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갑자기 분위기 친선전 (2)
“왜 뜸을 들이는 거죠?”
채승지와 김정진의 대련을 보고 있던 이연주가 물었다.
시작한 뒤로 바로 부딪칠 것 같던 두 사람은 생각보다 오래 대치하고 있었다.
“채천 길드장이라면 금방 끝낼 줄 알았는데요.”
“흥, 고지식한 양반이라 정말 받아주려는 모양이지. 저거 뭐 볼 실력이 있다고.”
박편호가 코웃음을 쳤다.
“하얀 길드장 자네는 직접 상태창까지 봐놓고 구경할 마음이 드나? 딱 봐도 허세잖아, 허세!”
“하긴 스탯이며 성좌며 형편없었죠. 아무리 갓 각성했다지만 어떻게 던전에서 살아나왔나 믿기지 않을 만큼.”
“에잉. 스킬까지 볼 수 있었으면 확실하게 전력 외로 뺐을 텐데. 유청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움직이는 게 이상합니다.”
“응? 저 각성자가?”
“아니오. 채천 길드장의….”
유청의 말끝이 흐려졌다. 드디어 두 사람이 다시 맞붙기 시작한 것이다.
약속대로 첫수를 허락한 김정진은 그대로 목검을 휘둘렀다. 그야말로 정석적인 자세로, 막고 들어 올리고 다시 내려가는 동작 하나 하나가 완벽했다.
그러나 첫 타에 맞고 나뒹굴 줄 알았던 채승지가 의외로 무사했다.
아무리 목검이더라도 김정진의 힘 스탯은 32였다. 일반인을 상대로라면 새끼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두개골이 깨질 수 있었다.
즉 저렇게 멀쩡하게 뛰어다니려면 아직 한 대도 맞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른 길드장들은 투덜거리기만 바빠 둘의 대련을 자세히 보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유청만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니, 한 사람 더 있다.
처음엔 몹시 걱정스럽게 대련을 지켜보던 류의건의 표정이 확 변해있었다. 그도 눈치 챈 것이다.
채승지의 움직임은 단순히 순발력이라고는 표현할 수 없을 수준이라는 걸.
“아닛…!”
벌써 몇 번이나 침입을 허락한 김정진이 당황한 얼굴로 목검을 내리쳤다.
그러나 절대로 빗나가지 않을 거리에서 귀 옆으로 떨어진 검의 궤적을 보고난 뒤에도 상황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시간을 바꾸는 스킬을 가진 건가!”
“아닌데.”
급하게 거리를 두려는 김정진에게 채승지가 바로 따라붙었다.
“그렇다면 이 움직임은 뭔가! 자네뿐만이 아니라 나까지 느려지는 이…!”
따악!
거짓말처럼 잡힌 목검이 부르르 떨렸다. 채승지는 손바닥이 부러지는 대신 멈춰있는 막대를 잡듯 평온하게 목검을 붙잡았다.
웬만한 각성자들과 싸울 때도 검을 직접적으로 받아낸 자는 드물었다.
하물며 저런 애송이한테…!
울그락불그락 바뀌어가는 김정진을 본 채승지가 슬쩍 말했다.
“미리 알려두는데 당신한테 뭘 조작한 건 맞아.”
“이 놈!”
“하지만 완전히 꼼짝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 말대로 정말 시간을 조정했다면 완전히 정지시켜놓고 패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따금씩 자신의 신체에 가해지는 강한 위화감과 압박만 아니었더라면 평소와 다른 점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김정진은 몇 번 더 목검을 휘둘러보고 확신했다.
무슨 스킬인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포착만 해내면 원래 속도로 되돌릴 수 있다.
순간적이지만 몬스터를 상대할 때처럼 힘을 가하니 원래 의도했던 속도대로 몸이 움직였다.
김정진의 눈이 가라앉았다.
스킬이 걸린 부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오히려 적에게 빈틈을 보이게 될 테지만. 그래봤자 잔재주!
이미 그의 몸은 변화하는 속도에 적응하고 있었다.
“그만 끝내겠다!”
김정진이 목검을 틀자 지금까지 느슨하게 받아주던 태도가 급변했다.
아까부터 자잘하게 들어오던 공격을 보아할 때 채승지에게 제대로 된 공격 스킬은 없는 게 분명했다.
