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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의문의 호구 (2)

갑자기 주변이 술렁거렸다.

“무슨 일인데 그 류의건이 저렇게 시선을 피해?”

“아까 저 사람한테 택시비도 내주고 음료수도 사주던데?”

“혹시?”

의심의 시선이 승지를 향했다.

개망나니처럼 생긴 승지가 일방적으로 류의건을 뜯어먹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죄인처럼 구는 류의건의 태도까지 의심에 부채질을 했다.

“설마 대출이라도 했나…?”

“에이! 말도 안 돼.”

“그럼 류의건이 저렇게 나올 이유가 뭐야…. 헉, 혹시 협박?”

“맞네, 맞아. 깡패처럼 생겼잖아.”

바로 소설 한 편 써내려가는 수군거림에 승지가 기겁했다.

아니! 이 분위기 뭐냐고!

승지가 급하게 탁자를 탕 내리쳤다.

“아! 아아! 그 고블린 토벌전 때 말하는 거죠!”

“…예.”

일부러 큰 소리를 낸 승지를 보며 의건이 의아한지 크게 눈을 떴다.

빨리 장단 맞춰, 이놈아. 나 욕먹잖아.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욕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던 승지가 갑자기 엑스트라처럼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몇 회였지? 200회였나? 아무튼 고블린 토벌전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어마무시한 괴물이 나타나서 정말 깜짝 놀랐죠! 아! 하! 핫!”

이제 류의건은 아주 미친놈 보듯이 승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옘병!

“다행히 류의건 씨가 나타나서 물리쳐주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지! 하! 하! 정말 대애단 하네요!”

[승지야, 그러다 어금니 부러지겠어.]

보기 딱한지 성좌가 절레절레 상태창을 흔들었다.

다행히 승지의 갑작스런 설명에도 의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 때 나타난 보스 몬스터 때문에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려 다친 것 때문에 사과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뭐 어쩌다 나타난 거 가지고 사과까지 합니까?”

“아니요. 그 날 일은 제 잘못입니다.”

류의건이 묵직하게 분위기를 잡았다.

“본래 영웅급 성좌는 이세계에서도 적이 많습니다. 때문에 현실로 넘어온 뒤에도 그들을 없애려고 하는 몬스터가 나타나게 됩니다.”

단순히 몬스터가 나타나는 거랑 다른가?

승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류의건이 말을 이었다.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단순히 이세계와 현실이 충돌해서 넘어오는 몬스터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현실에 범접할 수 있는 몬스터가 있습니다.”

마왕이겠군.

“다행히 제 성좌가 강한 힘을 갖고 있기에 바로 그들이 나타나는 건 막을 수 있지만, 제가 가는 곳마다 과하게 강한 몬스터가 나타나곤 합니다.”

저번에 킹고블린 얘기군.

“그때도… 제가 토벌전에 참가하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돕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까지 휘말린 겁니다.”

대충 무슨 얘긴진 알겠다.

그러니까 이 착해빠진 랭킹 2위는 본인이 쓸어버린 토벌전에서 본인이 쓸어버린 보스몹 때문에 혹시라도 휘말렸을까봐 사과를 하러 다닌다는 소리다.

와…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메리카노랑 키위 스무디 나왔습니다!”

“거 앉아 계세요.”

바로 일어나려는 류의건을 제지한 승지가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라도 안하면 숨이 막혀서 대놓고 한숨을 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저렇게 소심한 인간이 다 있냐.

류의건은 태어나길 금수저에, 외모 수저, 집안 수저 다 받고 성좌 수저까지 알차게 다 챙긴 놈이다.

현실까지 적이 따라올 만큼 능력이 출중한 성좌니 얼마나 강하겠어?

그런데 그 좋은 능력을 갖고도 고작 이런 일에 시간을 쓴다니.

왜 랭킹 2위에 머물러있는지 알만하다.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랭킹 1위는 바로 씹어 먹고 세계 1위도 가능할 놈이 저러고 있네.

타악.

거대한 키위 스무디와 아메리카노를 내려놓으며 승지가 다시 의건을 관찰했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냉정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데. 반대로 순진하게 구니 좀 이상했다.

외모랑 성격은 별갠가?

“그럼 정말 사과하려고 삼천만원이나 써가며 날 부른 겁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한테 다 준 거예요?”

“아니요. 당신은 다릅니다.”

“왜죠?”

“맞았으니까요.”

쭉 잘 넘어오던 키위 스무디가 크헉하고 목에 걸렸다.

