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세상이 망해갈 땐 일단 먹어 (2)
파스스!
마왕의 무기에 잘린 큐라는 평소와 달리 둘로 나뉘며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광대가 숨을 죽였다.
“해, 해치웠나?”
“얌마 그런 소릴 하면.”
“이번 건 좀 아팠어. 자기.”
…죽지 않게 된단 말이다.
승지는 한숨을 쉬며 무기를 다시 원래 형태로 되돌렸다.
“보내줄 때 가라.”
“어머, 무서워. 그래도 난 얼마든지 기다려줄게, 자기. 마음 바뀌면 내 이름을 불러줘~!”
떠도는 연기가 한줌의 재처럼 사라졌다.
승지는 큐라가 뭐라고 하든 관심 없었다. 지금 그의 정신머리는 쪼끄만 광대 녀석에게 쏠려있었으니까.
“그래서, 그 꼴은 대체 뭐야?”
“나도 모르겠어.”
광대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크기만 빼면 어느 모로 봐도 살아있는 인간 같았다.
“혹시 죽기 전 모습으로 부활한 거냐?”
“나도 그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살아있었을 때랑 모습이 달라.”
광대가 방울을 딸랑거리며 몸을 돌렸다.
“이 때쯤이면 다나우가 마왕이 될 결심을 한 초창기 모습인걸. 난 그 이후로 십 년은 더 지난 다음에 죽었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젠장.”
승지는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는지 무작정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검색창을 뒤져도 자신처럼 성좌가 튀어나왔다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동안 광대는 몸을 갖게 된 게 신기한지 소파 위쪽을 열심히 걸어 다녔다.
개들도 더 이상 광대가 장난감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킁킁거리며 코를 들이댔다.
혼자 태평한 광대가 만세하듯 팔을 펴더니 개들의 코를 만져댔다.
“우와! 촉촉해!”
…저거 정말 아무 생각 없는 거냐.
헛웃음이 터진 승지가 검색을 뚝 끊었다.
“놀지만 말고 대책을 세워라, 이 광대 놈아.”
“하지만 광대는 노는 게 직업인데….”
“웃기는 게 직업이지. 그리고 지금처럼 내가 웃을 기분이 아닌 적이 없었거든?”
눈이 동그래진 광대가 뽈뽈 거리며 소파 팔걸이로 기어 올라왔다.
“승지야 슬퍼?”
“아니, 빡쳐.”
“난 이렇게 승지를 만질 수 있어서 기쁜걸.”
광대가 꼬물거리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승지는 뭐하나 지켜보았다.
광대는 소파 앞에 만들어둔 인벤토리로 쏙 떨어지더니 승지의 손바닥 위에서 다시 톡 나타났다.
인벤토리의 문을 이용한 이동이었다.
“허, 그런 식으로도 쓸 수 있었냐.”
“인벤토리 크기만 허락한다면! 꼭 순간이동 같지?”
광대가 해맑게 웃었다. 나름대로 귀여움을 부린 거였는데 승지는 딴 데를 보고 있었다.
“……그거다.”
“응?”
“순간이동!”
“캑!”
승지가 갑자기 광대를 잡는 바람에 성좌가 바동거렸다.
“승지야 나 숨 막혀!”
“너 주머니 좀 들어가 있어라! 아니다, 가다가 떨어지겠는데. 인벤토리 열어봐.”
승지의 말에 인벤토리가 스륵 열렸다.
“갑자기 왜 그래?”
“너처럼 순간이동 하는 인간이 있잖아!”
“!”
광대가 눈을 크게 떴다.
“번태 아저씨?”
* * *
광대가 꼭 승지의 손에 매달려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승지는 한쪽 손을 주머니에 푹 쑤셔 넣은 채 달렸다.
그런 자세로 뛰었어도 어둑시니 길드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드래곤이 나타났을 때 무너졌던 건물은 이제 막 복구공사를 하느라 시끄러웠다.
그런데 인부들 말고도 온갖 인간들이 길드앞에 몰려 들어와 있었다.
“번태는 얼굴을 보여라!”
“우리는 진실을 원한다!”
