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노인을 위한 제국은 없다 (2)
벨타보타는 말한 방향은 승지가 온 방향과 반대쪽에 있었다.
“한참은 걸어가야 하네. 꽤 멀거든.”
“일부러 멀리 묻어두신 겁니까? 혼자서 꽤 힘들었겠는데요.”
“아무리 나라도 매일 무덤을 보면서 살아갈 자신은 없었네.”
노인의 말이 의외로 깊은 곳을 푹 찔렀다.
남은 길은 묵묵히 따라가는 승지를 보며 성좌는 잠깐 갸웃했다.
“바로 여기라네.”
노인이 걸어오느라 약간 힘겨웠는지 벅찬 숨을 내쉬었다.
[흐엑… 맙소사! 저게 다 무덤이야?]
강을 따라 늘어선 무덤은 아무리 초라한 흙더미라도 압도적인 면이 있었다.
많아봐야 무덤 몇 십 개일 줄 알았던 승지는 끝도 없이 늘어선 봉분에 당황했다.
“배에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탔었습니까?”
“그냥 배가 아니었거든.”
벨타보타가 시익시익 흩어지는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제국의 후계자가 타고 있던 배였어. 다들 아주 기대가 컸지. 안식의 제국에 새로 들어온 별을 축복하러 떠난 여행이었다네. 이주 희망자들로 배가 꽉 찼고, 환송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던 축제였어.”
[헉. 뭐야? 설마 저 할아버지가 살아남은 제국의 후계자란 거야?]
노인에게서 추락한 배에서 혼자 살아남은 후계자의 비애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느껴지긴 했다.
거리낌 없이 지치고 피곤한 모습을 보여주는 건 타고난 신분을 갖춰 그런 걸로 약점을 잡히지 않는 자들뿐이었다.
승지가 주차장 알바를 했을 때 그래도 되는 상대였기에 온갖 인간들이 다 왕 행세를 하려고 들었었다.
그런 놈들이랑은 다르단 말이지, 저 할배.
그저 나이를 먹어서 쉽게 약한 점을 내보인다기엔 어딘가 노회한 점이 엿보였다.
“어르신이 혹시 그 제국의 후계자십니까?”
노인이 선선히 웃었다.
“내가 후계자라고 말해봐야 무엇이 달라지겠나.”
[부정을 안 하네! 허엉! 이런 비극적인 일이 있다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게 살 제국의 후계자가 이렇게 혼자 늙어갔단 말이야? 슬퍼!]
성좌는 벌써부터 눈물을 찔끔 흘려댔지만 승지의 표정은 오히려 굳어갔다.
아니야. 앞뒤가 안 맞잖아.
아까 제국의 지배자를 향한 찬양은 본인한테 바친다기엔 너무 열렬했어.
승지가 처음으로 노인에게서 광기를 엿본 지점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세상에 어떤 인간이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극찬할 수가 있다고? 설령 그게 진심이더라도 피해야 하는 인간일걸.
내내 지속되던 위화감이 승지의 입을 벌렸다.
“그런데 어르신.”
“으응?”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그거야 당연히 배를 타고 오지 않았겠나. 달리 무슨 방법이 있다고.”
“왜 여기까지 왔는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그야 마땅한 이유를 갖고 있지 않겠나. 혹시 자네도 마왕을 만난 게 아닌가? 그래서 홀로 이 별에 떨어진 게지!”
[맞아! 우리도 마왕을 만났는데 어떻게 알았지?]
성좌가 눈치도 없이 대화창을 띄웠다.
바보 녀석아. 지금은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진실이 보일락 말락 감질 맛을 안겨주고 있었다.
승지의 말이 더욱 신중해졌다.
“그럼 왜 데려가 달라고 안하십니까? 이 별에 계속 혼자 살 수는 없을텐데요.”
“다 늙어 죽어가는 처지에 이제와 다른 별로 이주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나. 그저 죽기 전에 소원만 이뤄지면 족하네.”
벨타보타의 말은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갔다.
뭔가 있다고 짐작한 승지도 순간 헷갈릴 만큼 대답이 빨리 돌아왔다.
젠장, 내가 언제부터 머리 썼다고.
원래 두뇌파가 아니었던 승지는 결국 벨타보타의 명치에다 직구를 꽂아 넣었다.
“혹시 아직 찾을 물건이 남아있는 건 아닙니까?”
벨타보타가 물끄러미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내 옥새.”
눈썹에 꾹 눌려있던 눈이 귀신처럼 크게 떠졌다.
