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꽃종이를 쓸어내야지 (3)
[다나우는 그 후로 스스로를 여신이라 칭하며 세력을 넓혔어. 그 때는 몰랐지만 마왕의 단계를 밟아간 거지.]
자기 입으로 여신이라고 말하고 다녔다니. 성격 하난 진짜 인정한다.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승지가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래서 그 짓을 반복하다가 결국 마왕이 되려고 했다는 거냐?”
[언젠가, 다나우가 제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고 했었어. 그러고 나서 날 사제로 삼아주겠다고 했지.]
“하, 광대 사제라니.”
[말도 안 되지? 그치만 사제라는 이름을 달고 나니까 나도 이공간을 열 수 있게 되었어.]
[다나우는 그냥 날 도울 수 있게 조정했다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마왕이 되어가는 과정인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거 같아.]
[마왕이 되려면 몇 가지 징후가 필요해. 나는 다나우가 그 징후를 겪는 걸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었는데, 몇 달 뒤에 나도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 버렸린 거야.]
[그리고 그 뒤는… 승지도 본 적 있지.]
클랩의 마왕성에서 강제로 보여졌던 성좌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 터다.
결국 진상을 알아차린 광대가 다나우에게서 도망쳐 나온 그 때.
당연히 튀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친우를 배신하는 거라 뼈 아팠던 모양이다.
게다가 배신하고 도망친 다음 죽어 성좌가 되었으니.
여기까지 왔으니 승지는 망설이지 않고 물었다.
“넌 어떻게 죽었냐.”
[도망치던 어느 날, 다나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여신의 죽음이라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여신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내 친구였다고 얘기했지.]
성좌가 조금 망설였다.
[사람들의 찬양도 마왕이 되려면 필요한 과정 중 하나였거든. 그래서 막으려고 했던 거였는데, 사람들은 무척 화를 냈어. 그러다가….]
성좌가 남몰래 승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벌써 짐작하고 얼굴이 굳어져가는 승지를 보자 이미 사라지고 없는 마음이 미어지게 아팠다.
[……맞아 죽었었어.]
“…….”
성좌는 승지가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으나 승지는 묵묵히 대화창을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오히려 성좌 쪽에서 못 견디고 대화창을 연달아 띄웠다.
[아무튼 마왕의 힘이 엮이면 멀쩡하던 사람들까지 이상해지니까! 운이 조금 나빴다고 생각해! 이미 끝난 일인걸!]
“대신 변명해줄 필요 없어.”
승지가 마침내 입을 떼었다. 그리고 평소에 하던 것처럼 대화창 위에 손을 툭 얹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다.”
[….]
괜히 울컥한 성좌가 말이 없어지자 이번엔 승지의 말이 많아졌다.
“어쨌든 그런 위험한 녀석이 아직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가급적이면 보스로 썼던 인간이랑 같이 뒈졌으면 좋겠는데. 그럴 거 같진 않구만.”
[……응! 다나우는 똑똑했으니까!]
“칭찬하란 소린 아니었지만.”
[있지. 승지야. 그리고 이 얘기는 다른 사람들한테 안했으면 좋겠어.]
“왜?”
[다나우처럼 악용할 사람이 나올까봐 무서워. 물론 다들 착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다나우도 나한테는 착했거든.]
별로 믿기지 않는 소리였지만 어쨌든 본인이 그렇게 주장한다니 별 수 있나.
“마왕이란게 알기만 한다고 그렇게 쉽게 되는 거냐?”
[승지야. 사실 번태 아저씨는 마음만 먹으면 마왕이 되기 가장 좋은 조건을 가졌어.]
[그러니까 괜히 알려줘서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승지는 잠깐 번태의 성격을 떠올렸다.
그 양반이라면, 충분히 되고도 남지.
“알겠다. 나머진 내가 적당히 둘러대마.”
[고마워!]
성좌의 과거를 듣느라 꽤나 시간이 지체되었다. 승지가 다시 바깥으로 나오자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랭커들이 도로 일어났다.
“이거 무릎이 아파서 혼났구만!”
내키면 일 년 동안 쪼그리고 있어도 문제가 없을 사람이 엄살을 부렸다.
“안에서 얘기는 잘 끝났나?”
“그래.”
“결론은?”
“성좌 특권이랍니다.”
승지는 성좌의 얘기에서 마왕과 엮인 것들을 죄다 쳐냈다.