“각성자들은 대체 비각성자들로 뭘 하려는 거냐! 우린 당신들의 비상 금고가 아니다!”
“이게 또 뭔 개지랄이야?”
승지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을 보며 기가 막혀했다.
어둑시니 길드는 막아서는 사람도 없이 그냥 굳게 문을 닫아 걸어두기만 했다.
어떤 반응도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이.
주머니 속에서 꿈틀거리던 광대가 승지의 손가락을 밀어냈다.
“승지야!”
“야, 나오지 말라니까!”
“그 날 이후로 번태 아저씨가 또 언론에 노출이 안 되어서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는 중인가 봐!”
팔다리로 스마트폰을 꽉 껴안은 광대가 손바닥으로 화면을 텁텁 내렸다.
“저번 알러트 소탕 때는 입장 표명을 바로 했는데 왜 이번에는 안하냐고 난리인걸!”
“아 씨 귀찮게. 뭐하러 잠수를 타는 거야.”
“번태 아저씨한테도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닐까?”
그건 곤란한데.
승지가 주머니 위로 손을 덮었다. 단순한 기자들과 달리 시위가 벌어진 곳이라 일반 시민들이 많이 섞여있었다.
저곳을 각성자인 자신이 힘으로 뚫어봤자 여론은 더 악화될 게 뻔했다.
인상을 쓰던 승지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왕의 무기를 꺼낸 그가 원하는 형태로 변형시킨 다음 사람들 머리 위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소리를 쳤다.
“메인 미션 떴다!”
“뭐?!”
“위, 위를 봐!”
“꺄아아악!”
검고 촉수가 달린 괴물로 변한 마왕의 무기가 쩍 벌어진 채 공중에서 떨어졌다.
당연히 괴물이라고 착각한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으아아아악!”
“이봐! 괴물이라고! 당장 튀어나와!”
몇몇은 방금 전까지 비난하던 각성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게처럼 옆으로 기어 다니는 마왕의 무기를 보고는 쏜살같이 도망갔다.
승지는 그 틈을 타 흩어진 사람들을 지나쳤다.
“잘했다.”
“기특해!”
좀 징그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광대도 승지를 따라 무기를 칭찬했다.
수줍다는 듯 원래 형태로 돌아온 무기를 회수한 승지가 길드 문을 두드렸다.
“문 좀 열어봐요! 나 채승지니까!”
“…….”
“안 열면 부수고 들어갑니다.”
뿌득.
성질 급한 승지의 손에서 벌써부터 손잡이가 부서졌다.
끼익.
그러자 흰색 가운을 입은 길드원이 마침내 나타나 문을 열어주었다.
“지금은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번태 어디 갔어?”
승지는 무작정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번태 길드장님은 지금 아무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뭔 개소리야.”
그 잘난 양반이 갑자기 수줍음이라도 탄단 말인가.
“존나 중요한 일을 하나 물어볼 거니까 나오라고 해. 너희들 잘하는 그거 있잖아. 변신 포즈로 부르기.”
“안 돼요.”
짜증을 내려던 승지가 길드원 손목에 감긴 소환 팔찌를 보았다.
“아니면 잠깐 그것 좀 보자.”
“왜 이러세요!”
갑자기 승지가 손목을 붙잡자 길드원이 소스라쳤다. 그도 전투 계열 각성자인지 하마터면 손목을 잡은 채 천장으로 날아갈 뻔한 승지가 급하게 허공답보로 공기를 박찼다.
“해치려는 게 아니야! 확인할 게 있어서 그렇다고!”
“놓으세요!”
“우리 길드원한테 그러지 말아주게.”
“!”
어느 새 나타난 번태가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드장님!”
“안 나온다더니?”
승지가 길드원을 노려보았다. 손목이 빨개진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막아달라고 부탁했네. 미안하지만 지금은 별로 좋은 때가 아니라서 말이야.”
벌써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난 번태가 피곤한 표정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사자를 찾은 승지는 거침없이 질문했다.
“당신 순간이동. 그거 스킬 맞아?”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인벤토리.”
승지는 짧게 던졌다.
번태는 그다지 표정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승지랑 씨름 중이던 길드원에게 다시 말했다.
