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퍽! 퍽!
후미진 골목에서 둔탁한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일방적인 구타 소리에 행인들이 난감하게 길을 지나쳤다.
예전 같았으면 양아치라고 경찰에 신고를 했겠지만, 요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자칫하면 각성자와 괴물의 싸움에 괜히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꽝!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쓰레기통 뚜껑이 튕겨 나갔다.
“야, 이제 그만해라.”
물러나다가 쓰레기통을 걷어찬 각성자가 찍 내뱉었다.
아까부터 계속 흠씬 두들겨 맞았는데도 그의 얼굴엔 상처 하나 없었다.
오히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얼굴이 더욱 비열해 보이기만 했다.
생채기 하나 없는 그를 바라보며 승지는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안 되나.
처음부터 가능성 없는 싸움이었다. 각성자를 일반인이 상대하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그 사실을 아는지 각성자는 실컷 비웃음을 보였다.
“일부러 맞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가 낄낄거렸다.
“씨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승지는 지친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나도 ㅈ같다.
자신이 봐도 이걸 들고 덤비는 놈을 보면 웃다가 뒤로 넘어갈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떡하겠냐고.
이 망할 성좌가 꼭 이 무기로 싸우라는데.
[^^]
빌어처먹을 이세계에서 온 자식이 대체 어디서 이모티콘을 배웠는지 눈앞에다 저딴 상태창을 띄웠다.
“지금 집중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안 치워?”
“뭐?”
“너 말고, 새끼야.”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후
.
한숨을 내쉰 승지가 무기를 고쳐 쥐었다. 옆에서 반짝반짝 돌아가는 [\* * *^^* * */] 이모티콘을 무시한 채 그가 똑바로 적을 노려보았다.
이번에야말로 99콤보로 간다.
비장한 기세로 그가 뿅망치를 들어 올렸다.
1. 나도 각성자라니 (1)
타닥. 타다닥.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화면 속의 캐릭터가 두들겨 맞았다.
퍼펙트! 퍼펙트! 피니쉬!
승지가 저릿저릿한 손을 쭉 폈다.
“이 게임도 이게 마지막이네.”
방금 신작게임 ‘더블 업’의 마지막 무한 콤보를 완성했다.
격투게임에선 모든 캐릭터의 기술을 완벽하게 외우고 빠른 컨트롤과 순간적인 판단력이 갖춰지지 않으면 무한 콤보란 불가능했다.
그러나 승지는 게임이 출시된 지 이틀 만에 모든 캐릭터의 무한 콤보를 완성해냈다.
그 중 몇 개는 제작사가 보면 바로 패치에 들어갈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망할 놈들.”
승지가 빠득 이를 갈았다.
말은 이렇게 해도 제작사가 패치를 할 가능성은 없었다.
출시한 지 사흘 만에 더블 업 제작사에서 공지를 띄웠던 것이다.
제작사 전원이 2차 각성자가 되어 게임 개발을 접는다고.
허망해진 승지가 게임을 껐다.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게임에 관심이 없었다.
이세계가 직접 현실에 나타났으니까.
* * *
너는 선택받았다.
갑자기 특정 인간과 연결된 이세계의 영웅들은 현실에 위험이 닥쳐올 것을 경고했다.
그들의 세계가 위기에 빠져 이쪽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갑자기 상태창이 보인다는 놈들을 무시했다.
그러나 미션을 수행할수록 정말로 그들은 강해졌고, 판타지 소설에서나 읽었을 법한 괴물들이 정말로 현실로 넘어오자 다른 자들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영웅들의 선택을 받아 미션을 수행했던 이들이 아니었다면 다 죽었을 테니까.
그제야 사람들은 그들을 각성자로 인정하고, 이 세계의 영웅을 성좌라고 불렀다.
세계를 구원하는 영웅!
그러나 5년 동안 이어진 싸움에도 이세계는 복구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세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평범한 인간들까지 현실로 넘어오고 말았다.
바야흐로 2차 각성자의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덕분에 각성하게 된 사람들은 몹시 좋아했지만, 새로 온 성좌들은 영웅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했다.
기사나 마법사 같은 거에 선택당하면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고, 농부나 상인이 걸린 애들은 죽상을 쒔다.
물론 자신처럼 아예 선택을 못 받은 비각성자도 많았다.
전 세계의 관심이 각성자들과 성좌에게 쏠린 바람에 졸지에 비각성자들은 취직도, 취미도 즐기기 어려워져 버렸다.
저번에도 간신히 구했던 알바 자리에서 잘렸다. 2차 각성자 때문에.
아니, 도대체 편의점 알바에 각성자가 왜 필요한데?
물론 완전 하찮은 성좌를 만나서 각성자가 됐다고 해도 일반인보단 능력이 좋은 건 안다.
근데 편의점 알바잖아.
편의점!
이번이 벌써 99번째다.
