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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Clap your hands (3)

류의건은 그대로 떨어졌지만 칼에 찔려 죽진 않았다. 마왕이 약속한 대로 죽음은 게임에서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의 등에 칼이 닿은 순간 불이 꺼진 체스판은 게임이 끝난 말을 바깥으로 뱉어냈다.

[꺅! 또 어두워졌어!]

“끝난 건가?”

다시 불이 켜지자 승지와 유월은 바로 체스판 바깥 바닥에 엎어진 류의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게임이 끝나기 전에 칼날에 닿았던지 등에 빨간 자국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야, 괜찮냐?”

“죄송합니다.”

류의건이 단지 고통으로 쓰라린 게 아닌 얼굴로 다시 일어났다. 온전히 자신 때문에 첫 게임을 진 셈이니 자괴감이 들만도 했다.

진정하고 다시 얼굴이 하얗게 돌아온 유월이 얕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도 아쉬움이 드러났다.

“원래 그런 성격이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만회하겠습니다.”

“벌써 다음 상대를 정한 거야?”

큐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쉬엄쉬엄 해도 좋은데~.”

“시끄럽고 다음 상대나 정해.”

“후훗. 아직 내가 나설 차례는 아니지?”

“저한테 맡겨주시죠.”

미끈하게 생긴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저 놈은 관자놀이에 튀어나온 뿔만 빼면 진짜 인간처럼 생겼군.

유월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슥 나왔다. 속으로는 승부욕에 불 붙었는지 제법 자세가 비장했다.

[ 두 번째 대결! 퀸! VS 조커! ]

다시 어두워진 다음 나타난 전광판이 현란하게 빛났다. 이번에는 류의건 때와 정반대로 체스판의 끝과 끝에 둘이 서있었다.

[ 게임은? 거짓말 게임! ]

[ 거짓말쟁이가 여왕 앞으로 끌려왔다! 여왕이 당신을 참수하기 전에 거짓말로 먼저 함정에 빠트리자! ]

“아쉽지만 제게 전투 능력은 없어서 말입니다.”

멀리 서 있던 미끈남이 느끼하게 말했다.

“앞에 보이는 체스판의 칸은 모두 함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하는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맞히면 디딜 수 있는 발판으로 바뀌게 되죠.”

“…….”

유월은 잠깐 그를 쳐다보더니 함정을 씹고 가려는 듯 그냥 발을 떼었다. 그러나 불끈 힘이 들어간 다리와 달리 발바닥이 떨어지지 않았다.

“으음~ 먼저 자신이 말할 칸을 얘기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어요~.”

저 새끼 말투 빡치네.

사람 약 올리는 말투에 유월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머리 쓰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안타깝지만 그런 게임에 걸리셨군요! 함께 맞춰주셔야죠? 아름다운 분이시여.”

“A4.”

유월은 느물거리는 남자를 무시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칸의 이름을 부르자 발판에 불이 들어오며 붙어있던 유월의 발도 바닥에서 떨어졌다.

“움직여지네요.”

유월이 발을 들어 보이자 승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체스판 바깥에 있던 류의건도 상처를 대충 수습했는지 다가왔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자, 이번 게임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끼어들면 곤란하겠죠?”

미끈남이 싱글거리자 곧 목소리가 차단되는 듯 불투명한 막이 덧씌워졌다.

“뭐야? 이래도 되는 거냐?”

“네? 뭐라고요?”

승지의 입이 벙긋거리는 걸 본 유월이 손을 귀에 가져다 댔지만 알아듣진 못했다.

[어떡해! 정말 소리가 차단된 모양이야!]

“젠장, 우리한테만 들려서 뭐하냐고.”

답답해진 승지가 욕설을 중얼거렸다. 유월도 곧 어쩔 수 없는지 게임에만 집중했다.

미끈남이 말했다.

“자 당신 앞에 있는 발판은 아래로 떨어집니다. 제 말이 진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진실.”

믿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귀찮은지 유월이 빠르게 대답하고 칸 위로 올라갔다.

[ 땡! ]

유월이 칸 위에 올라서자 초록 전광판이 뜨며 푸른 물이 칼날처럼 솟구쳐 올랐다.

유월은 몸을 빼냈지만 또다시 발이 바닥에 붙어버려 결국 절반은 고스란히 물을 맞고 말았다.

