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넌 마왕이고 동시에 버러지다 (4)
진정한 고수는 발을 떼지 않고도 적을 섬멸한다고 했다.
한쪽 발로 범윤오를 밟은 채 유월이 대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은 완벽한 구체를 이뤘다.
유월은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내린다면 그걸 쪼개 가랑비로 만드는 사람이었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요정의 살점과 날개가 빗방울보다 가늘어졌다. 범윤오가 끙끙거리며 코를 틀어막고, 한 숨 쉬어간 유월도 마스크를 썼다.
물론 유월이 아래로 내려온 모든 요정들을 사냥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유월의 학살을 본 요정들이 더 이상 접근하지 않고 다른 골목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흘끗 그들을 본 유월은 요정들을 쫓지 않았다. 이미 범윤오가 나타났을 때부터 주변의 사람은 모두 사라졌고, 다른 랭커들이 처리해줄 테니까.
끈질긴 몇몇을 처리하며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십칠! 칠십팔!”
광대가 계속 큰소리로 외쳤다.
승지에게만 뜨는 상태창을 번태에게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있죠?! 칠십구! 마지막 콤보가 되기 전에, 팔십! 저쪽으로 이동하는, 팔십일! 거예요! 팔십이!”
“알고 있다네!”
번태는 유쾌하게 번개를 휘둘러댔다. 전류에 감전된 요정들이 부르르 떨며 끌려오면 바로 망치가 날아갔다.
승지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무기를 휘둘러댔다.
“이거 쫄 잡다가 뒤통수 맞는 거 아니야?”
“걱정 말게! 나르키스는 게으른 마왕이지! 부하들이 자신을 위해 먹이를 준비하기 전까진 움직이지도 않아!”
마치 그물 낚시라도 하는 것처럼 번태는 시종일관 여유로웠다.
“하여튼 마왕 놈들은 다 쓰레기라니까.”
“그러게! 팔십칠!”
“뒤통수 맞을 걱정보단 때릴 상대가 도망가는 걸 걱정하는 게 좋지 않겠나?”
승지와 번태가 요정 사냥을 도맡은 동안 해외 랭커들은 계속 귀환 주문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제 마법진은 제법 커져 구름을 절반이상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 전에, 팔십구! 승지가 잡을 거예요! 구십! 구십일!”
곧 다다를 99콤보에 맞춰서 용이 서서히 다시 날아가기 시작했다.
80콤보인 필살기가 아니라 99콤보를 쓰기로 한 건, 나르키스 마왕을 두르고 있는 구름 때문에 보험 삼아 추가한 것이다.
기껏 콤보를 채워서 때렸는데 구름만 사라지면 허무하니까.
마왕을 등지고 날아가던 번태가 마지막 희생양을 낚아오며 물었다.
“역시 자네 내 길드로 올 생각 없나? 지금까지 각성자로 살아오며 알아낸 것들을 모두 알려주겠네.”
“난 배우는 거 싫어해.”
“랭킹 1위인데도?”
“그러니까 더 싫지.”
승지는 시간을 맞추기 위해 전류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요정을 붙들었다.
“지금 그런 말을 꺼내는 걸 보니 뭔가 책임을 지우고 싶나 본데, 사양한다.”
번태는 아쉽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럼 내 길드를 물려주는 것도 싫나? 배우는 건 싫어도 돈은 좋아하는 거 같던데.”
“노망났어?”
승지는 날아가는 속도에 맞춰 마지막 타격을 계산했다.
“한창 팔팔하게 살아있는 양반이 뭘 물려줘.”
“무엇이든 혼자 하는 건 힘들거든.”
번태의 머리가 쑥 내려갔다. 광대의 구령에 맞춰 용의 뒤쪽이 승지를 날려 보내기 위해 날렵하게 휘어졌다.
“동료가 되어달라는 뜻이야!”
“구십팔!”
가루처럼 으깨지는 요정을 손에서 놓으며 승지가 구름 속으로 뛰어들었다. 휘감기는 느낌 속에서 그는 강하게 망치를 쳐올렸다.
[ 99콤보! ]
[ 완벽한 콤보가 발동됩니다! ]
곧장 스킬 특유의 프레임 저하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데 승지는 느려지는 프레임 속에서 한순간 도륵 움직인 마왕의 머리를 보았다.
뭐지?
원래 완벽한 콤보를 사용하는 중에는 자신을 제외한 세계가 모두 느려져야만 했다.
그런데 나르키스는 지금까지 당했던 괴물들과 다르게 분명히 반응한 것이다.
