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연극이 끝난 뒤 (1)
인터뷰는 그대로 왁자지껄하게 끝났다. 계속 등짝만 내보이던 번태가 카메라가 사라진 뒤에야 앞으로 머리를 돌렸다.
“조만간 또 보세! 이번 일은 정부쪽에도 보고가 들어가서 조만간 축하 행사가 크게 한 번 열릴 걸세!”
“댁은 제발 일 좀 그만 벌이십쇼.”
승지가 진절머리를 냈다. 결과적으로 알러트를 소탕하긴 했지만 번태 때문에 거하게 고생한 셈이다.
승지의 말을 그저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번태는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이번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열리는 거니 어쩔 수 없다네. 오히려 마음 편하게 참석할 수 있지 않겠나!”
“대장! 우리 이겼으니까 회식하러 가야죠!”
“회식! 아주 좋지!”
“아, 그럼. 다 같이 가시죠. 제가 바로 예약하겠습니다.”
[꺅 승지야! 너도 갈 거지? 응?]
성좌까지 끼어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 말 많은 인간들.
승지는 그냥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어차피 싫다고 해도 끌고 갈 위인들이다.
기자들이 슬슬 떠나는 걸 보고 있던 승지가 슬쩍 건물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던졌다.
“유월은 안 나온대?”
“아아~?”
최자림이 곧장 음흉한 눈빛을 지었다. 연애의 냄새를 맡은 인간 특유의 표정에 승지가 질색했다.
실수다, 저 염병천병한테 들키느니 머리에 총 쏘고 말지.
다행히 류의건이 눈치 빠르게 나섰다.
“본인이 직접 신문하고 싶어 해서 당분간은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
“류의건 씨는 그걸 또 언제 들었대요? 둘이 사귀나? 유월 씨랑 사귀나?”
“시끄러.”
승지는 괜히 신경이 쓰여서 남은 회식도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2차, 3차까지 갈 때까지 유월은 역시나 나타나지 않았다.
“승지 자네는 술도 안마시면서 은근히 오래 노는 구만!”
“마찬가지네요. 취하지도 않는 인간들이 뭘 그렇게 마셔댑니까?”
낄낄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랭커들은 훨씬 시끄러운 것만 빼면 여느 직장인 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끝나고 어딘가 허무해지는 것까지 말이다.
“그럼 다음엔 파티장에서 보세!”
번태가 붕붕 손을 흔들었다.
실컷 놀았던 인간들이 서로 인사를 하며 헤어질 때쯤에는 하늘까지 흐려져 있었다.
[봐, 승지야! 눈이야!]
“정말이네.”
승지가 별 감흥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함박눈도 아니고 싸락눈이 약간 내리고 있었다.
성좌는 그저 눈을 봐서 좋은지 신나 떠들었다.
[우리 들어갈 때 케이크 사갈까?]
“글쎄. 어차피 먹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그치만….]
성좌는 승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현실의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때문에 불 꺼진 텅 빈 집에 혼자 들어가는 게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게다가 외로움은 자신도 잘 아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도 좋아지잖아! 알다시피 난 승지한테 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 (•͈ ㅅ •͈ )]
“알았다, 알았어. 괜히 불쌍한 이모티콘 띄우지 마.”
승지가 머쓱하게 말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실이 밝았다.
[엥?]
“어라?”
계속 덤덤하던 승지도 이번만큼은 놀랐다.
“내가 불을 켜두고 나갔나?”
환한 거실에 당혹할 틈도 없이 집 안쪽에서 두다닥 소리가 났다.
“컹! 컹!”
[아앗! 케로베로스야가?]
우람한 개 세 마리가 돌아온 주인을 반기듯 달려 나와 승지 품에 머리를 박았다.
“크억.”
[꺅! 반가워! 승지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성좌가 꺅꺅거리며 개들 머리에 대화창을 띄워댔다.
엉겁결에 개를 껴안은 승지가 어리둥절했다.
뭐지? 훈련받으면 개도 불을 켤 줄 아는 건가?
저번에 데려왔던 개들을 완전히 잊고 있던 승지가 얼떨떨하게 털북숭이 등을 문질렀다.