“하하 이런. 아무리 처음이라지만 제 말을 너무 쉽게 믿으시는 거 아닌가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로 유월이 짧게 푸 하고 물방울을 뱉었다. 눈빛이 제법 사나워졌다.

유월의 말은 여전히 짧았다.

“B4.”

뭔가 격렬한 반응을 기대했던지 미끈남이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다음 칸에선 제 말을 믿지 않는 게 좋으실 겁니다.”

“거짓.”

유월이 성큼 발을 내딛었다. 이번엔 불꽃이 피어오르며 그의 피부를 구워버릴 듯이 타올랐다.

“하하! 안타깝지만 이번 말은 진실이었….”

“C4.”

웃음이 순식간에 걷혔다. 유월의 머리카락에서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나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뭐야. 어떻게 무사한 거야?”

[스탯이야! 체력 스탯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서 통하질 않는 거야!]

“무슨 금강불괴도 아니고. 사람이 불 속에 들어가도 간지러울 수가 있는 거냐?!”

[다른 스탯은 하나도 안 올리고 오로지 체력에만 집중했다면 저럴 수도 있어! 맙소사… 그럼 그렇게 무식하고 무거운 무기를 썼던 이유도 모자란 근력과 민첩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나봐!]

유월은 원래 무술을 배우던 몸이었으니 체력만 잡혀도 얼마든지 활용할 자신이 있었을 것이다. 원래 타고난 힘과 민첩 만으로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만큼.

게다가 성좌의 자체 스킬도 있을 테니, 어찌 보면 가장 튼튼한 탱커였다.

공격력이 제일 강해서 글라세로 토벌전에서 핵을 뚫는 역할을 한 게 아니라, 독액을 맞아도 가장 안전한 인간이라 그 역할을 맡긴 거였어!

이제야 깨달음을 얻은 승지를 뒤로 한 채 유월이 재촉했다.

“다음 질문. 빨리 말해.”

“이, 이게 무슨….”

“진실.”

이번엔 제대로 된 말도 아니었는데 유월이 먼저 대답하더니 앞으로 한 발 더 내딛었다.

당연히 정답일 수가 없으니 발판의 함정은 발동 되었다.

푸슛푸슛 튀어나온 창이 신발 밑창을 찔렀지만 유월은 간단히 발볼에 힘을 주어 날 째로 부러트렸다.

[우, 우와아….]

갈대처럼 꺾인 창대를 본 성좌가 감탄사를 흘렸다. 여유만만한 태도를 버린 미끈남이 경악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저, 저러면 함정이 전부 소용이 없잖아!”

“D4.”

“이, 이렇게 되면 게임이 아니잖습니까!”

“맞아.”

유월이 단조롭게 말했다.

“난 나한테 진실을 말하든 거짓말을 말하든 신경 안 써. 거짓말이면 위험해지는 건 상대방이니까.”

유월이 처음으로 유청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걸리면 죽여 버릴 거거든.”

“으, 으으…!”

완전히 예상이 무너져버린 미끈남이 초조하게 뒤를 올려다보았다.

“마왕님! 저런 상대로는 게임이 불가능합니다! 어서 다른 게임을…!”

“규칙대로 하는 중이잖아?”

구경하고 있던 클랩이 냉정하게 말했다. 자기편인데도 전혀 편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운이 없는 것도 게임의 일부지.”

“아아… 안 됩니다!”

“진실. E4.”

유월이 뚜벅 걸어 나오자 이번엔 발판이 잠잠했다. 그야 저 말은 진실이겠지.

도착까지 고작 세 줄 만을 남겨놓은 유월을 본 미끈남이 아예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말을 안 하면 진실과 거짓을 판명할 수 없으니 일단 유월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러자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월이 인벤토리를 열고는 그를 향해 칼을 집어 던졌다.

“우와앗!!”

쐐애액 날아오는 칼을 보고 당연히 놀란 미끈남이 펄쩍 뛰어올랐다. 비명을 지른 건 덤이다.

유월이 저세상에서 들려오듯 으스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짓.”

그래, 말을 안 하면, 소리를 지르게 하면 되지. 간단하네.

승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젠자앙!”

또다시 움직일 빌미를 주고 만 미끈남은 궁지에 몰리자 태세를 전환했다.