조금 당황했지만 승지의 몸은 여전히 완벽한 콤보를 발동 중이었고, 마왕보다는 빨랐다.
하. 급이 다른 마왕이라 이거냐? 그래봤자 이미 맞았어! 넌 뒤진 목숨이다!
나르키스도 알았다. 그러나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시익, 날카로운 소리를 낸 나르키스가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
갑자기 승지의 몸이 확 기울었다.
날개를… 끊었다!
눈을 부릅뜬 그가 다급히 손을 뻗었지만 이미 발동된 스킬은 승지를 계속 그 날개를 완전히 분쇄해놓도록 붙들어놓았다.
광장만큼이나 거대한 날개가 프레임에서 해방된 순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졌다.
승지의 고함과 함께.
“젠장, 도망친다!”
“!”
마왕의 소멸을 기다리고 있던 번태가 빠르게 용을 몰아쳤다.
그러나 완전히 고치에서 벗어난 나르키스는 한쪽 날개를 잃은 채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상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범윤오였다.
“신체를 잃어서 힘을 보충하려고 그러는 거야! 저렇게 자극받은 마왕은 행성 하나를 다 먹어치울 수도 있어!”
“누가 그렇게 내버려둔대?”
승지도 급하게 추락했다. 추진력이 없는 그는 분통이 터질 만큼 느리게 떨어졌다.
반면에 반쪽짜리 날개라도 어마어마한 크기라, 나르키스는 이미 활강해 지상의 공기를 휘저어놓고 있었다.
“저 정도는 상대하기 버거운데.”
유월이 중얼거리며 검을 다잡았다. 그가 발로 꾹 누르자 범윤오가 마구 버둥거렸다.
“놔줘! 도망가야 한다고! 이대로 먹힐 순 없어!”
유월은 미끼를 그대로 누른 채 호흡을 골랐다. 분노에 찬 머리가 집채만한 크기로 날아오는 걸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나르키스의 유려한 콧잔등에 그대로 칼을 꽂아 넣었다.
끄드드드득!
모기가 바늘을 찌른 거나 다름없었다. 칼 손잡이까지 깊게 파묻은 유월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더욱 분노한 나르키스의 날개가 광포하게 휘둘러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무지갯빛으로 물들었다.
햇빛을 반사하던 건물들의 유리가 기묘한 색으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나르키스가 뿌린 가루들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들이마시면 안 돼! 환각을 보게 될 거야!”
상공에 있을 때는 격렬한 바람으로 전달되지 못했던 가루들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호흡기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가루를 조금 들어 마시자마자 눈에 거품이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시야가 다각도로 번쩍거렸다.
“쿨럭…!”
승지가 기침을 하자 마왕의 무기가 혼자 날아오더니 승지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나르키스의 가루를 승지 대신 빠르게 흡수하기 시작했다.
“잘했어, 무기야!”
광대가 급하게 칭찬했다. 간신히 지상에 착지한 승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낀 환각제 속을 뛰어가기 시작했다.
보이는 게 없었으니 무작정 번개가 우르릉 거리는 쪽으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번태라면 맞는 방향으로 날아갔을 테니.
쿵!
날개가 잘린 나방처럼 퍼덕거리던 나르키스의 몸이 마구잡이로 빌딩에 부딪쳐댔다.
벌레가 꿈틀거리는 듯한 그 동작으로 이 거리가 순식간에 오염되어갔다.
만약 알러트가 계속 마약거래를 했다면 반드시 실패했으리라. 여기선 숨만 쉬어도 기존에 있는 마약보다 강력하게 뇌가 녹아내릴 테니까.
존재 자체가 해악.
강림해서는 안 될 존재, 마왕!
승지가 쉴 새 없이 욕을 지껄이며 달려갔다.
“어디냐! 튀어도 소용없어!”
완벽한 콤보가 제거한 게 날개라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 승지는 바로 메모라이즈를 걸어뒀다.
다시 보이기만 하면 이번엔 면상에다가 완벽한 콤보를 갈겨 주리라.
미친 듯이 마왕을 찾던 승지의 머리 위로 꿈틀거리던 나르키스가 다시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그런데 입에 뭐가 삐죽하게 튀어나온 채 물려있었다.
범윤오였다.
“인과응보 저 미친 새끼!”
승지가 쌍욕을 갈겼다.
그렇게 나르키스를 이용해서 마약을 만들어 대더니, 본인이 거기에 쳐 물리는 꼴이다!
범윤오는 완전히 환각제에 절여졌는지 흉측한 몰골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코에 일자 선으로 상처가 난 나르키스는 범윤오를 문 채 다시 날아가려고 했다.
