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즐거운 나의 집 (6)
랭커들이 엉덩이에 불침을 맞은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뭐라고!?”
“지금 장난쳐?”
성미가 급한 자는 한 판 붙으려는 것처럼 승지의 멱살까지 잡으려고 들었다.
“우리가 우습게 보이냐? 어?”
“잡았다고 해서 잡았다고 했을 뿐인데?”
승지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쳐볼 테면 쳐보라는 듯 오히려 목을 더 뻣뻣하게 치켜들었다.
“때릴 거 아니면 이 손 놓지?”
“이…! 뻔뻔한 게!”
“자자. 다들 진정하라고. 채승지 각성자가 마왕을 잡은 건 내 눈으로 목격한 사실이니까.”
번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승지와 그 각성자를 떼어놓았다.
“마왕을 벌써 잡았다뇨, 길드장. 이거 다 농담입니까?”
“아닐세. 내 어둑시니 길드랑 류의건, 청월량, 미스핏 길드가 합작해서 잡았다네.”
아무래도 승지 혼자 마왕에게 결정타를 먹였다고 하면 지나치게 이목이 쏠릴 걸 걱정했는지 번태가 에둘러 말했다.
“뭣하면 직접 물어보지 그러나?”
번태가 턱짓으로 유청을 가리켰다. 입 닥치고 있다가 졸지에 시선이 쏠린 유청은 진작 도망갈 걸하고 후회했다.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감싼 유청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청월량 길드는 노코멘트입니다.”
“안 어울리게 문자 쓰지 마, 짜식아.”
“…….”
승지의 험악한 말에도 유청은 차마 욕을 할 수가 없어 눈만 돌렸다.
“허어. 쟤가 저렇게 참을 줄도 아는 애였어?”
“어쨌든 완전히 놀아났군요. 이미 끝난 걸로 계약을 트다니.”
처음의 충격이 가시고 나자 랭커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속았다는 느낌에 불쾌하지만 당장이라도 마왕이 나타나진 않는다니 걱정이 사라져 허탈해진 것이다.
승지가 일부러 보상금이 아닌 자유를 보장해달라는 계약을 건 것도 굳이 랭커들을 털어먹고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어서였다.
“어차피 이젠 서로 신경 쓰지 않고 좋잖아? 입단속만 잘 하라고.”
“신입 신고식 치고는 과했어.”
“나중에 미션 할 때 보자. 빨간 머리.”
“다음부턴 이런 일로 부르지 마십쇼, 길드장.”
“미안하네!”
승지에게 핀잔을 보내거나 이를 가는 랭커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이제 승지의 존재를 제대로 각인한 셈이 되었다.
머리회전이 빠른 랭커는 승지가 그들을 속였다는 사실보다 벌써 길드장들과 친분이 있고 마왕을 함께 잡는 실력자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런 몇 명은 승지에게 명함을 주고 가기도 했다.
[역시 우리 승지는 인기가 많다니까!]
협박과 계약으로 얻어낸 인기라도 말이지.
승지는 대충 받아놓은 명함을 인벤토리 아무데나 던져놓았다.
“그리고 니들은 남아.”
승지가 떠나는 랭커들 속에서 박편호, 김정진, 이연주 길드장들을 지목했다.
“그리고 너도.”
은근슬쩍 랭커들에 묻혀 빠져나가려던 유청도 승지가 골라잡았다.
“정산할 시간이다.”
[음하하!]
“…정말 무어라 할 말이 없군.”
“그 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네!”
“마왕을 잡아버릴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런데 정말 어떻게 잡았죠?”
“…….”
승지는 나란히 네 사람을 무릎 꿇렸다. 유청은 정말이지 회의에 괜히 왔다고 구십구 번 째 후회하고 있었다.
승지가 깔끔하게 말을 잘랐다.
“다 필요 없고, 난 사과는 돈으로만 받는다.”
“……!”
움찔한 그들은 아깝긴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는지 빠르게 표정을 바꿨다.
“얼마나 드리면 되죠?”
“그래. 차라리 돈 주고 깔끔하게 끝내세!”
길드장들이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하긴 돈이야 그들도 각성자니 썩어나게 많을 테지.
그래서는 내가 뺏어가도 별로 괴롭지 않잖아?
승지가 사악하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유청.”
“…왜 그러십니까.”
“네가 결정해. 저 놈들이 나한테 뭘 얼마나 줄지.”
