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뒷얘기
“답지 않게 왜 그리 금방 끝냈어요?”
이연주의 목소리에 유청이 시선을 돌렸다. 지글거리며 구워지는 불판 사이에서 유청도 고기에 손도 대지 않은 인간 중 한 명이었다.
이연주는 새하얀 일회용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아온 고기와 쌈 야채를 유청에게 내밀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런데 방금 얘기는 무슨 뜻입니까?”
“채승지 씨 말이에요.”
이연주가 여기서 제일 왁자지껄하게 시끄러운 곳을 눈짓했다. 채승지가 자연스럽게 미스핏 길드원과 떠들고 있었다.
게다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류의건까지 배경이 되어주면서 채승지라는 인간이 더 눈에 확 띄었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별 볼일 없을 양아치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사람이 모였다.
이연주가 계속 말했다.
“유청 씨라면 분명히 채승지 씨를 실수로라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유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길드장들도 같은 생각으로 나를 올려 보낸 겁니까?”
“아뇨, 저분들은 진짜 별생각 없으실 걸요. 다만 전 개인적으로 유청 씨한테 관심이 많으니까.”
이연주가 매혹적으로 웃었지만, 유청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까는 당신이 채승지 각성자가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까?”
“흥미로운 실험체긴 하잖아요. 의외로 튼튼하고, 누르면 뜻밖이고. 정말 스탯이며 성좌며 형편없었는데 그 스킬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요?”
“…….”
“유청 씨도 알겠지만. 아까, 결국 알러트 얘기는 부정 안했어요.”
유청의 눈이 매서워졌다.
이연주는 유청이 각별히 알러트를 증오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알러트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채승지를 만났을 때 더 불꽃이 튀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의외로 유청의 반응이 심심해서 놀랄 정도였다.
말 그대로 사람을 찢어놓을 수도 있는 각성자면서.
아님 정말로 채승지 씨가 알러트가 아니라고 판단한 걸까. 이연주가 흥미롭게 고기를 냠 먹었다. 내가 볼 땐 너무 수상한데.
그때 의심의 불을 완전히 끄지 말라는 듯 유청이 말했다.
“이연주 각성자는 못 느꼈습니까?”
“뭘요?”
“저 자에게 시간을 끌어선 안 됩니다.”
탁. 소주가 있던 종이 잔을 뒤집어놓은 유청이 일어났다. 어리둥절해진 이연주는 엎질러진 알콜 냄새에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뜻일까?
* * *
승지가 고기 대접을 실컷 받은 날, 결국 그는 환자들을 한 번 봐주겠다는 데까진 타협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보기만 할 겁니다. 뭐 이상한 짓 하면 진짜 뒤엎어.”
“네! 괜찮습니다!”
“와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죠!”
얼굴이 환해진 미스핏 길드원들이 손을 모아 감격했다.
그동안 실컷 먹고 술에 거나하게 취한 최자림은 아예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커르렁.”
“제발 방에 가서 주무세요!”
명구와 자림이 시트콤을 찍는 동안 승지는 유유자적하게 남은 고기까지 싹 긁어먹었다.
아, 오랜만에 좀 제대로 먹은 것 같네.
본격적인 역할 분담은 내일부터 시작한댔지. 다른 랭커들이 모이려면 그 정도 시간은 걸린다고 했다.
옆에 있던 류의건이 식사가 끝나는 낌새가 보이자 말했다.
“아까 말했던 돈은 계좌로 보내드렸습니다.”
“아, 감사. 어차피 지금은 못 써서 확인은 나중에 하죠.”
“왜 못 쓰시죠?”
“폰이 망가져서요.”
“아, 그럼 저한테 안 쓰는 기종이 몇 대 있는데 하나 가지시겠습니까?”
류의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벤토리를 열었다.
요새 나오는 최신형 특유의 보라색 스마트폰이었다.
와, 저거 가격이 최소 백만 원부터 시작하는 거잖아. 알아도 못 사는 거.
혹시나 승지가 사양할까봐 의건이 먼저 선수를 쳤다.
“저희 회사에서 시험 작으로 만든 기종이라 원래 파기해야 되는 물건이니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고맙긴 한데 원래 이런 거 바깥으로 돌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실은 각성자 전용으로 개발 중인 거라 승지 씨가 테스트로 써주시면 좋을 거 같아서요.”
