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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 경계를 넘어서 (2)

유월은 처음부터 이세계에 간 적이 없었다.

범윤오가 말한 대로 그곳은 마왕의 살점을 먹은 인간이나 성좌만이 갈 수 있는 공간이니까.

다만 유월의 성좌도 이번 사태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던 모양이다.

승지의 성좌인 광대처럼 무식하게 계약한 각성자를 이세계로 끌고 가는 대신.

그는 유월을 인벤토리로 데려와 시야만을 바꿔주었다.

때문에 유월은 자신의 인벤토리 속에서 승지가 범윤오와 접촉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승지의 성좌가 세계를 뒤집자마자, 유월이 반응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언제나 싸울 대비가 되어 있었다.

스릉.

거대한 대검이 하늘로 치솟았다.

유월은 가풍 때문에 본인의 타고난 스킬은 모두 전투 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성좌 스킬은 잘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의 성좌는 물질 변환 스킬을 갖고 있었다.

콰드득!

유월이 내리찍은 칼의 표면이 빠르게 침식되었다. 범윤오의 알과 비슷한 색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크윽?!”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범윤오가 뒤늦게 유월을 발견했다.

“어? 어떻게 여길.”

“닥쳐.”

까각!

유월의 칼이 굴 껍데기를 열듯 알의 수포 사이로 파고들어 꺾였다.

마왕의 무기로 맞아도 그 자리만 베였을 뿐, 겉껍데기가 쉽게 부서지지 않았는데 유월이 칼이 찍을 때마다 수포가 떨어져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틈이 있어서 유월이 그곳으로 칼을 쑤셔 박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폐사한 굴이 흐르듯 검은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잘… 깨네?

“젠장! 마왕 놈들! 평범한 각성자는 절대로 못 깨트린다면서 개나 소나 건드리잖아!”

빠드득. 빠각!

범윤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유월의 칼이 가차 없이 껍데기를 부숴놓았다. 그의 눈이 반쯤 돌아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동생을 괴물로 만든 원흉이 지금 이 자리에 놓여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몇 년이나 같이 싸운 랭커가 아닌가.

유월의 얼굴은 이미 핏빛이었다.

“잘도….”

분노가 지나친 나머지 유월의 목소리가 마구 갈라졌다.

“잘도 놀아나게 했겠다?”

콱. 대검을 박은 자리가 상당히 깊게 파고들었다. 범윤오의 미간이 있는 자리 바로 위였다.

귀신처럼 모공을 송연케 하는 몰골로 유월이 칼질을 했다.

“죽여 버리겠어.”

쏟아지는 맹공을 받던 범윤오는 갑자기 히죽 웃었다.

“그래도 유량 성좌는 돌려받아야지?”

“!”

알을 그어 내리던 유월의 칼끝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쯤 되자 승지는 볼만큼 봤다고 생각했다.

“지랄.”

“크아아아악!!”

어느새 승지의 손에 들린 마왕의 무기가 작살의 형태로 바뀌었다.

유월처럼 수포를 다 뜯어낼 자신은 없으니 움직이는 사이를 공략할 생각이었다.

생각 적중.

프레임을 지배하는 승지에게 유월에게 몇 개나 뜯겨나간 수포의 틈을 포착하지 못할 리 없었다.

그대로 내리 찍어진 작살이 범윤오의 발에 꽂혔다.

광대가 흠칫했지만 승지는 뼈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작살 끝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움켜쥐었다.

“아아아아악!! 아파!!”

“이미 다 알고 왔는데 어디서 개수작이야? 훔쳐간 성좌들은 죄다 죽여 버린 주제에.”

“…뭐라고요?”

유월이 흔들리는 동공을 들어올렸다.

승지는 어쩔 수 없이 진실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지금 뜯어내고 있는 저 동그란 딱지들, 원래는 성좌였던 겁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검은 것들이 다 성좌의 시체랍니다.”

“……!”

유월의 호흡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그럼 유량의 성좌는 영영 돌려받을 길이 없다는 뜻이니까.

그의 동생은 영원히 괴물로 남는 것이다.

“헤, 헤헷. 젠장. 일 분도 못 속였네?”