2차 각성자가 나타난 뒤로는 아무도 비각성자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번 알바는 진짜 오래 갈 줄 알았는데, 젠장.
2차 각성이 될 거면 한꺼번에 되던지, 찔끔찔끔 시간차로 각성해서 완전히 희망고문 수준이다.
근데 게임까지 망하다니.
승지가 화면을 노려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거절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대학을 안 나와서, 집안이 불우해서, 각성을 안 해서, 외모가 사납게 생겨서, 입이 험해서.
막상 같은 일을 하면 결과가 더 좋은 쪽은 언제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실력이라고 믿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해줬겠지.
운이 좋았겠지.
저런 애가 어떻게 일을 잘해?
승지가 억지로 다시 게임을 켰다.
상대할 사람은 없지만 컴퓨터라도 때릴 수 있었으니까.
이젠 노력하지 않아도 손이 자연스럽게 콤보를 만들어냈다.
빌어먹을. 내가 자존심만 없었으면 진짜 양아치처럼 살았을 텐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당당하게 살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순전히 운빨로 각성하고 일자리마저 빼앗는 꼴을 보니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
나도 다르게 살 수 있었어. 기회만, 기회만 있었더라면…!
그때였다.
연속기를 갈기던 승지의 눈앞에 갑자기 동그란 빛이 생겨났다.
“뭐, 뭐야!”
당황한 그가 벌떡 일어났다.
빛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빛의 구체는 점점 더 강한 빛을 뿜어내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터졌다.
“으악!”
승지가 엉겁결에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화상을 입을 줄 알았던 공격은 허탈하게도 부슬부슬한 빛의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빛의 가루는 아직 눈을 가리고 있는 승지의 몸과 컴퓨터에 닿자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그리고 맑고 높은 소리가 울렸다.
띠링!
[축하합니다! 당신은 웃고 있는 광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계가 사라질 때까지 그와의 연결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엉겁결에 승지가 눈을 떴다.
눈앞에는 난생처음 보는 네모난 창이 떠있었다.
“……대체?”
그가 멍하니 창에 나타난 글씨를 읽었다.
“혹시 이게 상태창?”
[정답입니다!]
“이건 또 뭐야!”
코앞에서 띵! 하고 뜨는 상태 창에 기겁한 승지가 물러났다.
저게 정말 상태창인가?
듣던 거랑 다른데?
승지는 미심쩍은 얼굴로 눈을 굴렸다.
“대화가 되는 거였어?”
[물론이지! 만나서 반갑다! 당신의 이름은?]
띵! 띵! 띵!
대화창이 연달아 메시지를 띄워댔다.
“아니, 잠깐 기다려봐.”
승지는 조심스럽게 대화창에 손을 올렸다.
네모난 창은 손으로 만져지지 않았지만, 그가 뭘 하려는지 눈치 채고는 얌전히 옆으로 물러났다.
위에 있던 대화창을 휙휙 넘긴 승지가 다시 맨 처음 창을 띄웠다.
“당신은 웃고 있는 광대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게 바로 나야!]
“고작 광대?”
승지의 말에 마치 헉 소리를 내듯 띠링! 소리가 났다.
[고작이라니 상처받았어.]
뭔 개소리야.
어쩐지 시작부터 불길했다.
“지금 내가 각성자가 됐다고?”
[맞아! 축하해!]
대화창에서 요란하게 빛의 구슬이 터져 나왔다.
“꺼. 눈 아파.”
움찔한 대화창이 얌전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승지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 얼떨떨했다.
설마 자신이 각성자가 될 줄이야.
꽉 눌려있던 미간 대신 입꼬리가 씰룩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아직 좋아할 때가 아니지.
아무리 각성자라고 해도 능력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였다. 특히 2차 각성자는 더.
“정말 성좌라면 대답해봐. 광대는 대체 무슨 능력이 있냐?”
[…….]
무시하는 티가 팍팍 났는지 상태 창이 조용했다.
“어이, 웃고 있는 광대 씨. 대답 좀 해봐.”
[…나도 명색이 성좌인데 좀 더 기뻐할 수 없어? 각성자가 되면 다들 좋아한다던데.]
“음…. 그랬지.”
너무 막 대했나 싶어 승지가 한 발 물러섰다.
어쨌든 상대방은 성좌였다.
광대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쓸모없는 기운에도 불구하고 일단 굽혀주기로 했다.
“와, 기쁘다. 놀랍네. 신기하니까 소개 좀 다시 해 줄래.”
놀리는 건지 진지한 건지 가늠해보던 대화창이 좀 느리게 나타났다.
[너 이름이 뭔데?]
“채승지.”
잠시 후 제대로 된 상태 창이 떴다.
[ 인간 : 채승지
계약자 : 웃고 있는 광대 1.
메인 미션 : 비어있음
서브 미션 : 튜토리얼 (1)
성좌 연결도 : 10 %
스킬 : ???, ???, ??? …
스탯
힘 : 7
민첩 : 12
지능 : 10
체력 : 6
행운 : 0 (+1~99) ]
“오….”