그럼 뭐 써야지.
승지가 룰루랄라 잠금 화면을 열고 본인 지문을 등록했다. 확실히 최신형이라 무게도 가볍고 그립감도 좋았다.
“번호도 그냥 지금 등록된 걸로 씁니다?”
“전에 쓰던 번호는…?”
“어차피 연락할 사람도 없는데 상관없어요. 당분간 내 번호부터 외워야겠네.”
“경매장을 열고 같이 얼굴 인식을 하면 양쪽 정보도 함께 저장될 겁니다. 경매장 연동형으로 제작한 거라서요.”
“그건 편리하네.”
안 그래도 경매장을 열 때마다 일일이 손짓으로 창을 넘겨야 하는 게 귀찮았었다.
역시 현대인이라면 엄지만 움직여야지.
깔끔하게 뜬 경매장을 본 승지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기술들이 가능한 겁니까? 각성자 관리소의 키오스크도 그렇고 이 스마트폰도 그렇고.”
“성좌가 가진 이세계의 공간을 물질이 공유하도록 성좌신의 축복을 받은 겁니다.”
[바로 이렇게!]
“우왁 씨!”
갑자기 화면에서 튀어나오는 말풍선에 놀란 승지가 폰을 집어던졌다.
순식간에 반사 신경이 작동한 류의건이 공중에서 잡아채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받자마자 박살낼 뻔했다.
[너무해! 날 집어던지다니!]
이번엔 스마트폰이 아니라 상태창으로 떴다. 놀라서 창백해진 승지가 소리쳤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게 승지 씨의 성좌인가요?”
류의건도 놀라 내려다보았다.
[만나서 반가워!]
[(๑>ᴗ<๑)]
저건 아무한테나 애교부리냐.
여전히 류의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성좌가 여기 나타나다니…. 이러면 상태창이나 미션도 스마트폰으로 공유할 수 있겠군요?”
[엣헴. 우리 승지의 스킬은 비밀이야~! 아무리 승지한테 잘해줘도 내 허락 없이는 안 돼!]
성좌는 꼬박꼬박 류의건의 말에 반응했다. 그게 제법 귀여웠는지 류의건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와아! 웃으니까 더 멋있네! 기절할 것 같아!]
안 돼, 류의건 그만 웃어.
내 성좌가 정신을 못 차리잖아.
다행히 류의건은 성좌의 주접에 넘어가지 않았다.
“승지 씨의 성좌는 몹시 활발한 성격이군요. 꼭 진짜 사람처럼 느껴질 만큼.”
“얘네들 다 사람 맞잖아?”
“그건 알고 있지만, 머리로만 납득되는 수준입니다. 제 성좌는 보다 시스템에 가깝기에….”
뭔가 쌓인 게 많은지 류의건이 말끝을 흐렸다. 쯧쯧, 괜찮은 성좌가 하나 없냐.
“뭐 1차 각성자들 성좌는 다 영웅이니 인간다운 맛이 좀 떨어지지 않겠냐.”
원래 영웅이란 것들은 살짝 씩 돌아있는 법이지.
승지의 말에 무언가 납득했는지 류의건이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제 성좌는 별로 달가워하진 않겠지만 맞는 말 같습니다.”
“그래.”
“저는 우선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미스핏 길드로 오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그 전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주세요. 제 번호가 경매장을 통해서 등록되었을 겁니다.”
“알겠으니 이제 미안할 짓도 없는데 호구 노릇은 적당히 하십쇼. 이건 잘 쓰겠지만.”
바로 갈 줄 알았는데 류의건이 미묘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아까부터 승지 씨 말투가 오락가락하는 거 아시나요?”
“뭐가?”
“하핫, 욕은 아니구요. 아직 저희가 덜 친해져서 그렇겠죠. 다음에 만나면 더 편하게 말씀하셨으면 좋겠네요.”
글쎄, 댁은 은근히 불편해서.
승지가 대충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류의건 정도면 친해져서 나쁠 거 없는 인맥이긴 하지.
[꺅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만나요! 기다릴 게요~.]
응, 안 되겠군. 친해졌다간 성좌가 아예 갈아탈 기세다.
류의건이 사라지자마자 승지가 구박했다.