아프다고 뒹굴면서도 범윤오가 입을 나불거렸다.

승지와 유월의 얼굴이 동시에 싸하게 식었다. 유월이 칼을 들어올렸다.

“승지 씨. 그대로 잡고 계세요. 바로 찢어발겨 버리게.”

“얼마든지.”

“잠깐!”

꽤나 불리한 상황이라는 걸 감지한 범윤오가 소리쳤다. 알에 들어간 상태로는 제대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이 지경이 되기 전까지 안전하게 이공간에 숨어있는 건데!

저 빨간 대가리의 이상한 성좌 놈 때문에 현실로 끌려나와 버렸다.

졸지에 시간을 끄는 굴욕적인 짓을 하게 된 범윤오가 빠득빠득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안 궁금해.”

승지는 그대로 작살을 비틀어 옆으로 잡아당겼다.

“끄아아악!”

알이 찢어지며 그 안에 있는 게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유월은 그 위로 칼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내리칠 각도를 잡았다.

그가 급하게 빌려온 마왕의 힘을 움직였다.

펑!

수포가 터지며 작은 인형들이 튀어나왔다.

“쯧.”

발버둥 하고는.

그의 하찮은 공격은 유월과 승지가 한 번 내지른 몸짓 한 번에 부스러졌다.

“젠장!”

차라리 다나우와 싸웠던 게 더 나을 지경이었다.

머리 위에는 유월을, 발 밑에는 승지를 둔 범윤오가 발악하듯 외쳤다.

“정말 죽일 생각은 아니지? 난 아직 인간이라고! 니들이 받을 페널티는 생각도 안 하냐?”

둘 다 범윤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나 미처 그를 해치우기도 전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쳤다.

번태가 나타난 것이다.

“그만하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유월이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승지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뭐하다가 이제 나타나?”

“그를 이대로 죽여선 안 되네!”

“하.”

승지는 설마 번태마저 류의건처럼 변해버렸나 싶었다. 원리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똥고집 말이다.

그리고 죽일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고.

누가 죽여서 편하게 만들어준대?

다행히 번태는 류의건이 아니라 승지도 납득할 만한 변명을 갖고 있었다.

“지금 그를 죽이면 소환된 마왕들을 돌려보낼 수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죠?”

유월이 마지못해 물었다. 번태는 여전히 알을 가르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빠르게 말했다.

“범윤오도 이용당한 거야. 지금 마왕이 되면 그가 가져간 성좌의 수만큼 마왕에게 영토를 빼앗기게 돼. 그리고 그 영토엔 이미 이 지구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뭐?!”

뜻밖에도 그들 중에서 가장 놀란 건 범윤오였다.

그가 바락바락 소리쳤다.

“누가 이용당해? 내가? 멍청하긴! 내가 다른 마왕을 이용한 거야! 내가 마왕이 되려고!”

범윤오가 자신만만하게 외쳤지만 번태의 눈빛은 딱하다는 것 이상은 되지 못했다.

“자네의 성좌가 그렇게 말했나? 설령 성좌의 계획은 그랬을 지라도 자네는 거기 포함 안 된 거 확실하네.”

“거짓말 하지 마!”

“지금 나타난 마왕들이 자네를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야. 그들이 나타날 수 있을 만큼 강한 페널티를 받은 존재가 여기 있으니까.”

퍼뜩 승지는 글라세로가 자신을 추적했던 일이 생각났다.

류의건의 페널티 때문에 부르그골이 그에게 계속 부하를 보낼 수 있던 것도.

이세계의 존재가 현실로 넘어올 때는 그만한 악덕이 필요하다.

번태는 어떤 수식도 없이 명쾌하게 말했다.

“범윤오 자넨 찌꺼기야.”

꿈틀.

알이 크게 들썩였다.

“아직 마왕이 되지 않은 지금이라면 다시 성좌와 연결해서 페널티를 되돌릴 수 있네. 물론 그 후에 각성자로서 감당할 페널티도 매우 어렵겠지만, 그 편이 나아.”

번태는 끈질기게 설득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다면 마왕의 의식이 취소되었으니 죽은 성좌들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생길지도 몰라.”

유월의 고개가 번쩍 올라갔다.