“좋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지만 체력이 그 정도라면 지능은 낮겠지!”

[앗! 세뇌는 안 된다고 했는데!]

“F4. 진실.”

유월은 자신을 향해 손을 치켜드는 미끈남을 보고도 피하질 않았다.

설마 다른 칸으로 이동하면 일직선으로 못 가고 빙 돌아가야 하니까 안 피하는 건가…?!

“나와라 매혹!”

하나도 매력적이지 않은 어투로 미끈남이 소리쳤다. 분홍색 안개가 푸슉 뿜어져 나왔다.

“정면으로 맞았잖아!”

지켜보고 있던 승지가 벽까지 바짝 뛰어가 붙었다. 불안해진 그가 거의 벽을 뚫어버릴 기세로 안을 지켜보았다.

“…….”

안개를 맞은 유월은 조용했다. 주술이 걸렸는지 망설이던 미끈남은 안개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뒤에야 겨우 안심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 채로 그가 중얼거렸다.

“후, 후후. 다행이다. 걸렸나보군. 세뇌까진 아니지만 이제 내 기분에 상하는 일은 하고 싶어지지 않아질 거….”

“진실.”

유월이 짧게 말하고는 지금까지 한 말은 개뿔 다 거짓말이라고 말하듯 확 손바닥을 펼쳐 그의 머리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끄아야아아아아!”

졸지에 머리가 벽과 유월의 손에 끼어버린 미끈남이 비명을 질렀다.

“왜, 왜!”

“아니, G4라고 먼저 말했어야 하나?”

유월이 중얼거렸다. 아직 체스 칸이 두 줄 남아있었지만 팔을 뻗은 유월의 상체는 충분히 그의 대가리에 닿고도 남았다.

발끝으로 몸을 지지한 유월이 점점 자신의 무게중심을 누르고 있는 손으로 옮기자 실시간으로 머리가 부서지는 고통에 미끈남이 비명을 질렀다.

“끄야아아아악! 말도 안 돼! 분명히 안개를 맞았는데…!”

“체력엔 심폐 지구력이 포함이고, 그 정도 시간동안 숨을 참는 건 일도 아니잖니?”

유월이 약간 피가 몰린 얼굴로 기세를 매섭게 피워 올렸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죄, 죄송합… 끄야악! 이러다 진짜 죽어요! 저 죽습니다!”

살벌한 유월의 모습에 성좌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아… 너무 무섭다…!]

혹시나 승지가 유월을 생각하는 마음이 줄었을까봐 성좌가 살짝 그를 확인했다.

안 그래도 멍하니 보고 있던 승지가 중얼거렸다.

“ㅈ나 예쁘다….”

[음! 괜한 걱정이었네!]

성좌가 깔끔하게 포기했다.

하긴 성좌도 이제 승지에게 만약 모종의 취향이 있다 해도 받아들여줄 만큼 성장했다.

애초에 성좌 자신부터 승지에게 리본이며 프릴을 갖다 붙이고 싶어 하는 놈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성좌가 속으로 대체 무슨 결론을 내리는 줄도 모르고 승지는 승리를 확신했다.

앞으로 까나 뒤로 까나 저건 무조건 이긴 거다!

결국 머리가 눌린 미끈남에게서 형식적인 질문을 끌어낸 유월이 마지막 칸인 H줄을 넘어가면서 두 번째 게임은 유월의 승리로 확정 지어졌다.

[ 게임~ 오버! 화이트 퀸 승리! ]

불이 꺼진 체스판이 너덜너덜해진 미끈남과 유월을 퉷 하고 뱉어냈다.

튕겨 나가는 순간에도 깔끔한 정파 무술의 자세를 취하고 있던 유월이 옷을 탁탁 털며 일어났다.

“머리가 좀 상했네요.”

체력으로는 보호할 수 없는 머리카락이 온갖 함정에 시달려 엉망이었지만, 유월은 바로 이때를 위해 길러왔다는 듯 끝을 잘라냈다.

그러자 길이만 약간 줄어들었을 뿐 여전히 본인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단발이어도 괜찮겠는데. 하긴 뭔들 안 괜찮겠냐. 유월인데.

승지가 멍청한 생각을 하는 동안 큐라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럼 우린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건가, 자기?”

“…자기라고 부르지 마라.”

뒤늦게 승지가 정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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