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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그딴 식으로도 살지 마라 (2)

왜 하필 지금?

승지의 동공이 흔들렸다.

“진짜로?”

[자 봐!]

[ 승지 씨. ]

단조로운 메시지였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진짜 유월이 보낸 것이다.

[ 어디 계시죠? ]

[깨악! 꺅! 뭐라고 해! 뭐라고 답장해!]

[:.゚٩(๑>◊<๑)۶:.。+゚]

성좌가 완전히 흥분해서는 대화창을 다닥다닥 띄웠다.

그럴 만도 한 게 승지가 유월에게 연락처를 받은 뒤로 단 한 번도 단둘이 대화를 한 적조차 없었던 것이다.

성좌가 은근슬쩍 데이트 약속을 잡으라고 종용한 적도 있었지만. 당연히 승지는 용건도 없는데 연락을 하는 그런 대담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는 간이 두 개라도 되는 것처럼 굴더니 왜 이런 평범한 일은 어려워하는 지 모를 정도였다.

성좌가 답답해서 가슴을 몇 번이나 쳤었는데, 뜻밖에도 유월이 먼저 턱하니 연락을 해온 것이다.

승지는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지자 반사적으로 얼굴울 구겼다.

“잠깐만, 지금 그거에 집중이….”

파아앗!

선실 안에 황금빛이 피어올랐다. 선장이 꺼낸 수정구슬이 빛나며 드래곤과 연결된 것이다.

타이밍 죽여준다.

승지는 일단 익숙한 화부터 내기로 했다.

물론 유월이 먼저 연락하다니 엄청나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아직 안구 뒤쪽에 달라붙은 신전에서의 잔상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망할, 망할 드래곤, 망할 마왕 놈들.

절호의 기회를 이런 식으로 써버리게 되다니 역시 마왕은 세상에 해만 끼치는 놈들이다.

승지는 황금빛 수정구에서 작게 떠오른 형상을 노려보았다. 자세한 형체는 구분할 수 없었지만 금빛이 번쩍이며 움직이는 것 정도는 보였다.

“어이 드래곤.”

“…….”

다짜고짜 막돼먹게 부른 승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대답이 조금 늦게 들려왔다.

“무례한 자로군.”

드래곤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처음으로 들은 드래곤의 목소리는 폭포에서 떨어진 바위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 때까지 자신만만하던 선장도 막상 드래곤의 목소리에 노출되자 입을 헤 벌리고 손을 떨었다.

수정구를 통해서 전달됐는데도 이정도인가.

위압감에 전율한 선장과 달리 승지는 오히려 용의 목소리에 반발심만 자극되고 말았다.

더럽게 있는 척 하는 목소리다.

어쨌든 배 주인이 나타났으니 승지가 기다렸던 협박을 실행했다.

“니 배는 나한테 납치되었다.”

“…….”

부르그골은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이 어처구니없는 협박에 신기할 만큼 순순히 답해주었다.

“무엇을 원하나?”

“지금까지 네가 잡아먹은 인간 숫자부터 불러봐. 그럼 뭘 원하는지 생각 좀 해볼 테니까.”

드래곤이 거의 웃음처럼 들리는 숨소리를 내보냈다.

“나는 인간을 먹지 않는다. 인간이 나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먹어서 피와 살이 된다는 얘기를 거창하게 하네?”

“그들은 진실로 살아있다. 인간의 형태를 벗는 것은 그들의 염원이었으며 나는 수행을 도왔을 뿐이다.”

“말 같잖은 소리 집어 쳐.”

“직접 만나게 해줄 수도 있다. 네가 타고 있는 그 별에서 정화된 인간을 찾고 있겠지.”

승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드래곤은 간단하게 그가 승지의 위치를 알고 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요컨대 지금 죽여 버릴 수도 있는데 관대하게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뜻이냐? 재수 없는 용대가리.

[ 승지 씨. ]

[ 보고 계신가요? ]

이 와중에도 유월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올라왔다. 승지가 동시에 번쩍거리는 수정구와 상태창을 보며 이마를 눌렀다.

“보고 있다고 전해.”

[응!]

“무슨 뜻이지?”

승지의 대답을 서로 알아들은 성좌와 드래곤의 말이 갈렸다. 승지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무슨 뜻이냐면, 네 말이 맞든 틀리든 내가 직접 볼 때까진 개소리라는 뜻이다.”

말로는 대통령도 속일 수 있다. 게다가 이미 육체가 다 녹아서 사라져버렸는데 아무 영혼이나 잡아다가 사실 내가 그 사람이고 이 현상에 만족해요! 라고 말한다고 믿음이 가겠나?