“!”
길드장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이 되었다. 유청은 그래도 그들과 친하게 지냈으니 봐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단, 뜯어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시 보증 받은 것 중에서 하나 깐다.”
유청이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것과 달리 길드장들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껌벅였다. 그들이 담보로 류의건의 팔다리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류의건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굳이 사실을 알려주진 않았다. 어쨌든 지금은 승지의 선에서 해결할 문제였으니까.
“대신 내가 만족하면 까는 게 아니라 없던 걸로 해줄게.”
“……!”
유청의 안광이 번쩍거렸다.
팔 하나, 다리 두 개가 담보로 걸려있는 상태에서 하나가 빠진다고 해도 큰 차이는 아니지만, 중요한 건 발전 가능성이다.
하나가 사라지면 셋도 사라진다.
언젠간 담보로 잡혀있는 류의건의 팔다리가 모두 해방되면 더 이상 승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해보겠습니다.”
유청이 결연하게 말했다.
이런 걸 채찍과 당근이라고 하던가.
뭐, 나머지는 저 악독한 놈이 알아서 잘 해줄 거다.
[크으! 맞아! 유청 독한 건 내가 알고 승지가 알고 세상이 알지!]
어디 제 편한테 조져지는 기분을 맛보시지.
영문을 모르는 길드장들에게 유청이 질척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음산한 게 아주 저승사자 같았다.
“유, 유청 자네?”
“쉽게 동의하는 게 빠를 겁니다.”
“어억…!”
“자, 그럼 난 각성자 재등록이나 하러 가보실까.”
기분이 좋아진 승지가 휘파람을 불었다.
* * *
각성자 관리소.
다시 올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한 곳에 두 번 들어가려니 기분이 묘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낭랑한 목소리가 처음과 똑같이 울려퍼졌다. 승지는 그 때처럼 다시 각성자 등록을 하러 왔다고 밝혔다.
“키오스크에선 등록 안 될 거라, 미리 서류 작성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머. 그러신가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접수원은 각성자 등록에 능숙해 보이는 승지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서류를 가지러 사라졌다.
그동안 승지는 느긋하게 주위에 있는 랭커들의 활약상이 담긴 홀로그램을 구경했다.
[어! 저 사람 오조희잖아!]
“뭐? 어디?”
[저기, 저기! 벽에 있는 TV에서 인터뷰 영상 따로 나오잖아!]
“쟤가 벌써 저런 데를 나와?”
승지도 다소 놀랐다. 글라세로 토벌전에서 오조희와 헤어진 뒤로 두 달 정도 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그 때까지만 해도 작은 코스모스 센터에서 각성자들을 다루느라 쩔쩔맸었는데.
호기심이 생긴 승지가 인터뷰 영상 쪽으로 다가갔다.
“오늘은 이례적으로 각성자 지휘로 명성이 높아지신 오조희 선생님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오조희는 화면 속에서도 현실과 다르지 않게 보였다. 좀 긴장한 것 같긴 하네.
“오조희 선생님은 최초로 각성자의 스탯이 지능에 미치는 영향을 발견하셨죠?”
“지능이라고 하면 조금 지나친 표현이구요. 각성한 후의 스탯과 성좌와의 소통이 치료에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현대 의학으로선 완치할 수 없던 자폐증, 발달 장애가 각성한 이후로 나아졌다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네. 지금은 센터 소속이었던 각성자들이 모두 독립하여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이 쓸쓸하시겠어요. 센터에 혼자 남으시면 말입니다.”
“그렇기도 하지만… 지금은 많은 길드가 제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어 오히려 전보다 더 바빠졌답니다.”
“하긴 오조희 선생님의 지휘 스킬은 일반인들에게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게 밝혀졌죠.”
오조희가 무어라 말하려는 듯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와아! 엄청 잘 나가잖아!]
성좌가 마냥 신기한지 대화창을 띠롱 띄웠다.
“그러고 보니 각성한 뒤로 나도 몸이 엄청 좋아졌지.”
승지도 탄탄한 자신의 배를 만져보았다. 아무리 평소에 일하고 운동을 좀 했었다지만, 게임만 하던 시절하고는 비교가 안 됐다.
각성한 뒤로는 스탯을 얻으면 바로바로 몸에 표시가 났다.
스탯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근육까지 다 사라지는 거 아냐, 이거?