상태 창을 쭉 훑어보던 승지가 감탄했다.
“그냥 광대도 아니고 광대 1이네.”
[…….]
“완전 엑스트라구나, 너.”
파직. 갑자기 나타나 있던 상태 창이 모두 사라졌다.
“야, 야?”
당황한 승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갔냐?”
아무리 불러도 띠링 소리나 상태 창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이, 광대님?”
혹시나 싶어 공손하게도 불러보았지만, 아예 사라진 것처럼 존댓말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흠.”
멋쩍어진 승지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취소됐나 보네.”
[취소 못 해.]
“에이 씨! 깜짝이야.”
불쑥 다시 나타난 대화창에 그가 무심코 욕설을 내뱉었다.
둥둥 떠다니는 대화창이 묘하게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각성자가 됐으니 우린 좋으나 싫으나 연결된 상태라고.]
“그러냐? 어째 넌 싫다는 것 같다.”
[네가 처음 보여줬던 반응을 생각해봐! 광대라고 무시부터 해놓고 양심이 없냐?]
할 말 없군.
“그건 미안. 나도 놀라서.”
[후. 처음 만나는 자리니까 나도 용서해주지.]
대화창으로 말하는 주제에 한숨까지 쉬어대네.
좀 웃긴다고 생각하며 승지가 팔짱을 꼈다.
“아무튼 설명하던 거 계속 해봐.”
[정말이지 내가 기대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대화창이 투덜거리며 띠링띠링 설명을 띄웠다.
[지금 너와 내가 얼마나 연결되었는지 상태 창으로 볼 수 있지? 미션을 수행할수록 내가 이곳에서 쓸 수 있는 힘이 늘어나. 그럼 그만큼 네게 줄 수 있는 힘도 커지지.]
“그럼 지금 네 힘의 10퍼센트만 개방했다, 뭐 이런 거냐? 너 사실 알고 보니 겁나 센 거야?”
[아니! 성좌 연결도는 말 그대로 내가 얼마나 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뿐이야.]
쳇, 실망이다.
“근데 왜 행운은 0이야?”
[스탯은 원래 네 능력을 의미해. 보통 평균이 10 정도? 아무리 현실에서 능력이 안 좋아도 5 밑으로 내려간 사람이 드물던데….]
상태창이 안쓰럽게 말을 끊었다.
[너 정말 운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갑자기 치명타를 맞은 승지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까짓 스탯은 올리면 그만이지.”
[와! 바로 극복하려는 저 열정! 투지! 좋아, 승지야! 강해져서 우리 함께 세계를 복구시키는 거야!]
“급발진 하지 마라. 어쨌든 대충 각성자가 뭐하는지 아니까 넘어가자고.”
각성자가 아니더라도 성좌에 대해선 모를 수가 없었다. 온갖 곳에서 떠들어댔으니.
이세계인을 현실로 옮기고 성좌로 임명해 각성자를 만들어내는 게 바로 이세계의 신이었다.
성좌가 된 이세계인은 각성자에게 한 명씩 달라붙어서 능력을 키웠고, 신도 보상으로 영생과 부귀영화, 소원 한 가지를 약속했다.
사방에서 괴물이 튀어나오고 성좌가 나타나는데 신이 내건 조건까지 끝내준다?
이러면 아무리 생판 모르는 세계라도 자기 일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나한테도 기회가 온 거야.
솔직히 자신의 인생에서 처음 나타난 엄청난 기회였다.
행운 스탯 0이 증명하듯 그동안 자신의 인생에서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일단 스킬부터 보여줘 봐.”
[잠깐만 기다려!]
아까 몸에 스며들어갔던 빛의 가루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호오.
승지가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사이 ???으로 가득했던 스킬창이 새롭게 채워졌다.
[ 완벽한 콤보 : 때릴수록 강해진다. 99회 연속 공격에 성공하면 특별한 부가효과가 나타난다. 단, 콤보 실패 시 페널티 발생.
상단! 중단! 하단! : 모든 공격을 상단 중단 하단으로 나눠서 방어한다. 방어 가능 수준은 본인의 능력에 따라 결정된다.
광대의 균형 : 언제 어디서든 완벽한 균형을 잡을 수 있다.
광대의 축복 : 이세계에서 발생한 페널티를 랜덤으로 바꿀 수 있게 해준다.
??? : 성좌 연결도가 낮아 아직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 : 성좌 연결도가 낮아 아직 사용할 수 없는 스킬입니다.
… ]
“오오, 신기하네. 이걸 어떻게 쓰는 거야?”
[궁금해? 그럼 바로 튜토리얼을 시작해서 알아보자!]
“지금 바로?”
[응!]
번쩍!
성좌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승지를 이동시켰다.
얼떨결에 옮겨간 승지는 뒤바뀐 장소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