“됐으니까 이 배를 네가 있는 곳까지 옮겨. 설마 마왕이 손님 무서워서 도망가려고 들진 않겠지?”

어차피 너희들도 성좌신의 집을 빼앗은 손님을 가장한 도적놈들이 아니냐는 뜻의 비아냥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

부르그골도 알아들었다.

“그대도 손님이 아니라 해적이 아니지 않은가?”

은근한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드래곤이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만.

“누가 해적이야?”

“인간들이 배를 빼앗고 약탈하는 자를 해적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좋다, 그럼. 해적할 테니 나머지도 내놔.”

승지는 오히려 더 뻔뻔스레 나왔다. 양아치 깡패 소리도 들어봤는데 양심에 비늘 난 드래곤한테 배 몇 대 가져간다고 이제 와서 찔릴 이유가 없었다.

“뜻대로 가져가 보라. 그리고 실력대로 만나러 와보라.”

부르그골은 더는 흥미가 일지 않는지 눈부시게 빛나던 수정구에서 자신의 광휘를 거둬들였다.

“살아남는다면.”

부웅. 갑자기 줄이 끊긴 다리처럼 배가 위로 떠올랐다. 일순간이었지만 갑자기 바닥이 붕 뜨는 감각은 의심할 수 없이 추락을 의미했다.

“어어!”

“이 치사한 새끼가!”

수정구의 금빛은 이미 꺼져버렸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선장이 얼빠진 얼굴로 수정구를 다시 붙잡았지만 승지는 이미 자리를 박찬 뒤였다.

우당탕!

“우와아악!”

“이게 무슨 일이야!”

승지가 물건이 떠오르는 복도를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갑판에서 들려온 비명이 벌써부터 들렸다.

“미친 드래곤 새끼! 이래놓고 뭐? 인간을 안 잡아먹어?!”

승지가 부서져라 문을 열었다. 이미 다른 배들과 떠있는 높이가 꽤 차이가 났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승지를 보자마자 악다구니를 썼다.

“다, 당신!”

“위대한 드래곤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우리까지 죽게 생겼어!”

“시끄러! 처음부터 드래곤 따위를 믿은 니들 잘못이지!”

기분 좀 상하게 했다고 싸잡아 죽이는 용 대신 나를 욕하고 싶어지냐? 이 대가리 알차게 빈 놈들아.

상대하기도 짜증이 난 승지가 그나마 말이 통하는 놈을 불렀다.

“성좌야!”

[응!]

“인벤토리, 어디까지 늘어 나냐?”

이젠 승지의 말만 들어도 생각을 짐작하는 경지에 오른 성좌가 대화창을 쏟아냈다.

[지금까지 벌어놓은 존재 증명치라면 이 배를 통째로 삼켜도 문제없어! 게다가 인벤토리 안은 완전 안전!]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겠지?”

[맞아! 하루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거고 승지까지 인벤토리에 들어간 상태로는 움직일 수도 없어!]

대충 승지도 짐작했던 내용이었다.

고민을 오래 하기엔 이미 배는 시시각각 경로를 이탈하고 있었다.

게다가 승지의 고민을 가속하는 존재도 있었다.

[ 데리러 가겠습니다. ]

[ 클랩 마왕의 힘을 빌린 서큐버스가 함께 와있습니다. ]

[ 지금 위치를 말씀해주세요. ]

승지는 계속해서 뜨는 대화창을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하필이면 유월이 보내는 구조 응답이라니. 이렇게 유혹적일 수가 없었다.

나만 살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유월에게 연락해 탈출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유월한테 그대로 전달해.”

승지는 난간 쪽에 몰려있는 선원을 보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선원들이 보고 있던 건 배를 지켜주던 부르그골의 통로였다.

그들을 떨구기 위해서 마왕은 배를 지탱하던 힘을 끊은 것도 모자라 우주까지 통하는 통로의 틈까지 벌리기 시작했다.

아예 우주 밖으로 추방해버릴 속셈이었다.

“우린 이제 죽은 목숨이다!”

“끄아악!”

“드래곤이시여! 제발! 저희만은 살려주세요!”

구차한 구걸을 들으며 승지는 차가운 눈으로 강해지는 별빛을 내려다보았다.

“볼 일이 아직 안 끝나서, 끝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알았어!]

성좌가 팟하고 답장을 보낸 다음 사라졌다. 아래로 떨어지는 이 배를 인벤토리로 삼키기 위해서였다.

자, 그 다음은 어떡하지?