마왕이 제단을 통해 가진 이공간이 인벤토리와 유사하다던가, 당신이 마왕이 되기 제일 좋은 조건이라는 얘기는 입도 벙긋 안 했다.
대신 알려진 내용만 잘 섞어놨다.
“성좌들도 원래 사람이었으니 우리처럼 인벤토리를 가질 수 있다니까.”
“호오. 그럼 다른 사람들의 성좌들도 마음만 먹으면 그런 인벤토리를 열 수 있다 이거군?”
“그렇지.”
“시험해볼까! 한 번 나와 보게, 동반자!”
번태가 갑자기 허공에다 대고 외쳤다. 아마 그의 성좌를 부르는 것일 터다.
크엑, 동반자라니. 누가 성좌를 저렇게 낯간지러운 이름으로 부르….
[우와, 우와! 동반자라니! 지금 자기 성좌보고 그렇게 부른 거지? 너무 멋있다!]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죽어도 그렇게 못 불러.”
[어? 뭐라구 승지야?]
“……아니다.”
류의건은 소심하게 자신의 성좌를 부르다가 여전히 반응이 없는 걸 보고는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최자림과 오조희는 갸웃거리며 성좌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들도 썩 좋은 반응이 나타나진 않았다.
아마 그들의 성좌들도 요구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감을 잡지 못하는 거 같았다.
하긴 내 성좌는 나타났을 때부터 내 인벤토리를 자기 것처럼 써댔으니. 원래부터 이공간을 다루는 데 익숙한 건가?
마왕 언저리까지 간 건 확실하네.
언뜻 머릿속에 비슷하게 인벤토리를 다루는 인간이 스쳤다가 번태의 감탄사에 곧장 까먹어버렸다.
“호오?”
그나마 유일하게 반응을 이끌어낸 번태만이 뭔가 알아차렸는지 눈을 빛냈다.
“재미있구만!”
“뭐가 되긴 했습니까?”
“흥미로운 정도는 됐다네!”
번태는 만족해서 대화창을 닫았다.
“좋아, 이것으로 중요한 건 대강 처리한 거 같구만.”
그가 먼지를 털 듯 손바닥을 짝짝 부딪쳤다.
“아, 그리고 승지 자네를 이번 알러트 보스 사냥의 주역으로 소개하고 싶은데 어떤가? 얼굴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네!”
“별로 필요 없는데.”
“사양하지 말게! 자네 같은 업적을 달성한 위인은 세상에 얼굴 좀 보여줘야 하는 법!”
“댁도 얼굴 알려지기 싫어하면서 무슨, 윽!”
번태가 껄껄 웃으며 승지의 목을 옆구리에 꼈다.
“도와주려는 걸세! 이번 일로 자네의 실력이 제대로 알려졌을 텐데 방송에 정식으로 나가지 않으면 기자들이 떼거지로 자네 집으로 찾아갈 거야!”
“뭐요?!”
집 앞에 진을 친 기자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체육관을 나왔을 때 마주친 것들만 해도 심기를 거스르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자, 싫겠지? 그럴 바엔 깔끔하게 대외적으로 한 번 보여주고 끝내주는 게 낫다네! 내 조언이야!”
“본인도 그런 거 한 적 없잖아!”
“나는 이동수단이 탁월하잖나! 기자들한테 안 걸리고 돌아다니는 건 누워서 껌 씹기지! 자네가 순간이동 스킬을 배워오면 놓아주지!”
“에라이!”
승지가 그대로 번태를 엎어 쳤다. 번태는 예상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옆으로 데굴 구르더니 멋진 포즈로 착지했다.
“훠우~! 십 점 만점!”
최자림이 박수를 쳐댔다. 번태가 으쓱으쓱 거리며 무대 인사를 받았다.
이 무슨 바보 같은 짓거리냐.
계속 싫다고 하는 것도 우스워질 거 같아 결국 승지가 잔뜩 헝클어진 머리로 성질을 냈다.
“망할, 합니다. 해요. 그러니까 좀 꺼지쇼.”
“아하! 탁월한 선택이야! 우리 분장 팀을 보내줄 테니 기다리게!”
“뭐? 그딴 것도 있어?”
“대형 길드니까!”
번태가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거리며 사라졌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꺅! 그럼 이제 승지의 정식 데뷔가 잡힌 거야?!]
“……미쳤냐. 그 비슷한 말도 갖다 붙이지 마.”
