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노인을 위한 제국은 없다 (1)
안쪽으로 들어가자 바깥에서 보이진 않던 망가진 물건들이 보였다.
벽에 걸려있던 귀족이나 부유한 왕족을 그린 초상화가 절반씩 찢겨있거나 썩어있었다.
한 번 물이 찼다가 쓸려 내려갔는지 바닥과 벽은 온통 곰팡이 투성이였고, 걸을 때마다 뭐가 섞였는지 모를 끈적한 검은 점액이 올라오며 밟혔다.
삐걱. 삐걱.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배 안을 맴돌았다.
[으스스해….]
성좌가 부르르 대화창을 떨었다.
“으스스하기만 하냐? 수상하기까지 하잖아.”
승지가 검은 깃발이 가라앉은 채 고인 웅덩이를 응시했다.
단순히 추락했다기엔 너무 많이 젖어있었다.
“날씨가 습한 것도 아니고, 배에서 내린 다음 한참을 걸어왔는데 왜 이렇게 물이 많은 거냐?”
[으음 글쎄?]
“게다가 너희들 배는 항해하는 게 아니라 날아다니잖아. 예전에도 그랬지?”
[응. 나 살아있었을 때도 배는 여전히 별과 별 사이를 비행할 수 있었어.]
“그럼 더 수상하단 말이지.”
저 물들은 다 어디서 나온 거냐.
“설마 독은 아니겠지?”
[히엑?!]
성좌가 급하게 백 대시를 쓰며 승지의 몸을 뒤로 빼냈다.
방금 가르쳐주긴 했는데, 잘 써먹네.
“야야, 괜찮아. 독이었으면 벌써 반응 왔지.”
[그치만…!]
“그리고 아직 인벤토리에 성수 많이 남았잖아?”
마무자의 별로 배를 내려보낼 때 물통을 박살 냈지만, 그걸 담고 있는 게 바로 자신의 인벤토리였다.
당연히 배는 빼내도 안에 마무자의 성수가 남는다.
[아하! 그러네! 혹시나 중독되어도 바로 해독할 수 있겠다!]
“그 놈들 마무자의 성수가 비싸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네가 챙겨놓을 줄 알았다.”
[마, 맞아! 역시 우리 승지야! 내 마음을 너무 잘 안다니까!]
그냥 버리는 걸 깜박한 것 같지만, 성좌가 냉큼 뿌듯해했다.
승지는 해골의 눈알을 들고 배를 마저 탐색했다. 일관되게 한 곳을 향하던 빛은 점점 길이가 짧아지더니, 종국에는 한 마룻바닥이었을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야!]
철퍽철퍽. 빠르게 다가간 승지가 손으로 바닥을 열려고 했다. 아니, 정확히는 성좌가 그러려고 했다. 갑판을 잡는 대신 주먹을 쥐었다 활짝 핀 성좌가 울상을 지었다.
[소, 손을 섬세하게 쓰는 건 아직 어려워!]
“그럼 그냥 발로 까!”
성좌가 시키는 대로 하단 킥을 날렸다.
드득.
오랫동안 방치된 배의 바닥은 큰 소리도 없이 쉽게 무너져 내렸다. 다 썩어서 부드러워진 나무판 밑으로 자줏빛 비단 주머니가 툭 떨어졌다.
“저게 뭐지?”
가까이 다가간 성좌가 잡기 버튼을 연타했다. 헛손질을 하던 승지의 손이 주머니 안에 들어가서 쥐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다.
[나왔다!]
간신히 잡아낸 물건을 양 손가락으로 집어낸 승지의 손이 위로 올라왔다.
주머니에 있던 물건은 주먹만한 옥이었다. 매끈하게 뻗은 손잡이에 네모난 정사각형이 달린 형태였으며 넓적한 부분이 올록볼록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뭔가 잉크 같은 걸 발라서 찍으면 글씨가 나올 것 같은……
갑자기 손에 든 물건의 무게가 확 다가온 승지가 말을 더듬었다.
“이거, 설마 옥새냐?”
[으응? 옥… 어? 옥새?]
승지도 교과서로밖에 본 적 없는 물건의 등장에 둘 다 당혹에 빠져버렸다.
심지어 난 교과서에서 봤을 때도 읽은 게 아니라 그 위에 엎드려 잤다고.
역사 속에서 옥새가 해온 역할을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적어도 이게 중요한 물건이라는 건 알았다.