오조희의 인터뷰도 그렇고 자신의 몸도 그렇고. 각성자가 된 건 역시 최고의 행운이었다.
곧 접수 직원도 서류를 가지고 돌아왔다. 승지는 빠르게 서류를 작성했다.
단, 이번에는 페널티 관련 스킬이나 완벽한 콤보는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러 일이 있다 보니 자연스레 조심하게 된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친절한 접수 직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혹시 저번에도 등록하러 오지 않으셨어요? 언뜻 보았던 기억이….”
“아, 예. 기억력 좋으시네요.”
“어머나! 맞네요! 그런데 왜 다시 등록하시게 된 건가요?”
“여러 사정이 있어서요.”
말하고 싶지 않다는 걸 눈치 챘는지 접수 직원이 다시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직원이 승지의 서류를 등록하기 무섭게 상태창이 떴다.
[ 새로운 각성자가 랭킹에 진입하였습니다! ]
“엇.”
[어어! 이렇게 빨리?!]
성좌와 승지가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하긴 각성자 등록이라는 것도 성좌신에게 승지의 이름을 다시 알려주는 거니까! 바로 나올만해!]
성좌가 열심히 떠들었다.
그럼 이제 내 랭킹이 나오는 건가.
가슴이 좀 두근거렸다.
띠링!
[ 랭킹 18위! 채승지! ]
“와, 씁.”
승지가 단숨에 상승한 숫자를 보고 숨을 삼켰다.
각성 초기에는 얼마나 바닥에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대한민국 각성자 중에서 18명 안에 들었다. 살면서 50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데!
[꺄아악 너무 축하해 승지야!]
[18위! 무려 18위!]
[대한민국 탑 찍는 것도 금방이겠어!]
물론 성좌도 난리법석을 떨며 축포를 쏘아댔다. 승지도 이번에는 눈 아프다면서 현란한 빛을 끄라고 하지 않았다.
축하받고 싶었으니까.
“나쁘지 않네.”
승지가 슬쩍 웃었다. 그리고 진짜로 나쁘지 않은 건 그 뒤였다.
“여깁니다.”
반짝반짝반짝.
승지는 한강에 반사되어 빛나는 잔물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강 뷰다.
전망 끝내주는 한강 뷰 아파트. 52평. 로얄층.
그것도 옆에 백화점을 낀 초 역세권, 환상적인 입지였다.
안에 들어오고도 믿기지 않아 잠시 정신을 외출시킨 승지가 연거푸 되물었다.
“이걸 받았다고?”
유청이 끄덕였다. 얼마나 독기를 불태웠는지 동공이 시커맸다.
“원래 커넥트 길드장이 살던 집입니다. 이번 일로 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커헉…. 그럼 살던 집을 뺏은 거야?!]
성좌가 기겁할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와, 그 커넥트 길드장 놈이 거하게 해먹었나보네. 무슨 집이 이렇게 좋냐.
근데 설마 이렇게까지 받을 줄이야.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갈군 거야?
눈 밑이 퀭한 유청은 혹시라도 승지가 부족하다고 생각할까봐 겁나는지 급하게 중얼거렸다.
“이것보다 더 받아내긴 힘들었습니다. 일단 세 길드장이 합의한 결과는 이렇고 따로 길드에 방문했을 때 최대한 편의를 봐주기로도 했습니다.”
“어어, 그래.”
야, 설마 이게 부족하겠냐. 쟨 대체 날 얼마나 쓰레기로 보는 거야?
지금 받은 것도 솔직히 상상 이상으로 잘 받아왔다.
하지만 굳이 칭찬해줄 필요는 없던 승지는 무심하게 받았다.
“이정도면 됐어. 약속대로 보증 하나 없애준다.”
“예.”
그제야 살짝 생기가 돈 유청이 비틀비틀 돌아갔다. 아마 쌩 돈, 아니 쌩 집을 뜯긴 다른 길드장은 더 상태가 심각하지 않을까.
[꺄아! 그럼 정말 여기가 이제부터 우리 집인 거야 승지야?!]
“그래! 우리 집이다!”
승지의 입이 비로소 쭉 찢어졌다.
집이 생기다니! 진짜 내 명의, 내 아파트라니!
마침내 현실로 돌아온 보람이 이토록 절절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다.
“다 벌었다 씨바! 이세계 ㅈ까라 그래! 우하하!”
어느 때보다도 이세계 복구를 하고 싶어진 승지가 크게 웃어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