“괜찮습니까?”

“예, 뭐.”

승지가 손등으로 턱을 문질렀다.

젠장, 맞다. 이놈은 내가 처음으로 각성자랑 싸웠을 때 봤지.

그 흉측한 몰골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니 갑자기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동네 창피하게시리.

심지어 그냥 맞은 것도 아니고 너저분한 광대 분장을 했을 때였다.

“……별 걸 다 기억하시네. 어차피 그건 당신한테 맞은 것도 아니고 보스몹한테 맞은 것도 아닌데 상관없잖아요?”

“저 때문에 보스몹이 나타났고, 그래서 당신을 때린 각성자가 도망쳤으며, 당신이 폭력적인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오오, 설득력 있어!]

설득력이 있긴 개뿔.

승지가 삐딱한 표정으로 빨대를 씹었다.

“너무 비약 아닙니까? 세상일이 다 당신 탓이에요?”

“……적어도 원인 제공은 제가 맞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의건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머리 들어요!”

겁나게 불편하니까!

대역 죄인처럼 구는 류의건 때문에 승지한테 눈총이 쏠렸다.

얘는 또 왜 이렇게 깍듯한 거야?

양아치같이 구는 놈만 상대하다가 갑자기 정중하고 예의바른 자식을 만나니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제길, 이러면 나도 공손해야 하잖아.

입 안에 가시가 돋는 기분으로 승지가 어렵게 바르고 고운 말을 짜냈다.

“사과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일일이 사과하는 게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더 귀찮다고요. 하지 마세요.”

승지가 단호하게 잘랐다.

“별로 대단한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 자기 탓하는 게 더 별롭니다. 혹시 당신이 시간이라도 바꿔서 그 뭐냐, 원래는 안 그랬는데 변하는 게 뭐였지….”

[인과율!]

“그래, 그거. 무슨 인과율이라도 조정하는 능력자 아니면 전부 본인 탓이라는 희한한 생각 좀 하지 마시죠.”

류의건이 약간 멍하게 승지를 바라보았다.

“…시간을 바꾸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럼 됐네.”

승지가 쪼로록 키위 스무디를 빨았다.

“능력도 대단한 사람이면 좀 주인공답게 살아요. 당신이 사과 한 번 할 시간에 사람 하나 더 구하는 게 이득이겠구만.”

“…….”

그때 류의건의 머리 위에 있던 숫자가 바뀌었다.

[ 357091 -> 356062 ]

[앗! 페널티가 내려갔어!]

성좌와 동시에 승지도 목격했다.

페널티가 바로 천이나 사라졌네?

겨우 사과 한 번에 저만큼 내려갈 정도면 사실 페널티도 별 거 아닌가?

류의건은 갑자기 어깨가 가벼워진 사람처럼 말문이 막혀있었다.

음. 페널티 천이 사라지면 그럴 만도 하지.

혼자 납득한 승지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어쨌든 이 무기는 당신이 삼천만원에 산다고 했으니까 그냥 평범한 거래로 돈만 받겠습니다. 계좌 불러줘요?”

“……아.”

잠깐 멈춰있던 의건이 갑자기 허둥지둥 움직였다.

“아, 아닙니다. 정말 무기를 사려고 했던 게 아니라 사과를 하려고 했던 거라 그냥 받아주십시오.”

“사과는 됐다니까 그러시네. 그러면 삼천만원에 팔 테니까 나한테 만원만 받고 다시 팔아요.”

[우와, 양아치.]

시끄러. 사과한답시고 던져주는 돈보다는 삥 뜯는 게 낫잖아. 어쨌든 본인이 내겠다고 한 돈이고 말이다.

뻔뻔한 승지의 요구에도 류의건은 금세 지갑을 열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택시비랑 음료수 값도 줘야 될 금액에서 빼시고요. 얻어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삼천만원에서 만원 빼고 택시비 빼고 음료수 값 빼면 얼마지.

으음. 이천 구백 구십….

승지가 안 돌아가는 머리로 열심히 암산을 해보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창밖에서 거대한 확성기가 울렸다.

“채~~~승지~~~씨~~~~!!!”

이게 뭔 소리야.

승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삐이익!

확성기 특유의 소리와 함께 쩌렁쩌렁한 성량이 터져 나왔다.

“당장~~ 차에 타세요~~~!!”

[우와아!! 저게 뭐야!]

“저 미친놈들이!”

기절할 만큼 놀란 승지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바깥의 도로에서 폭주하며 내달리는 차 밖으로 최자림과 서명구가 몸을 내밀고 있었다.