따로 기가 모이는 느낌도 없었으니.
거리를 벌린 김정진이 스킬 일도양단을 준비했다.
아무도 검을 쓰는 자가 원거리로 공격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 준비 자세만 보고 방심하는 대표적인 스킬이었다.
미리 스킬을 본 적이 있거나 자신처럼 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자가 아니면 절대로 피하지 못했다.
채승지도 멀뚱멀뚱하게 서 있는 걸 보니 간파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심판을 보던 류의건의 안색이 바뀌었으나, 김정진은 그 전에 스킬을 날려버렸다.
일도양단!
바람이 갈리고 공기가 쐐기처럼 압축되어 날아간다.
적에게 닿기도 전에 채승지의 이마가 먼저 드러났다. 거세게 쇄도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데도 그는 똑바로 김정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피하지 않는 건가?
만약 이대로 채승지가 죽게 되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다.
김정진이 스킬을 취소할까 고민하던 순간.
콰아앙!
지축을 뒤흔들며 거대한 음파가 퍼져나갔다.
급하게 끼어든 심판인 류의건의 검에 막힌 일도양단이 회오리가 되어 흩어졌던 것이다.
“마… 맙소사!”
입을 헤 벌리고 구경하고 있던 최자림이 마이크에 침을 튀겼다.
“방금 보셨습니까, 여러분! 류의건 씨가 끼어든 이 순간!! 승부가 결정되고야 말았습니다!!!”
류의건은 당혹스럽게 검을 내렸다. 자신이 승부를 방해해서가 아니라 눈앞의 광경을 더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최자림이 마이크를 휘두른 방향에서 김정진이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승자는!! 채~~승지~~~!!”
[와아아아아아!]
백 명의 환호를 대신하듯 승지의 성좌가 요란하게 상태창에서 춤을 춰댔다.
[꺄아아! 승지야!!! 우리가 이겼어어!! ٩(๑˃̵ᴗ˂̵)و]
이겼다고 그새 이모티콘을 쓰냐. 어쩐지 못 본 사이 좀 발전한 것 같지만 기분 좋으니 봐준다.
승지도 얼떨떨하게 주먹을 만져보는 사이 김정진이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바, 방금 자네 무슨 짓을 한 건가?”
김정진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대차게 얻어맞은 김정진의 턱이 팅팅 부어가고 있었지만, 그는 아픔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파고든 승지가 그를 말 그대로 날려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공중으로.
“그 말도 안 되는 기의 흐름은…!”
“기? 당신. 도 믿어?”
“잡아 뗄 생각 말게! 분명 소류겐…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니익! 그런 적 없어!”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오른 승지가 황급히 부정했다.
젠장.
새로 얻은 스킬은 다 좋은데 쪽이 팔렸다.
30콤보를 성공해 얻은 스킬인 ‘예스 커맨더’.
그건 격투 게임에서 커맨드를 입력하면 스킬이 나가듯 현실에서도 특정한 행동을 입력하면 필살기가 나가는 스킬이었다.
문제는 콤보가 발동이 되면 게임 캐릭터와 움직임이 똑같이 변하는데다가, 스킬이름까지 똑같이 소리로 튀어나갔다.
다행히 방금 전에는 류의건이 공격을 막는 소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묻혔지만, 어디 가서 함부로 쓰기엔 쪽팔렸다.
게다가 승룡권도 아니고 소류겐이라니.
아무리 일본에서 만들어진 게임이라도 한국 사람이 일본 말로 소리치려니 매국노가 된 기분이다.
물론 어차피 다른 스킬도 영어긴 한데….
한국 사람은 그냥 한국말 쓰게 해줘, 젠장.
복잡한 심경이 된 승지의 속도 모르고 김정진이 계속 캐물었다.
“사실 무술을 배웠던 건가? 아니, 아니야. 자네 움직임은 분명히 아무것도 모르는 무뢰배에 가까웠어!”
“거 참.”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
양아치처럼 누구를 패고 다닌 적도 없으니 당연히 공격이 어설플 수밖에.
[하! 패배자 주제에 저런 건방진 눈빛이라니! 승지야! 다시 한 번 본때를 보여줘!]
얘는 또 왜 이렇게 흥분했냐.