옥새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해골 눈알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헉…… 승지야. 지금, 지금 막 깨달았어!]
급박한 성좌의 반응에 승지가 진지하게 캐물었다.
“왜? 뭔데? 중요한 거야?”
[승지는 왕이 될 상이야!]
성좌가 당당하게 외쳤다.
“…….”
[…….]
잠깐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했던 내가 얼간이지.
이세계 광대 주제에 너무 현실과 밀착한 농담을 던져 대서 이젠 좀 소름이 돋는다.
“너 농담 금지다.”
[아잉. ☆~(ゝ。∂)]
그래도 성좌가 쓸데없는 소리를 해준 덕분에 부담감이 확 줄었다.
“이게 진짜 옥새라고 해봤자 이걸 쓰는 나라가 남아있어야 좀 가치가 있지. 어디다 팔아먹기도 애매하고.”
[꺅 승지 매국노!]
“죽을래? 어디서 그런 쌍욕을. 내 고국은 한국뿐이다.”
[크아~! 걱정 마, 승지야! 아이템 설명은 이세계 판도를 바꿀 물건이라고 되어 있었잖아! 분명히 아직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물건일 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만….”
고민하는 승지의 주먹이 확 내려갔다. 성좌의 짓이다.
[헉, 승지야!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숨겨!”
[내가? 앗! 내가 숨겨야 하는구나!]
성좌는 컨트롤이 어려운 승지의 몸 대신 인벤토리를 열어 재빨리 옥새를 감췄다.
누군가 오는 걸 알아도 지금은 본인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찰방이며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어도 꼼짝없이 기다려야 되는 상황에 처한 승지가 속으로 긴장했다.
[어떡하지? 숨을까? 도망쳐?]
“어설프게 움직일 거면 차라리 가만히 있어.”
참방참방. 늪지를 걸어오듯 느릿한 발걸음이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누군가 등불을 휙 들어 올렸다.
“게 누구요?”
카랑카랑하고 낮은 노인의 목소리였다. 승지가 재빨리 그를 훑었다.
무기 없음. 말랐네, 근육도 없음. 피부에 검버섯이 필 만큼 늙은 자인데다가 승지를 보기 위해 잔뜩 찡그린 눈가가 계속 떨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승지가 긴장을 풀었다. 노인은 그럴 수 없었지만.
“여기서 뭘 하는 게요?”
경계하는 기색이 뚜렷한 목소리였다. 승지가 최대한 그가 겁을 먹지 않도록 차분히 말했다.
“배를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배? 척 보기에도 다 썩은 배를 뭣하러…?”
“썩어서 물이 줄줄 흐르는 걸 보니 저절로 궁금증이 치솟더군요. 이 배가 떨어진지 꽤나 오래 지났나 봅니다?”
노인의 희고 숭숭한 눈썹이 한 데로 모아졌다.
“자넨 누군가?”
“채승지라고 합니다.”
“…나는 벨타보타라고 하네.”
노인, 벨타보타가 한숨처럼 가는 숨을 내쉬었다.
“따라오게. 여긴 공기가 좋질 않아.”
마른기침을 하는 벨타보타를 따라 승지가 걸음을 옮겼다.
썩은 배에서 나와서 보니 벨타보타라는 노인은 초라하리만큼 볼품없는 노인이었다. 허리는 굽고, 머리는 성성하고.
다만 한 가지 주름살에 눌린 눈동자만큼은 형형한 총기로 빛났다.
[왠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 같아! 이 배에 대해서도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따라가는 거야.
낯선 사람 앞이라 승지는 성좌에게 건넬 말을 아꼈다.
벨타보타는 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어진 작은 집으로 승지를 데려갔다.
“집이라고 부르기엔 초라한 곳이지만 들어오게.”
벨타보타의 표현은 겸양을 떨기 위해서 쓴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건 집이 아니라 어디 나무판자를 모아다가 얼기설기 엮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흔히 노숙자가 종이 상자를 갖다가 만들어놓는 형태랑 다를 게 없었으니. 승지는 그 집에 들어가기 위해 허리를 몹시 숙여야 했다.
[앉기는 스틱을 아래로!]
다행히 벨타보타는 승지의 동작이 약간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잽싸게 다시 일어난 승지가 태연하게 물었다.
“이런 곳에 사십니까?”
“다른 방도가 없었네.”
벨타보타가 슬픈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았다.
