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노인을 위한 제국은 없다 (3)
“아무래도 자네를 상대하기엔 이걸로는 부족하겠어.”
불길한 대사다.
야, 그런 말 하지 마. 마치 숨겨놓은 힘이 더 있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 필요 없어!
승지의 간절한 외침을 당연히 벨타보타가 들어줄리 없었다.
“오너라! 지저의 괴물이여!”
하, 진짜.
“하여튼 말 들어먹는 새끼가 없어요.”
땅에 뿌드득 균열이 가며 검은 넝쿨이 뿜어져 나왔다. 거미줄처럼 다닥다닥 바닥을 메운 검은 넝쿨은 곧 승지에게 당한 스켈레톤의 뼈를 감싸더니 꿀렁이는 거인의 골격으로 만들었다.
[캬아아악! 골렘이다!]
성좌가 비명을 질렀다. 끈적한 벌레가 다닥다닥 달라붙는 것처럼 골렘이 진득하고 검은 팔을 뻗어왔다.
“뭐해, 피해!”
[으앙 징그러! 구르기!]
성좌가 울면서 커맨드를 입력했다. 연달아 바닥을 쓸며 굴러간 승지가 기상 킥을 날리며 벨타보타에게 접근했다.
뭘 소환하든 일단 본체를 잡으면 사라지겠지!
승지가 훨씬 가까워진 벨타보타를 노려보았다. 그는 승지를 두려워하는 대신 웃으며 쩍 입을 벌렸다.
“뭘 그리도 필사적이란 말인가! 제국의 인도에 따라 편하게 안식을 맞이하시게!”
“너 같은 미친놈이 황제가 될 제국이 불쌍해서 이런다, 새꺄!”
“하하하하 어리석은 것! 옥새가 없어도 내 몸엔 황족의 피가 흐르고 있거늘!”
“뭐야?”
그냥 또라이가 아니었어?
벨타보타가 득의양양하게 눈을 번득였다.
“그 옥새는 원래 내게 주어져야 할 것이라 가져왔을 뿐! 어리석은 후계자가 내게서 훔쳐간 것이야!”
“그래서 죽인 거냐? 그래서 마왕을 끌어들여 배를 습격했어?”
벨타보타가 새까맣게 물든 이를 드러냈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표정이다.
“마왕은 우연이었지만… 그 모든 인간들 중에 나만 살아남은 건 제국의 뜻이겠지.”
답이 없군.
승지가 더 말하기도 전에 몸이 휙 날아갔다.
[아차, 콤보도 잊으면 안 되지!]
성좌가 다시 마구잡이로 스켈레톤을 때렸다.
[ 54콤보! ]
슬슬 콤보가 붙자 그토록 단단했던 스켈레톤의 뼈가 성냥개비처럼 부러져갔다.
물론 그렇게 손쉽게 상대하기엔 골렘이 쩍쩍 달라붙는 몸을 끌고 승지에게 돌격해왔지만.
[으아! 으아!]
성좌는 온갖 시야를 다보며 승지까지 조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벨타보타가 계속 중얼거리는 말은 승지만 들을 수 있었다.
“추락한 후계자를 찾아 제국이 보낸 사자들이 몇 번이고 찾아왔지만 옥새를 찾지 못한 몸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어.”
“후계자 살인자라서 돌아갈 수 없었겠지!”
승지의 비난을 벨타보타는 무시했다.
“하지만 그대로 사자들을 돌려보내면 옥새가 여기 있다는 걸 들키겠지? 흐흐, 흐흐흐흐!”
들을수록 환장하겠네. 미쳐도 곱게 미칠 것이지 제 나름의 논리를 중얼대는 걸 보니 더욱 그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지만.
뿌드득!
“크악!”
기어이 승지를 따라잡은 골렘이 오른쪽 팔로 그의 어깨까지를 삼켜버렸다.
[꺄악! 승지야! 미안해! 못 피했어!]
성좌가 허둥거렸다. 꾸물거리는 골렘의 살이 팔을 으스러트릴 듯이 조여 왔다. 승지가 급박하게 소리쳤다.
“크윽, 잡기면 내가 뭐라 그랬어!”
[같은 방향으로 눌러서 잡기 풀기!]
상단 버튼에 위치한 잡기, 흔들기, 때리기 중에서 잡기는 오른손이 먼저 나가고 때리기가 왼손이 먼저 나간다는 사실은 이미 검증해두었다.