“잠깐 얘기는 해봐야겠네. 미안하게 됐구만.”
“제가 경호해드리겠습니다.”
“아닐세. 이 친구는 암살 같은 걸 시도할 친구가 아닐세.”
“길드장님은 너무 사람을 잘 믿으시잖아요.”
“나 지금 듣고 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던 길드원이 덧붙였다.
“하다못해 신체검사라도 하게 해주세요.”
“허락하겠나?”
“마음대로.”
승지는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다. 주머니에서 뭐가 차는 느낌이 들었다.
“아, 잠깐. 여기만 빼고.”
그가 황급히 한 쪽 주머니를 덮었다. 광대가 있다는 걸 까먹었던 것이다.
당연히 수색을 하려던 길드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뭡니까? 지금 일부러 감추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승지가 애매하게 주머니를 눌렀다.
얼른 인벤토리로 들어가라는 뜻에서 누른 거였는데 광대 이놈 자식이 방울까지 딸랑이며 머리를 쿡쿡 찍어댔다.
결국 참지 못한 승지가 빠르게 속삭였다.
“왜 그래? 인벤토리에 들어가 있어!”
“…….”
주머니에서 무언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목소리를 낮췄어도 사람이 코앞이다.
당연히 승지의 말을 들은 길드원이 미간을 모았다.
“지금은 제가 스킬로 인벤토리를 봉인해뒀습니다. 아마 주머니에 넣어둔 것도 그래서 못 움직이는 거겠지요.”
“젠장.”
“뭘 갖고 온 겐가?”
승지가 나직하게 욕을 내뱉고 번태가 관심을 보였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저 놈도 자기 길드원일 텐데 알아서 입단속 할 테지.
거짓말이나 비밀에 능통한 성격이 아닌 지라 결국 승지는 대놓고 불룩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좋아. 이거에 대해서 아는 거 있냐?”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 승지가 주머니에서 광대 성좌를 꺼내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처음엔 인형처럼 보이던 앙증맞은 광대가 번태와 길드원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안, 안녕하세요?”
광대가 수줍게 인사했다.
* * *
콰당! 쾅!
번태가 미친 듯이 다리를 빠르게 놀렸다.
광대를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던 번태는 덥석 성좌를 손으로 덮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 같았다.
“당장 집어넣게!”
“역시 댁은 이게 뭔지 알고 있었지!”
승지가 하! 하고 의기양양해졌다.
한 번에 잭팟이다.
번태의 반응은 알고 있는 걸 넘어서 아주 도통한 경지에 이른 듯 했다.
인사를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 대신 꽉 손바닥에 붙잡힌 광대 성좌가 아우성을 쳤다.
“승지야, 나 답답해!”
“미안하지만 조금만 참아주게! 그리고 말도 하지 말고!”
승지보다 먼저 번태가 대신 답했다. 아깐 피곤하고 지쳐보이더니 지금은 완전 번개다.
“따라오게! 정현 군은 이 일을 못 본걸세!”
“네! 알겠습니다, 길드장님.”
“역시! 너네 다 뭘 알고 있긴 했지! 바깥에서 왜 시위하나 했더니 걔네들도 쓰발 직감이 있네!”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닐세!”
번태는 무작정 승지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색이 새파래진 게 보통 놀란 게 아닌 것 같았다.
뭘 저렇게 놀라나 싶으면서도 큐라가 아니라 번태에게서 답을 들을 수 있는 건 다행으로 여겨졌다.
내가 사람 하난 정확히 찾는다니까.
하긴 번태가 요즘 들어 계속 수상하게 굴긴 했다.
두 가지 의문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으면 나야 개 이득이지.
성큼성큼 그를 쫓아가며 승지가 계속 말했다.
“이봐. 설명은 하고 좀 끌고 가지? 순간이동 하는 것도 이거랑 무슨 관련이 있는 거냐?”
“다 얘기해주겠네! 우선 이동하세!”
아직도 파티장에서 묶고 있던 꽁지머리가 파직거리며 흔들렸다. 그걸 보고있던 승지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댁 지금 왜 순간이동 안 쓰냐?”
파리하게 수염이 돋아난 번태가 아주 잠깐 멈칫했다.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거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