“야 이 지조도 없는 놈아. 류의건이 그렇게 좋냐?”
[지조가 뭐야?]
“이제 와서 단어 모르는 척 하지 마라. 나보다 더 말 잘하는 녀석이.”
[헤헷. 내가 괜히 친한 척 하는 게 아니라구! 다 우리 승지를 위해서 노력한 건데.]
“갑자기 웬 노력?”
[류의건을 완전히 우리 편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지!]
“당당하게 개소리하냐?”
[츠츠츠, 아직도 이렇게 감을 못 잡아서야. 지금 류의건은 모르고 우리만 아는 정보, 기억 안나?]
“뭐… 뭔데.”
점점 괴상해지는 성좌의 말투에 약간 소름이 돋은 승지가 팔뚝을 문질렀다.
난 그냥 말이 험한 거지 저딴 식으로 말한 적은 없는데. 글자로 보니 좀 징그럽다.
[페널티 말이야! 류의건은 분명 성좌한테 강한 압박을 받고 있을 거야. 하지만! 광대의 축복으로 그 페널티를 바꿔버리면 어떨까? 엄청 고마워하겠지! 그럼 승지 부탁이면 뭐든 들어주는 꼭두각시가 되어줄 거야!]
“아니, 아니. 잠깐만. 너무 뜬금없잖아.”
광대의 축복을 남한테도 쓸 수 있었다는 건 일단 다른 문제고.
류의건의 페널티를 다른 것으로 치환해버린다?
어마어마했던 수치를 떠올리니 낙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 페널티 수치가 바뀌면 대체 뭐가 튀어나올 줄 알고? 마왕 하나 더 나오는 거 아냐?”
[에이~ 설마? 그리고 지금도 어차피 한 사람이 감당하고 있는 페널티잖아. 오히려 다른 걸로 바뀌면 상대하기 더 편해질 게 분명해!]
“…나중에 생각해보자. 지금은 글라세로 하나만 해도 골치 아프니까.”
[히잉, 알았어.]
지금은 부하를 만들기보단 본인이 강해져야 할 시기다.
다음 날, 그렇게 넓었던 미스핏 길드 건물이 사람으로 꽉 찼다.
누가 보면 갑자기 촬영장으로 바뀐 줄 알겠다. 여기저기 쌓인 짐에다 돌아다니며 인사하는 사람들까지.
“안녕하세요!”
“어, 왔어?”
“다들 모였나?”
이거 완전히 행사장이구만.
시끄러워서 깬 승지가 반쯤 문을 열어 걸치고 눈을 비볐다. 저게 다 마왕 잡으러 온 사람들이란 말이지.
“일어나셨어요, 승지 씨!”
“워, 깜짝이야! 당신들 아침부터 문 밖에서 기다렸어?”
“그럼요! 당연히 저희가 기다려야죠.”
미스핏 길드원이 헤실헤실 웃었다.
“씻기부터 하시겠어요? 아님 아침부터?”
“…그거 할 동안 따라다닐 거면 볼일부터 보고 싶은데.”
“탁월한 선택이세요!”
승지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자는 동안 미스핏 길드가 챙겨준 한복 비슷한 걸 잠옷 대신 입고 잤다.
아무리 봐도 나랑은 안 어울려서 외출복으로는 못 입겠지만.
어제 던져뒀던 옷을 입으며 다시 보니 팔에 붙은 글라세로의 문양은 변함없이 짙은 색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오늘로 저주 삼일 째.
승지는 미스핏 길드원을 따라나섰다. 글라세로의 저주에 걸린 환자들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승지가 지나가자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쉿. 저길 봐.”
“저 사람이야?”
“맞네. 팔에 문신 보여.”
“마왕의 저주를 받았다는….”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군.
벌써 뒤에서 얘기가 돈 모양이다. 저주받은 각성자, 쯤 될까.
승지는 시선에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걸었다. 대신 성좌가 분개해했다.
[뭐야 당신들이 우리 승지에 대해서 뭘 안다고 떠들어! 그만 얘기해!]
하지만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 이연주가 점퍼를 찢어놔서 티셔츠 하나만 걸친 바람에 팔에 붙은 글라세로의 문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살면서 문신 한 번 안한 깨끗한 몸인데, 참.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졸지에 문신으로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