“각성자님 제발! 악! 으악! 차 세우고 부르세요! 앞에! 앞에에에!!!!!”

위태롭게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최자림이 빠아앙 경적을 울리는 트럭을 간발의 차이로 비껴갔다.

수명을 십 년 잃어버린 명구가 창백하게 조수석의 문을 꽉 붙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자림은 상체를 거의 반이나 내밀고 계속 확성기에다 대고 소리쳤다.

“당신은~~ 포위 되었다~~~!! 빨리 나오시죠~~!!”

[마,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사고 나겠어!]

성좌가 조급하게 상태창을 띄웠다.

포위는 무슨. 저거 완전 또라이 아냐?

살면서 별꼴을 다 본 천하의 승지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엔 벙 찔 수밖에 없었다.

미스핏 길드가 자기 뒤를 쫓아왔는데 그딴 것보다 추격자가 대형 사고를 칠까봐 겁난다니.

끼기긱하고 가게 앞을 지나쳐갔던 최자림의 차가 거칠게 드리프트를 꺾었다.

“자아~~! 다시 한번~~ 말씀 드립니다~~! 채승지 각성자님은~~ 당장~~나오세요~!!!”

콘서트라도 하는 것처럼 여유롭게 핸들링을 해가며 후진한 최자림이 입으로 효과음까지 넣었다.

“빠라바라바라바바밤~. 지금 후진 기어 넣었습니다~~! 빨리 타세요~~.”

“가, 가, 각성자님 살려주세요!!!”

“무슨 일입니까?”

기가 막혀서 사고가 정지한 승지의 뒤로 류의건이 다가왔다.

하긴 저렇게 고래고래 이름을 불러대니 모른 체 할 수도 없었을 거다.

“혹시 문제가 생긴 거라면 제가 돕겠습니다.”

류의건이 나름 정의롭게 나섰지만, 승지는 그저 황망했다.

시발 엮이고 싶지 않아.

“…그냥 모른 척 하세요.”

승지가 그대로 튈 준비를 했다.

차라리 내 발로 미스핏 길드로 돌아가고 말지 저렇게 쪽팔리게 돌아가긴 싫었다.

아니, 처음부터 미스핏 길드로 돌아갈 생각이었다고!

그러나 상대는 이성적인 대화가 씨알도 먹히지 않을 관종이다.

승지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걸 또 매의 눈으로 발견한 최자림이 벌컥 차문을 열었다.

“어어?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쿵짜작 쿵짝~~!!”

“끼야악!!!! 최자림 씨!!!!”

최자림이 갑자기 차에서 뛰어내렸다.

입에 거품을 문 명구가 홱 돌아가는 운전대를 붙잡았다.

끼이이익!

급커브를 그린 차가 벽으로 돌진하는 동안 사뿐히 도로에 착지한 최자림이 씨익 웃었다.

시, 시발, 오지 마.

주춤거리던 승지가 아직도 근처에 어슬렁거리는 류의건을 밀쳤다.

“비켜요!”

채승지가 재빨리 도주했다.

“거기 서랏!!!”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낸 최자림이 단거리 경주 자세로 쫓아오기 시작했다.

[엄청 빠르다!]

“젠장! 저것도 각성자라고!”

지은 죄도 없는데 가슴이 서늘해진 승지가 마구 프레임 컨트롤을 갈겼다.

그러나 압도적인 속도로 도망가는 승지에도 불구하고 최자림의 추격은 끈질겼다.

“채승지 각성자님~~! 어딜 가세요~!!”

“이름 좀 그만 불러! 하, 흑…! 먹고 바로 뛰어서 옆구리가…!”

키위 스무디의 신맛이 입으로 마구 용솟음쳤다.

죽을 것 같아진 승지가 허리를 붙잡고 힘겹게 다리를 움직였다.

[승지야! 여기서 느려지면 안 돼!]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 헉…!”

“잡았다으아!”

공중에 붕 뜬 최자림이 화려하게 승지의 등을 덮쳤다.

쿠당탕!

그대로 바닥에 나뒹군 승지의 등으로 팔을 꺾으며 최자림이 소리쳤다.

“자아 채승지 씨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변호사를 선임하셔도 됩니다!”

“뭐냐고 대체! 당신 경찰이야?”

“아뇨! 이 대사를 꼭 해보고 싶었거든요! 영화 같죠? 그쵸?”

개운하게 활짝 웃는 최자림을 보며 승지는 처음으로 광기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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