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도 아니면 개 (2)
원래 얼굴을 가리면 용감해진다지만.
난간을 밟은 블랙이 관객석의 호응을 유도하듯 양손을 흔들었다.
“자! 등장만 봐도 딱 그림 나온다 아닙니까? 오늘 우승은 내가 책임집니다! 그러니까 걸 놈들은 여기다가 전 재산 다 꼴아 박아!”
당당함을 넘어 건방진 발언이었다. 아예 복장까지 시커멓게 맞춘 모 팀의 팀원들이 블랙에게 박수까지 짝짝 쳤다.
성좌가 갸웃했다.
[걸어? 뭘 거는 데?]
“도박. 어떤 새끼들이 이걸로도 토토하냐?”
승지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스포츠 하면 토토라는 놈들이 있을 정도로 승패를 가지고 도박을 하는 행위는 만연했다.
전 재산 어쩌고 하는 걸 보니 백퍼센트 불법 도박이다. 거기까진 그냥 인생 조지는 인간 또 나왔나 싶었던 승지가 문득 되물었다.
“근데 저 자식 고등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냐?”
[응! 맞아!]
자신도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서슴지 않고 도박 운운하는 게 낯설었다.
방송사 드론과 달리 새카만 자기 전용 카메라도 끌고 다니는 걸 보니 어린 나이에 각성해서 떼돈 번 전형적인 케이스다.
알만하군.
승지를 따라하듯 성좌가 살래살래 대화창을 저었다.
[요즘은 애들이 더 무섭대잖아!]
“나랑 서너 살 차이 밖에 안 나거든.”
얼굴을 가린 뒤에야 파릇파릇한 나이라는 사실이 떠오르는 외모의 승지인 터라 성좌는 그냥 말을 아꼈다.
“자! 이로써 각 팀의 팀장이 모두 등장하였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에다 침을 튀였다. 원형 체육관의 각 지점마다 서있는 팀장의 복장 덕분에 확실히 눈에는 잘 띄었다.
[멋져! ☆점이 다섯 개니까 별을 그릴 수도 있겠어!☆]
정작 본인들은 심란하지만 어쨌든 펄럭이는 망토들은 멋있었다.
높이 서있던 번태의 노란 헬멧이 햇빛에 번쩍거리더니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럼 준비 팀! 경기장을 올려주시게!”
쿠우우웅. 방금 전까지 잔디밭이었던 체육관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아래 숨겨져 있던 윷판이 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지진?”
체육관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과 함께 동그랗게 생긴 발판이 육중한 크기로 상승했다.
정말 윷판처럼 모서리와 중앙의 발판은 크기가 컸고, 그 사이를 잇는 부분들은 약간 작았다.
공중에서 보면 정말 윷판처럼 보일 것이다.
저 미친 아재 같으니라고. 누가 이걸 하루 이틀 만에 준비를 해?
“아~~! 놀랍습니다! 대체 언제 이런 구조물을 만들어둔 것일까요?!”
사회자도 약간 당황해서 중계를 이어나갔다.
번태가 태연하게 설명했다.
“지금 보이는 발판은 헬바티아의 던전을 우리 연구 팀이 개조한 것이라네!”
[히에엑?!]
성좌는 기겁했지만 승지는 비로소 납득했다. 클랩의 성에서 썼던 체스판도 헬바티아 마왕이 만든 것이었던 것이다.
잠깐, 그럼 저기서도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는 소리잖아?
갑자기 승지의 시선이 매서워졌다.
몰랐으면 차라리 겁이 없지. 직접 경험해본 사람은 저게 얼마나 거지같은지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승지와 함께 겪었던 류의건과 유월의 눈빛도 달라졌다. 이 넓은 체육관에서 경험자는 그들뿐이었으니까.
눈이 왕방울만 해진 사회자가 마이크를 댄 채 물었다.
“던전이라니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각성자만 뽑아온 거 아니겠나! 게다가 우승 상품이 마왕의 무기이니 이보다 더 적절할 순 없지!”
“잠깐만, 그럼 어둑시니 길드에 너무 유리한 거 아니에요?”
이미 목적이 알러트 색출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블랙이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어차피 내 물건 아닌가! 하핫! 안 그래도 내 마음대로 무기를 상품에 내놓았다고 우리 길드원한테 엄청 깨졌다네! 그러니 좀 봐주게!”
번태가 뻔뻔하게 대답했다.
“자네들이 진정 실력이 있다면 그 정도는 문제없이 가져가겠지!”
“랭킹 1위가 말은 잘하십니다.”