질질 승지를 끌고 가려는 골렘의 오른팔에다 성좌가 늦지 않게 잡기 버튼을 눌렀다.
펑!
커맨드가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강제로 골렘에게서 승지의 팔이 뽑혀 나오며 터졌다.
성좌는 엉망이 된 승지의 팔에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무엇이 승지를 위한 길인지는 잘 기억해두고 있었다.
사삭!
그대로 골렘의 오른팔을 감싸고 매달린 승지의 몸이 무릎을 들어 찍었다.
퍽! 퍼벅!
[ 60콤보! ]
[ 61콤보! ]
[ 62콤보! ]
쏟아지는 콤보 창에 성좌가 간신히 진정했다.
[괜찮아! 아직 콤보는 무사해!]
내 몸을 더 걱정해라, 젠장.
승지였다면 방금처럼 으스러진 팔로 골렘에게 매달려 일격을 가할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좌가 커맨드를 입력하면 강제로 움직이는 몸이었기에 고통을 무시하고 공격할 수 있었다.
조종당하는 게 쓸 만한 건지 아닌 건지. 살아남으면 알게 되겠지.
입안에서 느껴지는 쇠 맛을 삼키며 승치의 눈이 가라앉았다.
노인의 몸은 빈약하기 그지없어 한 대만 때려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때릴 수만 있다면 말이지만!
승지가 눈으로 불을 뿜었다.
그러자 벨타보타가 울컥 피를 토했다.
“크훕!”
[어?]
어라, 아직 안 때렸는데?
승지의 눈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 눈으로 빔을 쏘는 스킬이라도 얻었던가?
상황을 파악한건 역시 성좌가 빨랐다.
[이런! 역시 나이든 몸으로 이만한 괴물들을 다루는 건 무리였어! 한계치를 넘은 마법이 폭주하고 있는 거야!]
“야! 그만 둬!”
승지의 눈이 뒤집혔다.
“이 생고생을 시켜놓고 지금 자연사를 해버린다고?”
[아니, 자연사는 아닌 거 같은데… 저, 저 나이면 자연사인가??]
자연사든 아니든 승지로서는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 어딜 먼저 편하게 깔아질 셈이냐! 아직도 골렘한테 당한 내 팔에서 피가 흐르는데!
살면서 악당이 생존하길 바란 적은 없었지만, 지금은 예외다!
“그대로 죽으면 죽여 버린다!”
“큭큭큭, 나는 죽지 않는다…!”
벨타보타가 입가에 흐른 피를 닦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제발 죽지 마라! 조져 버릴 테니까!
승지의 삐뚤어진 바람에도 불구하고 벨타보타의 몸은 시시각각 기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서있는 것도 불안정하던 몸이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저 자식이!”
[됐어, 승지야! 조금만 더 버티면 벨타보타가 무너질 거야!]
아니 그걸 바라는 게 아니라니까. 난 내 손으로 족쳐야 해!
승지가 원통한 만큼 벨타보타도 한스러운지 최후의 힘을 짜내듯 골렘이 포효했다.
“쿠오오오!”
와그작. 승지 주변에 있던 마지막 스켈레톤이 부서졌다. 이제 콤보를 이어나가려면 무조건 골렘을 상대해야만 했다.
“쿠오!”
쾅!
승지의 주먹과 골렘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크윽!”
이젠 가드를 올릴 수가 없었다. 골렘의 가드를 막고 대신 스켈레톤을 공격하는 식으로 콤보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스켈레톤을 모두 잡은 지금은 가드를 올렸다간 콤보가 바로 끊기고 말 것이다.
지금처럼 강한 적을 상대하는 데다 콤보가 올라간 상태에서 콤보가 끊긴 페널티를 받았다간 치명적이야.
결국 최선의 선택은 공격뿐이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 공격이 최선의 방어!]
성좌가 닥치는 대로 때리기와 발차기 버튼을 연타했다. 상대는 골렘이었기에 아예 가드 할 생각조차 없어서 가능한 짓이었다.
그래, 어디 무식하게 난타전 해보자!
바위에다가 주먹을 때리며 수련하는 인간처럼 승지가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바위와 달리 골렘은 무시할 수 없는 묵직한 주먹으로 되받아쳤지만, 성좌가 단단히 조종간을 잡고 있었기에 멀리 날아가지 않을 수 있었다.