자네가 어떻게 알아, 도 아니고 바로 내 옥새라고 한단 말이지?
순식간에 노인의 주름이 굴곡을 달리해 변화하는 모습은 바다가 모래톱을 깎아내듯 극적이었다. 노랗게 눈을 뜬 그가 낮게 속삭였다.
“네가 가지고 있니?”
“…튀어!”
승지가 고함을 지르자 깜짝 놀란 성좌가 스틱을 급히 뒤로 당겼다. 동작이 입력되자마자 승지의 몸이 맹렬하게 뒤로 달아났다.
노인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으아 엄청 화났잖아! 왜 일부러 옥새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려준 거야? 승지가 주인한테 분실물을 돌려줄 만큼 착한 사람이었어?]
성좌의 말에 따질 부분이 엄청나게 많다만, 승지는 가장 중요한 핵심만 소리쳤다.
“멍청아! 저 인간은 제국의 후계자가 아니야!”
[어째서??]
벨타보타의 집 옆에 썩어서 방치된 배는 못해도 몇 십 년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배 안의 물건을 집에다 옮겨놓을 정도면 수십 번을 들락날락 거렸을 텐데 찾지 못한다?
누군가 일부러 옥새를 숨긴 게 틀림없었다.
근처에 있는 것들이 죄다 썩어서 쉽게 눈치채지 못했지만, 옥새가 나온 주머니는 갑판 사이에 있는 비밀공간이었어.
이 별에 추락한 배처럼 거대한 배에 있는 비밀 공간을 아무한테나 알려줬다고 보긴 힘들었다.
즉, 옥새를 비밀 공간에 숨긴 인물은 그만큼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단 뜻인데.
“저 작자가 진짜 후계자라면 본인이 숨겨놓은 자리를 잊어버리겠어? 저 인간은 후계자도 뭣도 아니야!”
“크흐흐흐흐.”
벨타보타가 차갑게 웃어젖혔다.
“역시 제국에서 온 놈이었구나. 아직도 안식의 제국이 옥새를,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지?”
“뭐래, 추리도 못하는 놈이!”
상대의 정체를 안 순간부터 승지의 말은 반으로 뚝 잘리며 욕설을 포함하게 되었다.
혼란스러워하던 성좌가 내뱉었다.
[저, 정말 후계자가 아니더라도 상대는 노인이잖아?! 이렇게까지 도망갈 필요가 있어?]
“…너 무덤 똑바로 안 봤지?”
오래 전에 만들어놓은 무덤엔 풀이 자란다. 그러나 강에 늘어서있던 무덤은 모두 흙도 없이 깨끗한데다가 색이 붉었다.
갓 파헤쳐진지 얼마 안 됐다는 뜻이다.
“저것들 다 새로 묻은 거야!”
[히에에에엑?!]
“오해하지 말게. 꼭 시체를 묻어서 무덤의 흙이 붉은 게 아니니까.”
벨타보타가 멀어져가는 승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알아서 움직이거든,”
푸욱. 팍.
무덤 속에서 뼈로 된 손이 튀어나왔다. 저승에서 돌아온 스켈레톤들이 흙을 헤치고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꺄아악! 세상에! 네크로맨서다!]
“와 저 미친 새끼! 자기가 죽인 인간 시체까지 지금 써먹는 거냐? 진짜 상종 못할 인간이네!”
“죽어서도 영광스러운 일에 헌신하는 자신을 보며 오히려 기뻐할 걸세!”
한 번 광기를 드러낸 벨타보타는 이제 막힘이란 게 없었다.
“야, 멈춰봐! 차라리 내가 직접 상대하는 게 낫겠어!”
[안 돼!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네크로맨서랑 싸우겠다는 거야아아!]
“페널티 풀어 봐, 그럼! 다시 광대의 축복 못 써?”
[못 써! 변환된 페널티는 두 번은 못 바꾼단 말이야!]
“젠장! 적어도 네가 아니라 내가 내 몸을 쓸 수만 있었어도 이렇게 도망칠 필요 없는데!”
원통해진 승지가 답답함에 숨지려고 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냐?”
이젠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 벨타보타가 음습하게 킬킬거렸다.
“아니, 됐다. 내가 직접 네 해골을 열어 확인해주마. 잡아와라.”
덜거덕거리며 올라온 스켈레톤들이 승지를 향해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하나하나의 크기는 작았지만 단순히 던전에 널려있던 스켈레톤과 비교할 수 없는 살기가 흘렀다.
가만. 저 해골들 뼈 색깔이 죄다 청회색이잖아.