그의 눈에서 섬광처럼 희망이 번득였다. 번태는 차마 그 빛을 외면할 수 없는지 계속 그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세계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넓네. 그러니 다시 한 번 기회를 갖게나. 그 알에서 나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조금은 흔들릴 지도 모르는 말이었으나.

범윤오는 미친놈이었다.

“그래?”

그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범윤오의 이성은 이미 찌꺼기 폐기물이라는 말에 꽂혀버린 뒤였다.

일단 한 번 욕을 들어먹으면 뒤에 무슨 말이 오든 정당하지 않은 게 되어버린다.

네가 옳다는 걸 인정하느니 차라리 대가리에 총을 맞는 걸 선택할 만한 찐따 녀석이 발악했다.

“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줄게.”

꿈틀.

갑자기 알 안 쪽에서 빛이 훅 꺼졌다. 그리고 알껍데기에서 모든 수포가 튀어나올 듯이 부풀었다.

모든 방향으로 눈알을 뒤집고 게거품을 무는 모습과 비슷했다.

“윽!?”

범윤오의 발을 찍었던 무기가 매섭게 튕겨 나왔다. 수포와 껍데기들이 커져가며 겹겹이 그를 감쌌던 것이다.

광대가 비명을 질렀다.

“아, 안 돼! 마왕이 되고 있어!”

“물러나! 아까도 말했지만 죽여서는 안 돼!”

“마왕이 되면 늦는다며!”

승지가 짜증스럽게 무기를 잡아당겼다. 그가 죽이지 않는 건 인간뿐이다.

전에 뭐였든 간에 마왕이 된 이상 살려줄 인권 같은 건 본인이 시궁창에다 집어던진 것일 뿐이다.

“……승지 씨!”

유월이 숨 가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의 눈빛이 해골처럼 움푹 들어가 있었다.

만약 그가 동생을 위해서 범윤오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하면 조금은 흔들릴지도….

유월이 먼저 칼을 들어올렸다.

“죽기 직전까지만 패죠.”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식물인간만 참아주게!”

세 사람이 농담 따먹기를 하듯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동안 부풀던 수포는 부글거리며 치솟더니 흉측하게 울룩불룩한 사람의 상체를 하나 올려 보냈다.

하체는 여전히 알에 파묻힌 채 튀어나온 머리는 점액과 막으로 덮여 몹시 징그러웠다.

마치 범윤오가 알 껍데기를 고무막처럼 뒤집어쓰고 튀어나오려는 듯 했다.

“아으으으으!”

세 사람이 동시에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마왕까지 완전 변신하도록 내버려둘 인내심 같은 게 없거든!

오히려 저렇게 반 괴물 같은 형태가 된 게 공격하기 훨씬 쉬웠다.

꼭 마네킹을 때리는 거 같으니까!

쐐애액!

칼, 망치, 지팡이. 세 사람의 무기가 동시에 머리를 향했다.

“우으으으윽!”

머리를 붙잡고 괴로워하던 머리에서 입에 해당하는 부분이 벌어졌다.

앞으로 다시는 침을 흘릴 수 없는 구멍에서 기괴한 소리가 분출했다.

“끼야아아악!”

“읏?!”

“이런!”

날카로운 고주파가 고막을 강타했다.

물리 공격에만 대비하던 세 사람이 잠깐 움찔했다.

“저 새끼, 살아있을 때도 징징거리더니 마왕이 돼서도 똑같구만!”

승지가 첫 마왕의 공격을 가볍게 품평했다. 유월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듯이 구기더니 킥 하고 웃는 소리를 냈다.

“아직 마왕이 되지 않았으니 그리 강하진 않아! 좀 봐주면서들 하게!”

번태도 완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는 범윤오의 대가리도 그런 판단에 어울리듯 우스운 꼬라지였다.

하긴 마왕도 잡았는데 저딴 준 마왕 자식이야 가뿐하지.

그러나 번태의 지팡이 끝이 다시 범윤오를 향했을 때, 불분명한 괴성만 뱉던 입이 갑자기 쩍 벌어졌다.

“난 역시 랭킹 1위는 재수 없어서 싫더라.”

또렷한 범윤오의 목소리와 함께 피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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