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잡아먹고 먹고 먹고 먹고 (1)
갓 탄생한 마왕은 약하다.
위대한 마왕들이 가진 강대한 힘과 육체는 모두 다른 마왕을 잡아먹은 결과이니.
“그도 아는 거야. 마왕의 힘을 빌려와서 마왕이 되어봤자 어차피 잡아먹힐 수밖에 없다는 걸. 그래서 미리 자기 먹이를 깔아둔 거라고!”
박편호가 쿵쿵 알 벽을 두드렸다.
“내 말 듣고 있어? 그러니까 일단 여기서 날 꺼내주는 게 너희들한테도 도움이 된다니까!”
“거짓말이야!”
또 다른 목소리에 일순 모두가 멈칫했다. 심지어 박편호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어린애 목소리?”
승지가 당황을 감추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광대 이 녀석이 숨어 있으랬더니 소리를 질러?
하지만 광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는지 계속 인벤토리에 몸을 숨긴 채 악을 썼다.
“마왕은 그렇게 쉽게 될 수 없어! 마왕이 되려면 꼭 필요한 제물이 그렇게 많을 수는 없단 말이야!”
“이게 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그, 내 스킬이야!”
승지가 급하게 둘러댔다.
“성좌의 말을 소리로 전환한 거다.”
“승지 씨 성좌라면 그 광대?”
“호오 귀여운 목소리군요.”
다행히 같이 있던 미스핏 길드원들이 적당히 바람을 잘 잡아주었다. 승지가 긴장을 늦췄다.
“아무튼 내 성좌가 괜한 소리를 할 리가 없지. 대답해봐.”
“난 아는 대로 다 말했어!”
“마왕이 그렇게 쉽게 될 리가 없다니까!”
광대가 질세라 소리쳤다.
“마왕이 되려면 성좌신의 살점을 먹어야 한다구!”
“뭐, 뭘 먹어?”
졸지에 몰아세워진 박편호가 어리둥절하게 입을 벌렸다.
같이 있던 사라설도 멍해졌다.
“성좌신이라는 게 개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살아있는 생명이었어요…? 맙소사…! 살점이라니!”
“왜? 예수도 빵이랑 와인이잖아.”
“그거랑은 좀 다른… 아니, 아닌가.”
서명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마구 흔들었다. 승지마저도 꽤 놀랐는데 최자림만 태연하게 지적했다.
“어쨌든 결론만 보자면 길드장님도 마왕이 된다는 거군요!”
“내가 뭘 먹진 않았어! 오히려 나도 마왕이 안 됐으면 하는 쪽이라고! 범윤오가 그렇게 말하고 날 여기 가둔 거라서 마왕이 되겠거니 생각한 것뿐이지!”
생각하니 다시 분통이 터지는지 그가 이를 갈았다.
“멍청한 놈들! 다른 간부들은 자신이 마왕이 된다는 것까지만 알고 있어. 나중에 범윤오에게 먹히는 줄은 꿈에도 모를걸!”
유월이 만났던 간부들은 다 약간 광기에 차 보이는 놈들이었다고 했다.
어쩐지 철썩 같이 범윤오를 믿고 따른다 했더니, 그게 사실 마왕이 될 걸 약속받아서였군.
하나같이 마왕이 뭐 그리 좋다고 이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넌 어떻게 들었냐? 범윤오가 순순히 말해줄 리는 없을 텐데.”
“내가 마지막으로 갇혔으니까.”
박편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차피 그쪽도 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끝까지 이용만 한 거야! 그리고 끝까지 조롱한 거겠지!”
박편호가 분통을 터트렸지만 승지 눈에는 그럴 만한 인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쿵쿵. 박편호가 다시 알을 두드렸다.
“제발, 제발 살려줘. 난 아는 걸 모두 털어놨어!”
“그 전에 범윤오가 가둬놓은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전부 말하세요!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법도요!”
“난 몰라! 할 줄도 모르고!”
“뭐야? 이게 진짜…!”
“진짜야! 인벤토리에 가둘 때 가능하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움직이라고 일부러 안에 식량을 좀 넣어뒀다고!”
박편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모두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렇다면 인벤토리에 갇힌 사람들은 최대한 도움을 바라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움직이고, 그 답례로 더 많은 사람들이 폭탄에 당해서 쓰러져버린다.
사람을 이렇게까지 천박하게 쓸 수가 있을까.
서명구가 손에서 툭 책을 떨어트렸다.
“맙소사…….”