그리고 개가 똑똑해서 불을 켰다는 게 아니라는 듯 부엌 쪽에서 뚱한 표정으로 유청이 걸어 나왔다.
“왔습니까?”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개 보라면서요?”
유청이 오히려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그랬나?
승지가 찡그렸다.
“아니, 적당히 보고 갈 줄 알았지?”
“집 비운 거 뻔히 아는데 개만 두고 어떻게 갑니까.”
유청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말대로 개들은 제대로 보살핌을 받았는지 털들이 다 보송하고 냄새가 거의 안 났다.
[우와, 의외인걸. 유청은 개를 사랑하는 구나!]
“사람이랑 못 어울리니까 개랑 지내는 건가.”
“뭐라고 했습니까?”
“아니다. 의외로 책임감 있네.”
승지가 명치를 누르는 개를 천천히 옆으로 내려놓았다.
“뭐. 고생했다. 가 봐도 돼.”
바로 내뺄 줄 알았던 유청이 이상하게 안 가고 미적거렸다. 승지가 눈썹을 들어올렸다.
“뭐냐? 왜 안가?”
“…그 갔던 일말입니다.”
“갔던 거?”
[아항! 그래서 남아있었구나! 유월이랑 알러트 얘기 들으려고!]
성좌가 얘기했다.
음. 하긴 집에 TV가 저렇게 커다란 게 있으니 방송 나간 걸 볼만 하겠군.
승지는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설명하기 귀찮아졌던 것이다.
“인터뷰 봤으면 됐잖아.”
“정말 알러트 보스가 죽었습니까? 당신 입으로 확인해주십시오.”
유청이 서론 본론 다 빼고 결론만 추궁했다.
언론에 나온 건 믿을 수 없다는 건가. 하긴 저 속 시커먼 인간은 그러겠군.
[다나우 얘기는 안 돼. 알지?]
알고 있다고.
사실은 성좌가 시킨 일이라든지 살아있을 가능성이라든지.
굳이 알려줄 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다. 하물며 상대가 유청인 만큼 대답은 짧을수록 좋았다.
“진짜 뒈졌다.”
유청의 안색이 기묘하게 밝아졌다.
“그럼…!”
“나머진 유월한테 물어봐. 얘기 안 했어?”
“바쁘다고 설명을 제대로 안 해서…!”
“지금 네 동생 성좌 찾느라 바쁜 거야.”
“…정말로!”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 유청이 서둘러 현관으로 내려왔다. 당장이라도 유월에게 합류하고 싶은지 걸음이 조급했다.
우당탕 신발을 신은 유청이 현관을 열며 소리쳤다.
“밥 해놔서 식탁에 뒀습니다! 개 산책도 끝났고요! 그러니 당분간 부를 일 없도록 해주십시오!”
“어, 그, 그래.”
너무 착실한 머슴 짓에 오히려 승지가 당황했다.
저거 진짜로 자기가 머슴인 줄 아는 건가?
…맞긴 하지.
내가 은근히 사람을 잘 다루는 걸지도 모르겠구만 이거.
덜컹.
폭풍처럼 유청이 나가자 남은 건 헥헥거리는 개들뿐이었다.
승지가 어슬렁거리며 걸어가자 개들이 쫄랑쫄랑 따라왔다.
개가 세 마리나 되니 혼자여도 제법 시끌시끌했다.
성좌는 뜻밖의 선물처럼 즐거워했다.
[와, 진짜 놀랐다. 그래도 집에 사람이 있으니까 좋았다 그치?]
“유청인데 뭐가 좋냐.”
[언젠가 유청이 아니라 유월이 될 수도 있잖아! 기쁘지? 기쁠 거지?]
성좌가 은근히 속살거렸다.
쌍둥이가 바뀌었어야 한다고?
승지는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글쎄다.”
딱히 유청이 차려줘서가 아니라 성좌가 말한 대로 유월이 집에 있었어도 성좌처럼 반가워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딘가 어색해진 승지가 뒷목을 문질렀다.
“그냥 집에 누가 있는 게 적응이 안 된다.”
성좌는 조심스레 승지의 얼굴을 살폈다.
[있지.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어.”
[실은 저번부터 묻고 싶었는데 승지는 왜 가족들이랑 같이 안 사는 거야?]