퍽! 빠악! 빠각!
부딪칠 때마다 충격은 커져만 갔다.
아마 고통으로 정신을 놓아버려도 승지의 몸은 콤보를 채울 때까지 계속해서 골렘을 공격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내 성좌도 잔혹한 면이 있다니까.
[으아아아아! 우리 승지 내버려둬!]
성좌가 포효하며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내리꽂았다.
[ 97…! ]
[ 98…!]
[ 99콤보! ]
콰아앙!
마지막 공격이 단숨에 골렘의 몸을 통과하며 박살냈다.
골렘은 뻥 뚫린 자신의 가슴을 느리게 내려다보더니, 점차 균열이 퍼져나가 종국에는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렸다.
승지가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돼… 됐다.”
[이겼다!]
눈이 반쯤 풀린 승지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다친 팔도 팔이지만 폐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성좌가 남의 몸을 조종하는 탓에 피하고 때리는 건 됐지만 잠깐 멈춰서 근육의 긴장을 풀거나 호흡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체적인 싸움에서 보면 아주 사소한 부분이었지만, 그걸 모조리 무시하니 몸의 압박은 어마어마하게 돌아왔다.
동작이 허락하는 만큼 최대한 깊은 숨을 쉬었는데도 몸이 엉망진창이다.
“허억…! 허억…!”
[승지야! 괜찮아? 흐아 저 피 좀 봐!]
싸움에서 이겼는데도 승지는 숨만 몰아쉬기도 바빴다. 전신에 비 오듯이 땀이 흐르고 열이 끓어올랐다.
다음엔, 반드시, 호흡에 대해서 알려준다!
승지가 생전 해본 적 없는 내공 수련에 투지를 불태웠다.
“하아… ㅆ발… 하… 적은?”
[아직 서 있어!]
벨타보타는 자신이 소환해낸 골렘이 먼지가 되어버린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헤 입을 벌렸다.
“이럴 수가… 쿨럭!”
벨타보타가 격하게 기침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입을 가린 손에서 기어이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야, 잠깐. 새끼야.”
설마 지금 죽으려는 건 아니지?
승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야! 야! 빨리 나 일으켜 세워! 저 새끼 한 대만 때리게 해줘!”
[뭐? 아니, 쉬어야지!]
그러나 이미 벨타보타는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은 뒤였다. 승지가 기껏 폐에 채워 넣었던 공기를 도로 토해냈다.
“죽지 마 ㅆ발 놈아!!”
“원통 하구나…….”
풀썩. 머리를 바닥에 박은 벨타보타는 그대로 움직임을 잃어버렸다.
빌어먹을.
이기고도 뒷맛이 더러웠다. 승지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그런데 더러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부극.
어디선가 거품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벨타보타의 귓구멍에서 검은 거품이 흘러나온 것이다.
승지가 눈을 부릅떴다.
저건 또 뭐야?
부글거리며 흘러나온 검은 거품은 이내 귀에서 얼굴 전체로 퍼지더니 그대로 팍 터졌다.
[히익! 녹아버렸어!]
노인의 시체대신 질척한 검은 액체 웅덩이만 남아버렸다.
충격적인 장면에 승지는 잠시 멍해졌다.
저렇게 죽는다고?
그럼 난파선에 있던 검은 웅덩이가 설마 모두 사람이었단 말인가.
승지의 속이 역해졌다.
또 마왕이냐. 빌어먹을 새끼들.
끈적거리며 흘러내린 검은 액체 속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승지야 저길 봐! 던전 열쇠야!]
불길하리만큼 새까만 열쇠였다.
“염소… 대가리….”
[뭐? …그러고 보니 같은 열쇠처럼 생기기도…….]
성좌가 주저했다. 고깃집에서 만났던 염소 머리를 한 마왕의 부하는 성좌에게도 꺼림칙한 존재였던 것이다.
잘못 건드리면 저주 받을 것 같은데, 저거.
바닥에 엎어진 채 노려보던 승지의 귀로 낯선 목소리가 후벼들었다.
“찾았습니다!”
타다닥. 땅을 타고 발소리가 울려왔다.
사람?
설마 떠났던 선원 녀석들이 돌아온 건가?
승지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낸 사람의 목소리는 훨씬 더 단호하고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으켜 세워라. 배로 데려간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승지의 팔을 부축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승지가 뻐근한 목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배의 그림자가 그들의 머리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