“어떻게 그런 악마 같은 짓을…! 길드장님은 죽어도 싸요!”
사라설마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한테 협력할 수가 있어요!”
“미안해! 진심으로 나도 후회한다니까!”
박편호가 두 팔로 얼굴을 가리듯 악을 썼다.
“범윤오가 그런 인간 말종 짓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쓰레기들이 그럼 덜 쓰레기 짓 개 쓰레기 짓 나눠서 할 줄 알았냐? 애초에 끼질 말았어야지!”
쾅!
승지가 박편호가 갇힌 알 겉면을 쿵 치자 금이 쩍 하고 갈라졌다. 박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량 얼마나 넣었어.”
“무, 무슨 뜻인가…?”
“그 사람들 쓰러져 뒈지려면 얼마나 남았냐고!”
“이, 이제 사, 사흘? 이틀? 그 정도 남았을 거야. 범윤오가 알에서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전부 터트린다고 했으니까.”
박편호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제기랄! 어쩐지 납치하고 나서 계속 얌전하다 했더니 본인이 마왕 아가리에 쳐 들어가 있었냐!”
승지가 뿌득 주먹을 쥐었다.
범윤오는 완전히 돌았다.
현실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을 심산이다. 그 상황에서 여기저기 마왕이 나타나면 퇴치는커녕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겠지.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다른 마왕들은 슥삭 먹어치우고 너만 탈출하겠다?
“하!”
누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치솟는 승지의 심산에 맞춰 마왕의 무기가 변화했다.
광대가 늘상 권유하던 뿅망치와 닮았으나 훨씬 더 단단하고 살벌한 형태였다.
“……!”
시뻘겋고 묵직한 쇠뭉치가 달린 망치가 살벌하게 빛났다.
계속해서 알을 깨달라고 요청하던 박편호마저도 그 생김새에 움찔해서 뒤로 물러났다.
승지가 뿌드득 오함마를 들어올렸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다 네 책임이다.”
부웅!
크게 휘둘러진 오함마가 종이처럼 쉽게 알껍데기를 박살냈다.
콰작! 뻑!
쇠뭉치 크기대로 구명이 난 알에서 부스스 잔해가 떨어졌다.
완전히 겁에 질린 박편호는 알이 깨졌는데도 감히 앞으로 걸어 나오지도 못했다.
흉흉한 눈을 들어 올린 승지가 손을 까딱였다.
“지금부터 처리하지 못하는 인간 하나 하나씩 네 몸뚱아리를 보험금으로 잘라줄 거니까 알아서 처신해라.”
“…….”
박편호가 바짝바짝 입이 마르는 머리를 끄덕였다.
미스핏 길드원들은 순간 승지가 분명히 자신들과 같은 착한 편인데도 무섭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도 그럴게 들고 있는 무기나 하는 말이나 완전히 조폭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물론 딱 한 명만 빼고 말이다.
“자, 그럼 빨리빨리 움직이죠!”
최자림이 경쾌하게 승지 어깨를 짚고 알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부터 길드장님은 GPS 넘버투, 우리 명구는 GPS 넘버원이 될 겁니다. 찾을 수 있는 사람들부터 빨리 찾아야죠!”
최자림이 어색하게 굳어있는 박편호를 거리낌 없이 달랑 들어올렸다.
“어어엇?!”
“그래, 네가 들어라.”
비위도 좋은지 최자림은 저 인간말종을 잘도 만졌다.
차라리 잘 됐어. 어차피 위치를 찾아내려면 저 인간을 끌고 가야 했다.
박편호는 확실히 성좌가 죽을 때 모든 스탯을 잃었는지 허약하기 짝이 없었다.
“자, 잠깐만! 데려갈 땐 데려가더라도 가릴 것 좀…!”
“제 옷은 어차피 안 맞으시잖아요? 촤하핫! 그리고 다른 사람도 주기 싫어할 걸요.”
“싫어요!”
“미안하지만 저도 안 되겠어요….”
철저한 냉대에 박편호가 고개를 떨궜다. 한심한 놈.
승지가 검은 점액이 튄 망치를 그대로 바닥에 쿵 눌렀다.
“만약 마왕이 될 놈들이 이거랑 똑같은 알 형태라면 내가 깨부술 수 있어.”
“그럼 문제는 폭탄이군요…!”
아직까지 인벤토리를 감지하는 방법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예전에 광대 성좌가 인벤토리를 움직여서 다른 사람의 인벤토리를 감지하는 법을 알려줬지만, 다른 성좌들도 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했다.