자세히 보니 집안에 있는 물건들은 전부다 어디서 떼어온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아앗! 저것들 전부 원래는 배에 붙어있는 물건들이잖아! 저 시계도! 주전자도!]
확실히 물건들은 낡긴 했지만 지나치게 고급스러웠다.
승지가 집안 세간을 보는 게 느껴졌는지 벨타보타가 음울하게 주름진 손을 모았다.
“실내가 초라해도 이해해주게. 벌써 몇 십 년 동안, 이 주변에 살아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어.”
“몇 십 년씩이나 말입니까?”
“이 별엔 원래 사람이 살지 않거든.”
벨타보타는 손님 대접할 것을 찾는지 주전자를 뒤적이며 들어있던 물을 끓였다.
…저거 먹어도 괜찮으려나.
“저 배가 추락한 직후에는 살아남은 사람이 꽤 있었네. 하지만 마왕의 공격이 배에 스며들어서 결국 나 하나밖에 남지 못했지.”
[헉 저 할아버지가 유일한 생존자란 말이야?!]
마왕이라는 말에 승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벨타보타가 물었다.
“왜 마왕이라고 하니 두렵나?”
“뭐 그 놈들이 이미 개새끼들인데 새삼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승지의 대답에 벨타보타가 얼핏 웃음 비슷한 걸 만들었다.
“그렇지. 누군가 마왕을 욕하는 일도 간만에 들으니까 몹시 기쁘구만.”
“어떤 마왕의 습격을 받은 겁니까?”
“캄이라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생존한 27명의 마왕 중에서 아직 현실에 알려지지 않은 18 마왕의 이름인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 염소 대가리의 주인일지도 모르겠군.
벨타보타가 회한에 차 말했다.
“정말이지 그 땐 끔찍했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녹아내리는 배와 보물들…. 떠날 때만 해도 모두들 희망에 차있었는데…….”
“그럼 계속 혼자서 살아온 겁니까? 다른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끈질기게 찾았지만 결국 내가 모두 묻어주었네. 배에 실려 있던 식량을 독차지하게 되었는데도 기쁘지 않았던 건 처음이었지.”
벨타보타의 안색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결국 그 많은 식량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아버렸으니….”
잠깐 코를 훌쩍인 벨타보타가 삐이익 끓는 소리가 나는 주전자를 조심조심 옮겨 승지에게 이끼 차를 타주었다.
“들게. 너무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대접하는 예의도 잊고 있었구만.”
처음 보는 괴상한 음식이었지만 승지는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차는 흙 맛이 났다.
“왜 그런 대단한 배가 습격 받은 겁니까? 원래라면 용 새… 부르그골 같은 힘으로 보호받을 줄 알았는데요.”
“물론 배는 보호받고 있었지만, 누군가 억지로 마왕을 끌고 와 공격한 거야. 그 배엔 제국의 황족이 타고 있었거든.”
“제국…?”
[황족?!]
여기 그런 게 있는 세계관이었냐.
하긴 별이 그렇게 많으니 없는 게 더 이상하겠다.
오히려 승지의 반응에 벨타보타가 깜짝 놀랐다.
“설마 자네 제국을 모르나?”
“예, 제가 좀 무식해서.”
“아무리 무식해도 별들의 지배자, 영원한 안식의 제국에 대해선 알아야지!”
갑자기 벨타보타의 목소리가 열의를 띄었다.
“그들의 피엔 별빛이 흐른다고 전해진다네! 마왕들이 뺏고 빼앗는 별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변치 않는 법칙으로 안심할 수 있도록 권세를 펼쳐주지!”
아, 이거 왕족 찬양하는 거 보니까 맛이 좀 갔는데.
승지가 떨떠름하게 벨타보타를 쳐다보았다. 물론 몇 십 년 동안 혼자 살았다고 하니 안 미치는 게 더 힘들겠지.
오래 끌지 말고 째자.
승지가 결론을 내렸다.
“차 잘 마셨습니다, 어르신.”
“아, 기다리게. 기다려! 왜 이리 성급하나! 간만에 온 손님을 그냥 보낼 수야 없지.”
벨타보타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조금만 더 있다 가게. 내 다른 곳도 구경시켜주겠네. 아까 배를 보고 있었지? 배에 탄 사람들도 궁금하지 않나? 내가 그들을 묻어둔 곳에 기념할 물건들도 같이 옮겨뒀다네. 일지를 보면 더 많은 걸 알 수 있을 게야.”
“그럼 그러시지요.”
옥새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승지가 승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