[난… 가족이 없긴 했지만 가족이랑 비슷했던 사람들마저도 함께 있고 싶었거든.]
성좌가 슬며시 승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별로 화난 것처럼 보이지 않자 덧붙였다.
[그리고 혼자는 외롭잖아.]
“음.”
승지는 딱히 성좌의 말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글쎄 모르겠다. 난 처음부터 혼자가 편했어서.”
[가족은 불편하지만 좋은 거랬어! 오히려 잔뜩 불편한 일을 겪고 나서 뭐든 해도 될 거 같아 편해진다나?]
“뭔 소리냐.”
승지가 쯧 소리를 내더니 물었다.
“너 산후 우울증도 아냐?”
[몰라. ( •̀ ω •́ )]
“날 낳고나서 그게 좀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누구한테 해본 적 없는 얘기였지만 큰 거부감은 없었다. 그냥 좀 낯설 뿐이었다.
애초에 이런 걸 누가 물어보냐.
하여튼 성좌 녀석.
승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아기 때부터 날 좀 죽이고 싶어 했다고 들었거든.”
[!!!!!!!]
성좌가 제대로 말도 못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 거짓말이지!]
“누가 이런 걸로 뻥을 치냐.”
[그, 그치만 승지가 이런 심각한 얘기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하잖아! 안 믿겨지는 걸!]
“나도 전해 듣기만 한 거라 별로 실감이 안 나거든.”
[아니, 아무리 옛날 일이라도… 그건 아냐……! 이건 아주 아주 슬픈 일이잖아!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 했다니!]
성좌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 했다. 승지는 머쓱하게 뒷목을 긁적거렸다.
“그런가. 병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병이라도 그렇지!!]
“지금은 좋아졌어.”
승지가 덧붙였다.
“근데 병이 낫고 나니까 이번엔 날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가지더라고.”
[그, 그래서?]
“그래서 내가 먼저 나온 거야. 예전에 내가 같이 살기만 해도 불효라고 했잖아.”
[난 효가 뭔지 모른다구!!!!]
“아, 그랬지.”
성토하는 성좌에게 승지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그 후로 딱히 가족이라고 애정이 생기진 않더라. 그냥 서로 관심을 안 가지는 게 제일 편하더라고.”
[…승지야아….]
“아니 진짜로. 괜찮다고! 울지 마!”
[그치만…!]
성좌가 울먹거리려고 하자 승지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냥 기대를 안 하는 거지. 문제 같은 거 없다.”
하지만 기대를 안 하는 거야말로 슬픈 거라고. 성좌는 혼자 생각했다.
승지는 각성자들과 헤어져 혼자 돌아갈 때 표정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승지도 사실은.
성좌가 다급히 대화창을 띄웠다.
[그럼 유월은? 유월은 좋아한다고 했잖아.]
“좋아…하지.”
대놓고 호감도를 물어보니 난감해진 승지가 애매하게 답했다.
“그렇다고 누가 벌써 가족까지 생각 하냐. 너 저번에도 유월이랑 결혼 어쩌고 하던 거 안 까먹었다?”
승지는 계속 장난처럼 넘어가려고 했다.
성좌는 내심 볼을 부풀렸다.
[그럼 승지는 평생 가족 같은 거 안 만들 거야?]
“뭐하러.”
깔끔하고 신속한 답변에 성좌는 풀이 죽었다.
사실 성좌는 은근히 자신이 승지의 가족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갑자기 풀이 죽은 성좌를 눈치 챈 승지가 설명했다.
“그냥 가족만 아니면 돼. 난 그게 더 편하다고.”
[…으응. 난 그래도 승지를 사랑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뜬금없이 훅 들어 오냐.
뜬금없이 고백을 받은 승지가 또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어… 그래. 피곤하다. 빨리 자자.”
[응! 우리 승지 샤워해!♥]
“하지 마라.”
다행히 성좌는 금방 평소처럼 돌아와 장난을 쳤다.
안심한 승지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하지만 성좌는 승지가 잠든 뒤에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래 승지야.]
성좌가 어둠 속에서 슬프게 중얼거렸다.
[우리 가족은 되지 말자.]
그 때 포탈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