저거 놓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날아가는 나르키스의 머리 위로 해외 랭커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을 방해하던 구름과 도망치던 날개는 승지가 제거해두었다.
드러난 마왕의 본체를 보며 그들은 직접 귀환 마법을 쓰겠다는 결심을 내리고는 모여든 것이다.
나르키스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마법진의 고리가 생겨났다.
이번에야말로 저 똘빡들이 성공하나?
승지가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마왕을 보내버리는 모습 대신, 환각 안개 속에서 용이 튀어나오는 광경을 보았다.
“저대로 보내선 안 돼!”
“억?!”
번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가며 뇌룡의 다리로 승지를 낚아챘다.
졸지에 함께 끌려가버린 승지가 급하게 훅 숨을 들이켰다.
번태는 지금껏 보지 못한 표정을 하고 용의 머리를 밟고 일어섰다.
“범윤오 군을 구해야 하네!”
“뭐?”
황당해진 승지가 비장한 표정의 번태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저 새끼를 구하겠다는 게 진심이었어? 저 정도 되면 본인이 자살한 거지! 망할 새끼!”
그러나 번태는 단순히 성좌를 되살리려고 범윤오의 목숨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하늘을 향해 날아가며 번태는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성좌신을 구해야 하네.”
“그게 이거랑 지금 무슨 상관….”
“범윤오군이 각성자로 돌아와야 더 심각한 일을 막을 수 있어. 더는 마왕 쪽으로 흘러나가게 둘 수 없으니.”
굳은 표정을 번태가 승지를 향해 지팡이를 던졌다. 엉겁결에 승지가 지팡이를 받았다.
“용은 내가 소환해뒀으니 조종만 맡게.”
“아니, 뭔 개소리냐고!”
번태가 훌쩍 용의 머리를 박찼다. 뜻밖에도 그가 용을 타고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빨랐다.
펄럭거리며 날아오른 번태는 정확하게 범윤오의 위로 떨어졌다. 그가 최악의 상태에 머물러있는 범윤오의 뿔을 붙잡았다.
“광대 자네라면 내 말이 들리겠지.”
광대가 흠칫했다.
“혹시 내가 실패한다면 그대의 계약자에게 망설임 없이 나를 죽이라고 전해주게.”
“네?!”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광대를 보며 승지의 눈이 커졌다. 광대는 처음으로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안 돼요! 그런 부탁은 들어줄 수 없어요!”
번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입을 꿈틀거리더니 범윤오의 뿔을 억지로 씹기 시작했다.
저게… 뭐하는 짓이야?
맹렬히 쫓아가는 동안 어렴풋이 번태를 볼 수 있던 승지는 눈을 의심했다.
나르키스에게 먹히는 범윤오를 다시 번태가 잡아먹으려는 모양새였다.
설마 번태도 마왕이 되려는 건가?
혼란이 커진 승지는 그제야 뻣뻣하게 잡고 있던 지팡이를 움직였다.
무작정 치켜든 지팡이를 따라 길게 용트림을 한 용이 속도를 더욱 높이기 시작했다.
“승지야, 빨리! 나르키스 마왕을 없애야 돼!”
광대가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자신이 본 걸 제대로 설명하기가 버거웠다.
그건 나르키스보다 위에 떠있던 해외 랭커들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각성자라면 갖고 있는 경계 스킬이 지금 막 번태에게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들의 웅성거림으로 사태를 파악한 광대가 비명처럼 외쳤다.
“번태 아저씨는 지금 성좌를 버렸어! 그리고 범윤오를 자신의 성좌로 만들려고 하는 거야!”
승지는 그게 가능하냐고 외치는 대신 뇌룡을 움켜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메모라이즈!”
[ 메모라이즈 발동! ]
완벽한 콤보를 사용하려는 승지에게 광대가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지금 저 세 사람은 여기에 있으면서도 이세계의 관념과 함께 뒤엉킨 상태야! 목표를 신중하게 정해야 해!”
존재의 삭제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해야만 한다.
그것을 위한 완벽한 콤보다.
“오냐, 그래! 망할 마왕 새끼들만 다 조져버리는 거다!!”
번개가 치고 붉은 섬광이 나르키스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게 움직이는 나르키스의 거대한 몸이 곧장 프레임에 갇혀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맞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몸으로 승지가 희열에 찼다.
그런데 느리게 움직이는 프레임 속에서 번태가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왜 웃어?
잘했다는 의미인가?
어쨌든 목표를 찾아낸 완벽한 콤보는 발동되어 마왕만을 깔끔하게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