승지를 이곳으로 인도하고, 사라져버린 거대 스켈레톤의 색도 그것과 같았다.
설마 해골의 눈알이 여기를 기억하고 있던 이유가 살해당한 장소여서였나!
하나를 알게 되면 곧바로 다른 부분까지 맞아 떨어지는 게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더니, 해골은 복수할 대상을 남겼냐!
이제 보니 보물을 가득 싣고 있다는 얘기도, 이세계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단 얘기도 다 복수를 원하는 거대 스켈레톤의 큰 그림이었다.
망할 놈의 이세계 괴물 같으니. 감히 나를 속여?
죽어서도 이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안식의 제국인지 뭔지 돈 좀 있겠지! 싹 다 받아 내주마!
눈에 독기를 품은 승지가 소리쳤다.
“그러려면 일단 싸워라 성좌!”
[뭐어어? 난 못해!]
“네가 못하면 누가 해!”
승지가 이글이글 눈을 불태웠다.
“너 나 죽일 거냐?”
[!]
[아, 아니!]
“그럼 인마 쫄 거 뭐있어! 내가 키운 몸인데! 나 못 믿냐?”
[하지만, 내가 조종하는 건 불안해! 싸움은 승지 담당이었잖아! 난 귀여움 담당이고!]
이 와중에도 쌉소리를 하네.
승지가 되는대로 내뱉었다.
“난 너 믿는다. 어디 하나 부러져도 후회 안 할 테니까 제발 실컷 휘둘러봐!”
[난, 난 몰라!]
[이야아아아!]
이 순간 성좌가 마구잡이로 버튼을 눌러대는 게 온 몸으로 느껴졌다. 정말 천지사방으로 오체가 따로 놀았던 것이다.
이 자식! 죽어라 커맨드 가르쳐놨더니 결국 막 누르냐!
하지만 뜻밖에도 결과는 상당히 좋았다. 워낙 많은 스켈레톤이 한꺼번에 공격하다보니, 멋대로 튀어나간 승지의 손과 발이 우직, 우지직하고 뼈를 박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꺄악! 먹힌다!]
“오오!”
내 손 뼈도 같이 부러지겠다, 망할!
아슬아슬하게 스켈레톤보다 승지의 체력이 더 높았는지 뼈가 깨지는 쪽이 자신이 아니라 해골이 되었다.
좀 아프긴 하지만 저걸 다 때려잡을 수만 있다면 버티지 뭐!
“계속 해! 99번만 때려!”
[완벽한 콤보를 노리는 거야? 필살기가 아니라?]
“필살기? 네가 지금 싸우다 말고 기 모으기 커맨드를 입력할 수 있는 실력이냐?”
[아니! 그거 커맨드가 뭔지도 모르겠어!]
“그럼 그냥 때려!”
쇠망치를 휘두르듯 크게 반원을 그린 승지의 쥔 손이 스켈레톤을 날려 보냈다.
뻐억!
[ 18콤보! ]
[아자! 그 다음은 발차기! 발차기!]
“점프로 피하지마! 제기랄!”
승지는 공격이 들어올 때마다 자꾸만 뛰어올라서 피하려는 성좌의 습관에다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가드 가르쳐 준 거 어쨌어! 점프로 피하면 계속 상단판정으로 얻어맞는다고 내가 섞으랬지!”
[맞다! 그럼 앉아서 피해?]
나름대로 노력한 성좌가 승지를 확 앉히더니 그대로 발차기를 사용해 다리가 휙 돌아갔다.
“우와악!”
아따따뚜겐 나가는 줄 알았네.
유연성은 살짝 모자란 승지의 다리가 기기묘묘한 각도로 올려 차고 후려치고 떨어졌다.
승지의 다리에 얻어맞은 스켈레톤이 공중으로 붕 뜨자 아까 해골 눈알로 열심히 연습한 보람이 있게 성좌가 텁, 텁, 정확하게 양 손으로 스켈레톤을 붙잡았다.
[이야압! 부딪쳐라!]
꽈앙!
승지의 두 주먹 안에서 제대로 돌격한 스켈레톤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호오, 이런 동작까지?
본인 몸으로 싸우고는 있었지만 남이 대신 조종해주는 거라 구경하던 승지가 칭찬했다.
“너 점점 더 컨트롤 잘한다?”
[에헤헷! 다 승지 덕분이지!]
“익숙해지고 있다면 좋아! 얼른 해치우고 본체 조지러 가자고!”
[좋아!]
스켈레톤을 떼로 박살내며 다가오는 승지를 보며 벨타보타의 눈이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