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물 싸대기 (1)
옛날 인간들은 자연 재해를 신이라고 믿고 섬겼다고 한다.
지금 나타난 마왕의 꼴을 보니 마왕을 신이라고 부르며 믿는 놈들이 생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촤아아악!
“빌어먹을…!”
승지가 쏟아지는 물결 속에서 힘겹게 난간을 붙잡고 일어났다. 갑자기 온 세상에 파도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
용 새끼 피하니 이번엔 물귀신이냐.
망할 이세계. 가는 곳마다 마왕이 도사리고 있으니 인간들이 안 미치고 배겨?
배는 폭풍에 제대로 휘말린 듯 거세게 흔들리며 온 사방에서 물벼락을 쏟아냈다.
승지가 물이 잔뜩 들어간 눈꺼풀을 억지로 비비며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야? 아까 터트린 물은 이정도 양이 아닌데!”
[내가 인벤토리 밖으로 배를 내보냈어! 승지를 안에 둔 채로 마왕의 힘에 버텼다간 그대로 갈려서 터져버렸을 거야!]
“밖이라고? 그런데 무사해?”
승지는 당장이라도 숨이 막힐 것처럼 턱하고 호흡을 멈췄다. 우주에선 숨 못 쉬잖아.
그런데 승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멀쩡하게 숨을 쉬며 물에 휘둘리고 있었다.
“허억!”
“어부붑…! 푸학!”
“다들 꽉 잡으시오!”
아직 소리칠 힘이 남아있는 걸 보니 무사들 한 것 같았다.
[아까 선원이 그랬잖아! 배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에는 폭주하는 마왕의 길에 타는 것도 있다고!
지금 우리가 무사한건 마왕 자신을 보호하는 힘 속으로 들어와서 그래!]
승지는 위아래가 뒤바뀌는 충격 속에서 간신히 마왕의 뒤통수를 다시 찾아냈다. 여전히 거대했다.
하긴 아무리 마왕이라도 우주에 맨 몸으로 나올 수는 없었겠지.
당장의 죽음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미래가 딱히 밝지는 않았다.
마왕은 여전히 목적지도 없이 폭주한 채 움직였고, 그 바람에 마왕을 따라가는 물도 살아있는 분쇄기처럼 날뛰며 부딪치고 깨뜨렸다.
여기서 살아남는 배는 어마어마하게 항해술이 뛰어나거나 억세게 운이 좋아야만 할 것이다.
“별이 코앞이었는데…!”
승지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건 뺑소니도 아니고 아주 물 뺑소니다.
차가 살포시 주차하려는데 느닷없이 기차가 치고 간 셈이니까.
심지어 그 기차는 멈추지도 않고 여전히 차를 박은 채 달려대는 미친 폭주 기관차였다.
이 상황에서 마왕을 죽이는 건 자살행위라니. 원통하다. 승지가 더 쓸려가지 않도록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이 봐! 아까 피우에 대해서 설명하던 놈 어딨어?”
승지가 소리쳤다. 어쨌든 이 미친 마왕에 일부러 올라타는 놈들도 있다고 하니 분명 내려가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지의 외침은 비명과 물소리에 갇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다들 정신 안 차리지!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안 뒈지면 된다잖아!
꾸드득!
분노한 승지가 요동치는 배를 억지로 억누르듯 팔에 힘을 줬다.
우연인지 진실인지 몰라도 후라이팬 위의 메뚜기처럼 뛰놀던 배가 간신히 수평을 되찾았다.
“허억… 허억….”
“머… 멈췄다.”
바닥을 기던 선원들이 간신히 푸들거리며 머리를 들었다. 개중에는 허우적거리다 마신 물을 웩웩거리며 바로 토하는 인간들도 있었다.
“다 살았냐?”
“일단은…!”
“아까 나한테 설명하던 놈 나와!”
“끄윽….”
머리가 팽팽 도는 선원이 그래도 뇌는 남겨놨는지 간신히 한 쪽 손을 들었다.
“마왕 설명 좀 더 해봐!”
“피우(避雨)는 비를 싫어해요. 그래서 온 세상 물을 다 자기가 끌고가려고 하죠. 그럼 비는 안 내릴 테니까!”
“또라이네. 푸읍, 근데 그딴 거 말고!”
승지가 잔뜩 물을 먹어 걸걸해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연히 여기선 내리는 방법을 설명해야 할 거 아냐!”
얼 타던 선원이 호되게 물 싸대기를 한 대 얻어맞고는 푸푸거리며 설명했다.