투덜거리긴 해도 다들 적당히 납득하는 눈빛이었다. 어쨌든 팀장들은 사전에 알러트를 가리려고 행사를 열었다는 걸 알고 있는 입장이었다.
잠잠해진 틈을 타 번태가 사회자 대신 게임 규칙을 읊었다.
“규칙은 윷놀이와 똑같다네! 저 윷판을 한 바퀴 돌아 들어온 팀원이 많은 쪽이 승리일세!”
쿠궁.
기다렸다는 듯이 큰 기둥 쪽에서 문이 열리더니 튼튼한 계단이 내려왔다. 저 기둥이 윷판의 참이라는 뜻이다.
가장 팀원이 적은 승지가 물었다.
“팀원이 많은 쪽이라니? 먼저 팀이 다 들어오는 쪽이 이겨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응? 그러면 게임이 끝나지 않을 거 아닌가. 당연히 낙오자가 있을 테니 말이야!”
번태의 말에 비로소 팀원들은 윷판이 없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땅을 파서 만든 공간이 아닌 깊은 어둠이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젠장할, 꼴에 던전이라 이거지.
“물론 목숨엔 지장 없을 테니 걱정 말게!”
번태가 시원스레 소리쳤다. 훈련이랍시고 무작정 던전에 끌고 가는 인간다웠다.
공기에 긴장감이 흘렀다. 번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자에게 작은 신호탄을 던졌다.
“준비되면 발사하게, 사회자!”
“아, 예!”
덥석 신호탄을 받은 사회자는 간신히 생중계중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네! 세기에 남을 각성자 대 각성자 대결! 지금까지 몬스터에게만 쏟아져왔던 화력이 과연 어떤 식으로 발휘될지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회자 특유의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말이 터져 나왔다.
간이 문이 달린 난간 앞에서 최자림이 눈을 번쩍였다.
“빨리, 빨리, 빨리!”
흡사 짐승처럼 난간을 잡고 흔들어대는 망나니와 달리 오조희와 유월은 조심스럽게 서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어, 이번 시합에 승지 씨 소개로 나오시게 되었다면서요?”
“네.”
“저희 힘내요! 잘 부탁드려요!”
오조희가 열심히 응원한 순간 신호탄이 발사되었다.
타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팀원과 팀장을 가로막고 있던 난간이 동시에 벌컥 열렸다.
“출발이다아앗!”
“뛰어!”
수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흡사 모래 통에서 모래가 쏟아지는 모양새였다.
“크하하! 저희도 갑니다!”
최자림도 야수처럼 포효하며 훌쩍 뛰어내렸다. 관객석보다 높은 자리였는데도 번지점프라도 하듯 망설임이 없었다.
모두가 각성자였던 터라 출발하는 모습마저도 범상치 않았다.
날아가고 뛰어내리고, 순식간에 착지하는 사람들을 본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아!”
“아무나 이겨라!”
일반적인 스포츠와는 벌써부터 보는 맛이 달랐다.
번태가 스킬 제한을 하지 않았기에 벌써부터 정령을 소환하거나 스킬을 써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다섯 개의 입구에서 뛰어내린 각성자들은 하나같이 계단이 있는 쪽으로 달렸다.
일단 시작하기 위해선 저 판에 올라가야 했으니까.
최자림이 겅중겅중 뛰어가는 모습과 반대로 뒤이어 뛰어내린 유월은 물 위를 차는 수제비처럼 가볍고 우아하게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그 중에는 유월을 보고는 제풀에 깜짝 놀라서 길을 비켜주는 각성자도 많았다.
물을 가르듯 길을 만드는 형국이었다.
[바로 저길 따라가면 되겠다!]
누워서 떡먹기구만.
내려가려던 승지는 모기만한 소리를 들었다.
“스… 승지 씨! 저도요!”
“아. 맞다.”
꽤 이름이 알려진 오조희였지만 전투계 각성자에 비하면 비각성자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다른 각성자들처럼 뛰어내릴 수 없으니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볍게 그를 안아들고 내려가려던 승지가 멈칫했다.
안으면 좀 이상하려나.
[또 유월 생각하지! 바보!]
킁하고 자세를 바꾼 승지가 무릎을 숙였다.
“그냥 업혀라. 그게 빠르겠다.”
“네!”
오조희가 냉큼 목에 팔을 감았다. 각성자가 돼서 그런가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꺄앗! 다정해!]
“시끄럿.”
오조희는 자기보고 하는 소리인줄 알았는지 입을 합 다물었다. 굳이 오해를 풀기도 귀찮아진 승지는 그냥 그대로 뛰어내렸다.