게다가 어차피 시가지라면 다른 각성자도 있을 테니 구분하기 더욱 어려울 것이다.
사라설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일단 최대한 빨리 다른 랭커님들에게도 연락해야겠어요! 아직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요!”
“그건 네가 맡아.”
승지가 사라설을 가리켰다.
“어둑시니 길드랑, 국제 수사관이라던 그 여자한테 연락하는 게 최우선이야. 적어도 그 중에 둘은 인벤토리를 찾아내는 법을 알 거다.”
“네!”
사라설이 바로 수십 개의 대화창을 동시에 띄우는지 허공으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그동안 승지는 골이 터지도록 이동수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바로 번태를 불러와야 하나?
하지만 번태는 미리 지정한 장소로만 순간이동을 할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가려는 건 아예 모르는 장소들이었다.
째깍째깍.
망가진 건물 벽면에 살아있던 시계가 신경을 거슬리며 돌아갔다.
시간이 없다.
전세계급 초대형 폭탄 테러를 막고 마왕의 출현도 박살내야 한다.
대가리부터 쳐야하나?
승지가 최자림의 어깨에 매달린 박편호의 뒤통수를 빡 때렸다.
“야, 얼간이! 범윤오가 마지막으로 어디로 갔어?”
“악! 모, 모른다네!”
“네가 마지막이라면서 왜 몰라!”
“그쪽도 날 완전히 신뢰한 건 아니라니까! 진짜 범윤오가 들어간 인벤토리의 위치는 일부러 알 수 없도록 해놓았어!”
“그럼 본인이 인벤토리에 들어가고 알아서 성좌를 밖으로 빼냈단 거냐?”
“아니야. 저 사람 말대로 성좌를 죽여서 마왕이 될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어!”
광대 성좌가 또다시 허공에서 소리쳤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다나우를 죽일 생각이라니! 흐어엉! 다나우가 너무 불쌍해!”
“다나우가 누구야?”
“…잠깐만! 다 닥쳐봐!”
승지가 울음을 터트리려는 광대를 제지했다.
다나우가 불쌍하긴 개똥만큼도 불쌍하지 않았으나, 그가 광대가 생각하는 것처럼 희생당하는 역할을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까지 다나우가 범윤오를 이용해왔다고 생각해온 터다.
그런데 여기서 순순히 인간 손에 죽어준다고?
“그럴 리가 있냐?”
“으어엉?”
“다나우가 그런 호구 새끼한테 죽을 리가 없잖아?”
승지가 어디 있는 지 모를 성좌를 찾으며 두리번거렸다.
그걸 본 광대가 승지한테만 보이도록 빠끔히 인벤토리를 열었다.
광대가 빨개진 눈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다나우라면…….”
“다나우라면 분명히 또 다른 수를 썼겠지.”
“본인이 마왕이 될 생각을 했다거나…?”
어느새 울음을 그친 광대가 딸꾹질을 하며 물었다.
“박편호 아저씨! 당신 성좌가 어떻게 죽은 거죠?”
“어?”
갑자기 질문의 화살이 돌아온 박편호가 움찔거렸다.
“그, 글쎄. 인벤토리를 열어보래서 거기 들어갔다가 범윤오가 날 공격했어! 다치진 않았지만 갑자기 허공에서 검은 피가 흐르더니 모든 힘을 잃게 되었지.”
그 흔적이 지금도 바닥에 흐르는 질척한 액체였다.
광대도 차츰 승지의 의문을 이해했다.
“정말로 성좌가 죽은 거구나! 하지만 이상하다? 다나우가 절대로 순순히 살해당하진 않았을 텐데…?”
“범윤오는 이미 저 망할 놈의 알에 들어갔다고 했어.”
“헉! 들어가는 방법이 다르다면…! 꺼낼 다른 방법도 있다는 뜻이군요!”
정신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사라설이 끼어들어 외쳤다.
“지금 막 길드 연합한테 모든 얘기를 전달했어요! 어둑시니 길드도 오고 있다고 하고요! 꺼낼 방법만 알아내면 돼요!”
“그리고 찾아내는 법도 말이지.”
승지는 갑자기 박편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서명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책을 줍고 있던 서명구가 덜컥 겁을 집어 먹었다.
“왜, 왜 그러시죠?”
개 빡친 승지는 잘못한 게 없어도 사람 오금 저리게 하는 눈빛이었다.
“너, 성좌도 찾아볼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