승지가 정색을 했지만 다행히 번태가 불러온 분장팀은 정말 아이돌처럼 요란한 분장을 시키진 않았다.
그저 조명과 카메라에 잘 보일 정도로만 정리했을 뿐이었다.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마치 방금 막 싸움에서 돌아온 전사같은 느낌을 풍기고 싶다고 승지의 머리카락을 조금 털었을 뿐이다.
승지는 거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고 대부분의 이야기는 류의건이 맡았다.
“…해서 여러분들에게 일말의 오해가 없도록 상황을 전달 드렸습니다.”
류의건이 정중하게 말하면 아무 말이나 해도 설득력이 생겼다.
기자들은 엄청 대단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가 비밀 작전 수행했음.
성공적임.
보스도 잡았음. 다시는 알러트 볼 일 없을 거임.
칭찬해주길 바람.
이상!
이 간단한 내용을 그럴 듯한 단어로 바꿔서 술술 토해내는 류의건이 대단할 따름이었다.
번태는 신비주의 컨셉을 고수해야 한다면서 굳이 뒤를 돈 채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던 것이다.
“역시 또라이라니까 저 인간.”
[저번에 카메라에 찍혔던 것도 결국 번개 때문에 얼굴이 하나도 안 나왔대!]
몰래 남의 핸드폰까지 봤는지 성좌가 키득거렸다.
유월은 굳이 자신까지 인터뷰에 응할 필요는 없다고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쯤 어둑시니 길드 지하에 마련된 조사실에서 알러트 간부들을 하나씩 까보고 있을 거다.
의외로 오조희는 여러 번 방송을 탄 짬이 있는지 침착하고 능숙하게 질문에 답변해댔다.
“승지 씨와는 코스모스 센터 때부터 인연이 있었어요. 이번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솔직하게 기뻤습니다.”
“채승지 씨는 그럼 원래부터 선행을 자주 하시는 분이신가 보군요!”
서언행? 내가?
즉시 속이 꼬인 승지가 입술을 들썩거렸다. 입 발린 칭찬을 싫어하는 승지의 낌새를 알아차린 류의건이 얼른 끼어들었다.
“올바른 의지로 나아가는 분이시죠.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뭐?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평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더럽게 낯간지러운 단어다.
“야, 내가 무슨.”
[저 부분은 편집해주세요!]
성좌가 급하게 날아와 승지의 입을 가렸다. 한 번 터지면 육두문자가 기본인 인성을 굳이 지금부터 보여줄 필요는 없으니까.
[승지야! 칭찬이잖아!]
“아니 뭘 알고 칭찬을 해야….”
“하하, 저 분이 쑥스럼이 좀 많으십니다!”
최자림이 호탕하게 웃으며 끼어들어 넘어갔다. 승지가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결국은 참았다.
“아, 예, 뭐.”
역시 난 광대 체질은 아니다.
저렇게 촬영하고 있는데 떠들 수가 없다.
난 절대 인터뷰 하지 말아야겠군.
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승지의 결심과 달리 의외로 다섯 명의 인터뷰는 반응 좋게 흘러갔다.
앞 다투어 분위기를 이끄는 인간이 넷이나 되다보니까 승지가 입 다물고 있는 게 오히려 묵직한 존재감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평소처럼 사나운 인상이 오히려 카메라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좀 더 오래 조명하도록 만들었다.
승지는 그런 사정을 모른 채 허벅지에 팔을 누른 채 앉아있기만 했다.
“만약 남아있는 알러트 잔당이 있다고는 해도 더는 힘을 가질 수가 없을테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좋네!”
번태가 카메라를 향해 멋진 등을 보이며 연설했다.
그동안 비각성자들이 빠질까 염려되었던 알러트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열심히 받아 적던 기자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묻겠습니다. 이번에 미끼로 사용한 마왕의 무기는 결국 누가 갖게 되는 겁니까?”
“그거야 당연히 승지 군이라네!
“어? 내가?”
“자네 팀이 가장 많이 나지 않았나!”
생각해보니 그러네?
다들 대피하는데 승지를 돕겠다고 달려온 팀원들 덕분에 최종적으로 우승한 셈이 되었다.
승지가 약간 놀라서 오조희와 최자림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최자림이 찡긋 윙크했다.
“대장! 일등 상품은 뿜빠이입니다!”
“…….”
그래. 저런 인간이지.
뿜빠이가 뭐냐고 묻는 성좌의 대화창을 아련히 배경으로 둔 채 승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