승지가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튼 이번 승부는 내가 이긴 거 맞지?”
“허…!”
꼭 도깨비에라도 홀린 것처럼 올려다보던 김정진이 승지의 손을 뿌리쳤다.
비틀비틀 일어나는 모습이 조금 안 돼 보이긴 했다.
“그래, 스킬이 있으니 처음부터 속이려고 작정한 겐가? 우리에게 제대로 굴욕감을 주려고 말이야.”
아니, 완전 급조한 건데.
“우리도 자네에게 보여준 태도가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진 않겠네. 하지만! 자네의 농락을 본 이상 다른 길드장들은 나처럼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걸세!”
승부에 승복한 말치곤 참… 길었다.
승지는 그냥 어깨만 으쓱이고는 내민 손을 회수했다.
여기서 사실 나는 당신의 공격을 다 예측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마음대로 조종까지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이번 대결의 변수를 만들어준 건 바로 페널티 수치화였다.
프레임 컨트롤을 사용하자마자 뜬 [ 6 ]이라는 붉은 숫자는 페널티였다.
프레임 컨트롤이 상대방에겐 페널티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승지가 상대방의 프레임을 6만큼 더해준다면 그만큼 상대방의 속도는 느려지게 된다.
[ 6 ]
[ 3 ]
[ 11 ]
프레임 컨트롤을 쓰는 동안 패널티는 실시간으로 짤깍짤깍 바뀌었다.
이건 상대방의 목표 동작이 바뀌었거나, 프레임에 가해지는 힘과 속도가 변했다는 뜻이다.
프레임 컨트롤은 시간이 아니라 대상에 과부하를 거는 스킬이었기 때문이다.
즉, 프레임 컨트롤만 계속 상대방에게 쓰고 있으면 그의 힘과 변화를 가장 먼저 예측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지막 공격도 피했지만.
승지는 아직도 붉은 숫자가 빠르게 변화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기분이 오묘해졌다.
김정진이 마지막 공격을 날리기 직전에 프레임 수치가 엄청난 속도로 내려갔던 것이다.
[ 43 ]
[ 21 ]
[ -18 ]
[ -37 ]
미친 듯이 줄어들던 프레임이 기어이 마이너스를 찍더니 검격이 날아왔다.
30콤보를 성공해 방심해있던 승지에겐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김정진의 페널티 창이 검을 떠나 움직인 순간, 승지는 스킬을 취소하고 황급히 자신에게 프레임 컨트롤을 다시 걸었다.
덕분에 그 자리를 벗어나 김정진에게 한 방 먹여줄 수 있었지만, 그 결정타가 승룡권으로 나갈 줄은 전혀 몰랐다.
보다 정확한 발음은 소류겐.
격겜 하는 사람 중에 모르면 간첩이라는 삼대 겐 중의 하나다.
승지는 스스로 화려한 공중 어퍼컷을 갈기면서도 얼이 빠졌다.
끝내줘서.
또 해보고 싶다. 스킬 이름을 외치지만 않았어도 지금 시도해보는 건데.
“축하합니다, 승지 씨.”
류의건이 환한 얼굴로 다가와 축하했다.
“마지막 공격은 저도 놀랐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연승도 충분히 가능하시겠군요.”
“아, 고맙습니다.”
승지가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류의건은 자신을 죽이려고 한 적도 없고 착한 짓만 해댔으니 굳이 말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류의건은 약간 섭섭한 기색이었다.
“제게도 다른 분들처럼 편하게 말씀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뭐 좋은 소리라고 말을 놓겠습니까.”
애초에 좋아서 반말 깐 것도 아니었는데. 그리고 댁도 존댓말 하잖수.
말을 깔 거라면 바로 저렇게 해야지.
“어이가 없구만! 방금 태어난 병아리한테 져도 유분수지! 망신, 망신이야! 내가 아주 버릇을 고쳐주겠어!”
박편호가 씩씩거리며 막말을 퍼부었다. 정말 나이랑 상관없이 말까고 싶은 상대로군.
“으음… 자네가 그렇게 쉽게 말할 상대가 아니야.”
패배하고 돌아온 김정진이 무안한지 작게 중얼거렸지만 이미 박편호의 귀엔 들리지 않았다.
“다음엔 내가 상대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