연락을 주겠다고 했으니 다음엔 무조건 유월한테 먼저 연락해야 하고, 드래곤도 조져야 한다.

저 일을 다 끝내지 못하고 죽었다간 제대로 홧병이 나 저승에서 기어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

“저게 뭐야!”

갑자기 배가 뱃머리부터 사라지는 모습을 본 선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시킨 대로 잘 삼키고 있는 성좌를 본 승지는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가 다시 지워버렸다.

“모르겠다. 일단 무식하게 가보자고.”

성좌가 마지막 부분을 삼키는 순간 그들의 배가 우주로 떨어졌다.

* * *

[ 난 아직 이 세계를 위해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서라도 꼭 돌아올 테니 기다려줘요! 연락 할게요! ❤ ]

유월은 빤히 돌아온 답장을 응시했다.

승지 씨가 보낸 거 맞겠지?

성좌가 답장을 보낸 꼴을 봤다면 승지는 당장 있지도 않은 성좌의 목을 조르려고 들었을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승지가 저런 식으로 뻔뻔하게 나올 일도 없었고, 저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월은 말투를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용의주도하게 대화 내역까지 지워버렸으니 성좌가 저지른 구애의 만행을 승지가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구애를 받은 유월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게 문제였지만.

유월은 다시 거스와 큐라에게로 돌아갔다.

“승지 씨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다고 하는군요.”

“#@@#?”

“어머나. 어째서?”

“볼 일이 있다고 합니다.”

유월은 그러니 자기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상황이 승지가 말한대로 위급하지 않다면 연락이 온 다음에 이세계로 찾아와도 되는 거 아닌가.

큐라가 사라지지만 않았더라면 설득이라도 해보았을 텐데.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된 큐라의 몸이 일렁이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로 날아오는 검 끝이 보였다!

“인!”

성좌와 미리 정해둔 구호를 외친 유월이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냈다.

터엉!

반월을 그리듯 단숨에 검을 뽑아낸 유월이 그대로 날아온 검을 받아쳤다.

우우웅.

똑바로 쳐냈는데도 발이 반 발짝 물러나며 육중한 쇳덩이가 진동하는 소리가 몸을 타고 울렸다.

웬만한 검이었다면 벌써 부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두껍고 무식한 검을 바닥에 눌러 요동을 가라앉힌 유월이 서늘하게 뜬 눈을 들어 올렸다.

신전에서의 볼 일이 끝난 신의 심판자가 큐라를 보고 검을 집어던진 것이다.

목표는 정확했으나 유월이 공격을 막아낸 순간 의미는 변질되었다.

적을 제거한다. → 적의 보호자도 제거한다?

유월이 판단을 보류했다.

심판자가 나도 적으로 규정했나?

큐라가 나올 수 없게 된 이상 이대로 도망치거나 상황을 설명할 수도 없게 되었다.

둘 사이는 오로지 검만 나눌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의 심판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를 철가면으로 시선을 가린 채 그들을 향해 머리를 고정했다.

곤란한 걸. 의건 씨의 성좌를 죽일 수는 없는데.

자연스레 채승지처럼 자신이 이긴다고 가정한 유월이 땅에서 검을 뽑아냈다.

신의 심판자가 이미 자신을 적으로 판단했다면 절대로 검을 손에서 놓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만. 유월은 아직 심판자의 허리춤에 남아있는 다른 검을 확인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단숨에, 단판승부다. 나였으면 그렇게 했어.

바로 공격에 나서지 않는 걸 보니 아직 경계 수준이라는 거겠지.

운을 걸어볼까.

“…….”

유월이 신의 심판자가 잘 볼 수 있도록 횡으로 든 검을 들어 올렸다가 천천히 바닥에 떨어트렸다.

* * *

승지가 우주에 관해 알고 있는 지식은 간단했다. 지구는 돌고, 태양계는 수금지화목토천해라는 거.

그러나 지금 그들이 있는 우주는 태양계는 고사하고 북극성조차 보이지 않는 생판 낯선 곳이었다.

우주선이 되어버린 비행선이 아래로 미끄러지던 마지막 힘까지 소모해버리고 부드럽게 멈췄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맙소사.”

당장이라도 죽을 줄 알았던 선원들은 실낱같은 목숨이 이어지자 입을 벌렸다.

그들을 버려둔 다른 비행선들은 마왕 드래곤의 인도에 따라 천천히 다음별을 향해 흘러갔다.

오직 승지가 탄 비행선만 남아 무리에서 벗어난 양처럼 외따로 붕 떠버리게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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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라면 99콤보까지 - 광대라면 99콤보까지-9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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