“흐름! 흐름을 타야 돼요. 온갖 별에서 뽑아온 물이라 마왕과 멀어지면 저절로 별을 찾아 돌아간다고 들었습니다!”
승지는 잠깐 자신들의 머리 위를 미친 듯이 뛰어노는 물줄기를 올려다보았다.
“흐름을 타라고?”
어쩔 수 없이 승지의 말투가 삐딱해졌다.
“너넨 구분할 수 있냐?”
“…….”
선원들이 절망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지금 움직이는 물줄기가 다 멈추고 평온한 상태가 된다고 해도 어느 물이 어디서 왔는지 구분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인간’은.
[승지야!! 나한테 맡겨!]
그래! 네가 뭔가 보여주는 거다!
승지가 기대에 차 성좌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좌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잠깐 깜박했다.
성좌는 정확한 물줄기를 알려주는 대신 승지의 손에다 퉷하고 동그란 물건을 토해냈다.
“뭐냐? 지금은 못 놀아줘!”
[아냐! 내가 강아지도 아니구! 잘 봐봐!]
승지가 성좌가 내민 물체를 받느라 한 팔을 떼자 다시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끄아악! 또 흔들린다!”
“살려주십쇼, 제발!”
승지는 비명을 무시하며 떠오른 상태창을 확인했다.
[ 해골의 정신체 : 보물을 실은 비공정이 추락한 장소로 안내해준다. 이세계의 판도에 영향을 줄 물건이 잠들어있다. ]
“그래! 이런 걸 얻었었지!”
거대 스켈레톤을 잡고 나서 얻었던 보상이었다. 승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성좌가 다시 끄집어내 준 것이다.
“지금 효과 있는 물건 맞냐?”
[사용해봐야지!]
승지는 바로 이마에다가 정신체를 갖다 박았다.
빡!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신체가 쪼개졌다.
[…원래 그렇게 쓰는 거였나?]
“작동만 하면 돼!”
뭐로든 내 머리로 들어와라!
승지는 자신에게 해골의 기억이 떠오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체는 훨씬 더 직관적이었다.
반짝.
연기처럼 피어오른 해골의 눈동자가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흡사 레이저 포인터가 따로 없었다.
흠뻑 젖은 승지가 반신반의하며 해골의 눈알을 집어 보았다. 그러자 기분 나쁘게 물컹 집히긴 했지만 빛은 그대로 목적지를 가리켰다.
해골의 눈알에서 나온 빛이 정확히 딱 한 줄기의 물과 섞여들며 뻗어나갔다.
“…떴다.”
승지가 휙휙 눈알을 휘둘렀다. 그래도 빛은 변함없이 딱 하나의 요동치는 물줄기만 가리켰다.
“야! 다 일어나!”
“흐억 헉… 예? 뭐라고 했습니까!”
쫙쫙 쏟아지는 물줄기에 일 년치 목욕을 다 하고 있던 선원들이 승지를 올려다보았다.
승지도 만만치 않게 쫄딱 젖은 채로 소리를 질렀다.
“저기 보이지? 저걸 탄다!”
온통 푸르고 검은 물줄기 속에서 빨간 빛이 어른거렸다.
같은 붉은 머리를 하고 있는 승지의 주먹에서 뻗어 나온 붉은 빛이 물에 반사되며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저 이리저리 물에 휩쓸려가던 선원들이 보기엔 등대처럼 훤한 모습이었다.
“저, 저게 뭔 빛이야?”
“어디로 통하는 겁니까?!”
“몰라, 짜식아!”
승지가 입을 열자마자 그를 휘감고 있던 믿음직스러운 분위기는 바로 박살났다.
“여기보단 살 확률이 높겠지. 뒤집히지만 않게 해줄 테니까 빨랑 노를 젓든 돛을 펴든 저기까지 배 옮겨!”
“…가, 가자!”
선원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승지는 해골의 눈알을 짜부라트리듯 주먹 속에 잘 우겨넣고는 난간에 발을 올렸다.
기우뚱!
무게를 실어 누르자 물 위에 뜬 널빤지처럼 가볍게 배가 안정을 찾았다.
“후으…후.”
승지가 호흡을 가라앉히며 목을 돌렸다. 연이어 말도 안 되는 일이 터지느라 체력을 많이 빼앗겼을 텐데도 배 한 척 정도는 발밑에 둘 수 있었다.
강해진 보람이 있다.
파도를 타듯 넘실거리는 물줄기를 몸으로 제어하며 승지가 아래쪽으로 해골의 눈알을 가져다 댔다.
낚싯줄처럼 내려간 빛은 곧 물고기처럼 물과 하나가 되어 일렁였다. 그리고 정확히 아까 보았던 물줄기를 찾아 다시 쭉 뻗어 나갔다.
