹을 기세였지만.
일단 무대에 오른 광대는 굴하지 않고 공연에 임했다.
“퇴장할 시간이라서요.”
어깨에 얹힌 승지의 숨소리가 곱지 않았다. 대역은 용기를 내어 길쭉하게 늘어난 다리를 폈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
“어딜 도망가.”
서늘한 클랩의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내려왔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피부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보랏빛 얇은 얼음이 대역의 피부에 내려앉자 살이 물렁하게 내려앉으며 썩기 시작했다.
대역이 보여줄 수 있는 대담함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꺄아아아!”
기절할 듯이 놀란 대역이 몸을 돌려 미친 듯이 겅중겅중 뛰어가기 시작했다.
클랩이 곧바로 파르륵 천을 휘날리며 그를 따라 날아갔다.
“번태 아저씨이익! 빨리요!”
승지를 끌어안은 대역이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신의 심판자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대상에게 클랩이 아낌없이 저주를 퍼부었다.
정작 승지였을 땐 안전했는데 광대가 오자마자 위험해진 꼴이니.
대역이 눈물을 쏟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가 류의건의 옆에 있을 때부터 미리 대역의 위치를 잡아둔 번태가 이동하는 시간만큼만 기다리면 되니까.
콰르릉!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며 대역이 애타게 기다리던 대상이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나!”
“죽을 만큼요!”
대역이 비명을 지르며 승지부터 냅다 번태에게 떠넘겼다. 승지를 노리고 날아오던 클랩이 눈을 크게 떴다.
“네 놈!”
“만나서 반가웠다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일세!”
번태가 잽싸게 나타났던 만큼이나 빠르게 인벤토리 너머로 다시 몸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분노해 손을 치켜드는 클랩과 거리를 두기 위해 미리 두르고 있던 번개의 용을 아낌없이 방출했다.
“캬아악!”
클랩이 용 두 마리에 얽혀 뒤로 나가떨어졌다.
대역은 승지를 넘기자마자 황급히 태그매치를 취소하고 쪼끄만 성좌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작아진 광대가 얼른 승지의 품에 매달렸다.
“꽉 잡게!”
번태의 이동은 재빨랐지만 그래도 뒤에 있는 부르그골을 한 번 흘끗 돌아볼 시간은 있었다.
갑자기 인간이 나타나 난장판을 쳐놓는 걸 보면서도 그는 발톱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도망쳐도 언제든지 잡을 수 있다는 듯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우습군.”
후욱.
번태의 인벤토리 안으로 말려들어가면서도 광대는 뜨거운 드래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대들은 이미 너무 늦었다.”
쿠릉!
다시 한 번 천둥 번개가 시야를 가리듯 번쩍였다. 번태가 무사히 순간이동을 했다는 뜻이었다.
광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잠깐 세상이 압축되는 느낌을 받았다가 돌아온 느낌과 함께, 익숙한 승지의 세상이 다시 광대의 눈앞에 나타났다.
“받게!”
다급하게 인벤토리를 연 번태가 승지를 미리 기다리고 있던 류의건에게 던졌다.
광대의 친구 스킬 때문에 류의건에게 가있던 터라 강제로 이 상황을 알릴 수 밖에 없던 것이다.
그런데 번태가 던진 승지는 누가 받아주는 게 아니라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당탕!
“으잉?”
예상했던 소음이 아니라 당황한 번태가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그 짧은 이동의 순간에도 클랩이 그들에게 저주를 붙였던 것이다.
번태가 펄럭이며 저주와 싸우는 동안 광대가 승지의 품에서 굴러 나왔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 같은 사람이 둘이었다. 하나는 승지였고 또 하나는 류의건이었다.
승지가 난리친 페널티가 류의건에게 돌아갔으니 덩달아 쓰러져버린 것이다.
“스, 승지야!”
물론 광대의 눈에는 승지만 들어왔다.
허둥지둥 달려간 광대가 울컥 눈물을 쏟아냈다. 창백한 얼굴이 벌써 죽은 것만 같았다.
아까 태그매치로 싸우는 동안 힘을 거의 다 써버린 광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대역은 더 가릴 것도 없이 소리쳤다.
“광대의 축복!”
딱. 떼구르르.
곧장 나타난 거대한 주사위가 허공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자네…!”
광대가 흠칫했다. 저주를 떼어낸 번태가 분명히 허공에서 굴러가는 주사위를 보고 있었다.
흠칫한 그가 다급하게 변명을 쏟아냈다.
“아니에요! 저는 승지의 편이에요! 다나우처럼 성좌가 각성자의 스킬을 써서 나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만하게.”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번태가 손을 들어올렸다.
“변명하지 않아도 되니.”
“그, 치만….”
번태가 고개를 저었다. 진정하라는 눈빛에 간신히 광대가 울음을 삼켰다.
번태는 다소 낭패한 얼굴이었다.
“이런 것까지 하다니. 자네 그냥 평범한 광대가 아니었구만. 살아있었을 때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
광대가 시선을 피했다.
“그 다나우라는 성좌 때문인가?”
아니요, 저 때문이에요.
광대는 승지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는 주사위가 멈추기만을 기다렸다. 여기서 자신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오로지 승지만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