“아~!! 빨라요, 빨라! 벌써 윷판에 오른 각성자가 둘이나 나왔습니다!”
윷판에 올라간 일등은 류의건이었다. 비행 스킬이 있던 터라 출발하자마자 일직선으로 내려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팀, 팀장님! 저희도 데려가주셔야죠!”
“류의건님!”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뒤에 처진 팀원들의 아우성에 류의건은 다시 뒤로 날아가 팀원을 하나씩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 다음으로 윷판에 오른 존재는 뜻밖에도 번태가 아니라 어둑시니 길드원이었다.
쾌속 스킬이 있는지 순식간에 미끄러져 윷판에 올라온 그는 올라와 놓고도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다 최대한 카메라에 얼굴이 나오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인 채 길드장을 소환하는 자세를 취했다.
콰과광!
번개가 내려치며 순식간에 번태가 윷판에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양쪽 옆구리에 어둑시니 길드원을 끼고 있던 번태가 씨익 웃었다. 그가 길드원을 내려놓자마자 팀 출발석에 있던 길드원 한 명이 똑같은 소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콰르릉!
또다시 순간이동한 번태가 말 그대로 광속으로 움직이며 길드원들을 윷판 위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콰릉! 콰르릉! 번쩍번쩍!
“아아앗! 둘, 넷, 여섯, 여덟…! 지금 말씀드리는 순간에도 개 팀이 속속들이 윷판에 도착하고 있습니다!”
“야잇, 저런 개…!”
[저건 완전 반칙이잖아!!]
사람 약 올리듯 번쩍거리는 꼴까지 아주 화룡점정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길드원을 옮겨놓은 번태가 여유롭게 윷판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새 체육관 절반 정도를 가로질러온 승지의 눈에는 커다란 기둥만 올려다 보일 정도였다.
[우리도 빨리 올라가자!]
그러나 쉽지 않았다. 계단 앞은 이미 몰려든 사람들로 난장판이었다. 기운차게 올라갔던 최자림은 사람에 꽉 끼어서 힘을 불끈 쓰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떨어지면 바로 탈락입니다!”
“그럼 밀지 마!”
류의건이 한 명씩 뽑아다가 옮기는데도 여전히 숫자가 많은 윷 팀과 걸 팀의 팀원들이 저마다 섞여서 누가 누구 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편 복장을 갖춰 입은 모 팀도 슬슬 부아가 치미는지 가득 몰린 자리를 힘으로 비워내기 시작했다.
“비켜, 비켜!”
“다쳐도 난 몰라!”
무작정 시커먼 복장을 입은 각성자들을 몰아대니 밀려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잠깐만! 꺄악!”
“이 새끼들이!?”
당연히 다른 각성자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무기부터 꺼내 들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지려는 찰나.
타악!
팽팽한 긴장감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유월이 그들의 어깨를 밟고 올라갔다.
“아얏?! 뭐야!”
“유, 유월?”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밟은 것보다 그 대상이 유월이라는 사실에 놀란 각성자들이 웅성거렸다. 유월이 짧게 눈인사를 보냈다.
“먼저 지나갑니다.”
“흐어…….”
슉슉 어깨를 밟고 넘어간 유월은 사람 사이에 낀 최자림을 붙잡고 쑥 뽑아내기까지 했다.
“크핫, 감사합니다!”
“올라가요.”
사람이 아니라 벽을 상대하는 태도에 기가 막혀할 틈도 없이 유월은 한 발, 한 발 가볍게 그들을 짓밟고 올라갔다. 최자림이 킥킥거리며 그 뒤를 쫓아갈 때는 아예 곡소리가 났다.
“아이고 내 어깨!”
“거 좀 빌립시다!”
[우와아 요정 같아!]
역시, 유월이다.
승지가 혼자 흐뭇해 하는데 성좌가 짓궂게 덧붙였다.
[던전에서 본 요정들도 딱 저렇게 사람 잡지 않았어?]
그쪽이냐고.
어쨌든 사람 홀리는 광경은 기둥 위로 올라갔으니 이젠 제 차례다. 팀원 둘이 올라갔으니 벌써 팀 절반을 올려놓은 셈이다.
개 이득.
승지가 딱 제 몸 건사해서 올라가려던 찰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빨간 그가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저것 좀 봐. 저거 도팀 팀장 아니야?”
“맞네. 빨간 쫄쫄이.”
단순히 신기한 걸 본 반응이 아니라 경계심이 물씬 배어나오는 말투였다.
“날 잡아보시겠다?”
다른 각성자들이 대답 대신 슬금슬금 무기를 꼬나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