“그거 앞으로 뻗으십쇼! 어디로 가야할지 안 보입니다!”
“미안.”
승지가 다시 진로를 가리켰다. 선원들은 돛을 버리고 죄다 노를 집어 들었다.
마왕이 폭주하며 달려가는 힘 때문에 물이 이리저리 튀고 있을 뿐, 애초에 여기선 바람이 불 수 없었다.
괜히 돛을 펼쳐서 물을 듬뿍 먹었다간 이동만 더 힘겨워질 뿐이다.
“으랴아!”
“아자잣!”
갑판 아래로 내려간 선원들이 단번에 기합을 내지르며 노를 움직였다.
꿀렁이며 배가 움직였다.
…힘이 부족하다.
발바닥으로 배의 움직임을 감지하던 승지의 표정이 굳어갔다.
해골의 눈알이 가리키는 방향은 마왕이 가는 곳과 반대였다.
애초에 마왕이 별에서 뽑아낸 물이니 별로 돌아가려는 그들과는 방향이 상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왕과 연결된 물줄기를 끊어서 아예 떨어져 나오는 건 어떠냐?”
[처음부터 마왕이 불어넣은 힘이라 강제로 끊으면 언제 힘이 사라질지 몰라. 또 우주에 고립되어버릴 위험이 너무 커.]
“그럼 이대로 해골 눈알을 쫓아가는 건 성공할 순 있겠냐?”
성좌는 온 몸을 쥐어 짜내듯 노를 저어대는 선원과 물의 흐름을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어려워.]
예상과 같은 대답이었다.
[처음부터 마왕에게 올라탈 생각이었다면 몰라도 준비가 부족해. 마왕한테서 충분히 멀어지기 전에 굶어 죽거나 지쳐 쓰러지고 말 거야.]
역주행의 흐름을 타야 이 막막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건만.
개개인의 힘으로는 좀처럼 기세를 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곳으로 가고자 하는 흐름은 그들뿐만이 아니라 사방에서 꿈틀거리는 물줄기들도 똑같았으니까.
…그래도 나는 성공해야 한다.
승지는 배를 눌러주던 발을 떼고 갑판 아래로 내려갔다. 반응은 바로 나타났다.
“어어어!”
“기운다, 기운다!”
“거기 너.”
승지는 개중에 제일 덩치가 큰 놈을 가리켰다.
“너 잠깐 이리 와 봐.”
“헉… 예?”
“상황 교대다. 잃어버리지만 마.”
승지가 덩치를 향해 해골 눈알을 던졌다. 깜짝 놀란 그가 양 손으로 눈알을 텁 받았다.
“어디 가시게요?”
“마왕 머리채 잡으러.”
“예에?”
황당한 소리가 뒤따랐지만 승지는 훌쩍 몸을 빼냈다.
자, 물 위를 달리는 건 예전에도 한 번 해봤었지.
배에서 뛰어내린 승지가 여전히 발광하며 질주하는 마왕의 뒤통수를 향해 달려갔다.
[승지야? 스, 승지야?]
성좌의 대화창이 다급하게 쫓아왔다.
[방금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흐름을 타야 한다며?”
세상이 나랑 반대로 가면 그 대가리를 잡고 붙들고 늘어져야지. 그냥 끌려가는 꼴은 못 보겠다.
우르릉!
주변에 요동치는 물이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굉음을 쏟아냈다. 승지는 달려가며 프레임을 점점 가속했다.
자신이 빨라질수록 물줄기는 바다에 남은 화석처럼 기묘한 형태로 굳어갔다. 신화 속에 나오는 물의 지옥을 멈춰둔 채 가로지르는 기분이다.
저 앞에서 발광하는 마왕이 있으니 물 지옥이라는 말이 틀리지도 않는군.
타앗!
피우의 뒤통수까지 도착한 승지가 새까맣게 너울거리는 마왕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마왕에 비하면 승지의 크기는 너무 작아서 머리카락이 당겨진 줄도 몰랐다.
파바밧!
밧줄이라도 잡고 경사로를 올라가듯 승지의 동작은 재빨랐다.
순식간에 푸른 이마 선까지 올라온 승지는 여전히 눈이 뒤집힌 마왕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건 뭐 쳐다볼 눈깔이라도 있어야 어그로를 끌지.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우윳빛 흰자위를 보던 승지가 구레나룻을 붙잡고 아래로 내려갔다.
대충 광대뼈쯤에서 내려가는 걸 멈춘 승지가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그대로 마왕의 뺨을 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