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말아 먹네
갑자기 발생한 메인 미션이었다.
근처에서 나타난 거대한 마기를 감지한 류의건은 바로 미션 장소로 달려올 수 있었다.
하필 자신의 주변에서 발생한 메인 미션이라 무심코 긴장하고 말았다.
다행히 이번에 나타난 몬스터는 늘 자신의 성좌를 쫓아다니는 마왕의 부하가 아니었다.
[ 헌신하라. ]
성좌가 보내온 경고성 대화창에 류의건이 움찔했다.
그래, 자신을 쫓아온 괴물이 아니더라도 방심해서는 안 되지.
류의건은 검을 바로 쥐었다.
아까 첫 일격은 잘 먹혀들어 갔다. 하지만 몬스터의 숫자는 금세 회복하며 빈틈을 메웠다.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몬스터들이 마치 새살처럼 돋아났던 것이다.
분열하는 종류인가?
류의건은 찌푸린 얼굴로 흐름의 중심을 찾아냈다. 가장 높이 올라선 몬스터의 머리 위로 경계 대상의 이름이 떴다.
[ 글라세로의 군단장 ]
하필 글라세로의 수하라니.
최근에 있었던 일 때문에 거북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한 번 신경 쓰이기 시작하니 메인 미션의 내용도 마음에 걸렸다.
저주받은 인간의 냄새.
잘못하면 마왕이 소환된다는 경고까지.
마치 이미 죽은 채승지가 다시 현실에 나타나기라도 한 것 같은 문구다.
류의건은 불편하게 표정을 굳혔다.
비록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혹시나 누군가 그 던전을 공략해서 시체가 현실로 돌아온 건가?
생각하니 정말 끔찍하다. 시체마저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마왕의 제물로 쓰이게 되다니.
“그렇다면 돌려보내겠습니다.”
류의건이 다짐했다. 그의 유가족도 시체를 돌려받아야 비로소 슬퍼할 것이다.
의건은 그동안 구하지 못한 사람들의 사망 소식을 무수히 많이 전해주었지만 채승지의 유가족처럼 이상한 반응을 본 적은 없었다.
“걔가 죽었다고요?”
“알겠습니다.”
차라리 택배 기사가 찾아간 게 더 놀랐을 반응이었다.
가뜩이나 채승지의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류의건이 과하게 끼어든 것도 그래서였다.
분명히 장례식에서 본 채승지의 부모에겐 다른 자식도 없었다. 그러나 조문에 참석하는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장면은 자신까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런 고인을 위해서라도 류의건은 시체를 제대로 수습하기로 다짐했다.
다른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싸울 작정이었는데 누군가 의건을 불렀다.
“도와주세요!”
꽤 많은 사람들이 한 데 모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절대로 약자를 지나칠 수 없는 류의건은 바로 내려갔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살았다…!”
그를 보자마자 다들 안도한 기색이 퍼져나갔다. 대부분은 멀쩡했지만,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하나 있었다.
놀란 류의건이 다가갔다.
“부상자가 있군요!”
“앗, 부상이 아니라 스킬 때문에 쓰러지신 거예요. 저희도 자세한 건 병원에 데려가 봐야 알 것 같은데….”
“그렇군요. 우선 대피할 때까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세 화색이 된 사람들이 무심코 떠들었다.
“이젠 살았다!”
“승지 씨 덕분에 겨우 살았네요.”
“무사히 빠져나가셨겠죠?”
“…방금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류의건이 놀라 되물었다. 그 사람이 입을 가렸다.
“헉. 맞다. 선생님이 비밀로 하랬는데!”
“승지라는 분이 혹시 이름이 채승지입니까? 이곳에 살아 있었단 말인가요?”
“아, 아니요.”
“그런 사람 모, 모릅니다.”
이토록 티나게 모른 척 하는 사람을 보면 원래 넘어가주는 의건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류의건이 다그치듯 설득했다.
“전 절대로 그분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럴 뿐이에요.”
“그… 그렇지만….”
“오조희 선생님이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미 정신을 잃고 있던 사람이 오조희였는지 모두 그를 흘긋거렸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건 랭킹 2위의 류의건이다. 나쁜 평판 하나 들려오지 않는데다 지금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올 만큼 착한 사람이다.
결국 못 이긴 척 흔들린 사람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 채승지란 분이 저희를 구해주러 왔었습니다.”
“알러트가 저희를 납치했었어요.”
그들의 이야기에 류의건은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들의 이야기 속의 채승지가 자신이 아는 채승지와 동일 인물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 던전에서 죽지 않았단 말인가?
죽지 않았다면 왜 그때 합류하지 않고…?
순간 이야기의 핵심을 깨달은 류의건의 안색이 변했다.
합류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합류하지 못한 것이다.
“…얘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참, 혹시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닐지.”
“아닙니다. 다만 저도 한 가지 같은 걸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절대로 채승지 씨가 살아있다는 얘기를 하시지 말아 주세요.”
“네에?”
의건이 갑자기 오조희랑 같은 걸 당부하자 그들이 당황했다. 동시에 호기심도 밀려왔다.
대체 채승지는 뭐하는 사람인 걸까?
바람처럼 나타나 그들을 구해주고는 사라졌다. 그런데 류의건까지 그를 알고 있다니?
코스모스 센터 사람들은 내심 오조희가 깨어나면 반드시 그에 대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의건의 마음은 계속 불안하게 술렁였다.
채승지가 죽어갈 때 아이템까지 넘겼다기에 다들 유청의 말을 믿었던 것이다. 마지막 목격자이자 구하러 갔던 당사자니까.
하지만 그토록 확고하게 사망을 얘기하던 유청의 말과 달리 정작 채승지가 멀쩡히 살아있다니. 그것도 던전이 아니라 현실에 있다니.
혼란스러웠다.
타닥.
힘겹게 기우는 정신에 박차를 가하듯 공중에서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메인 미션을 본 각성자들이 하나 둘 씩 도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괴물의 머리를 박살낸 각성자가 옆으로 내려왔다.
“여기 있었군요, 류의건 씨. 미션 중에 또 한눈을 파는 겁니까?”
류의건은 때맞춰 도착한 유청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문을 몰라 하는 유청의 표정은 평소에 미션을 하면서 보던 것과 똑같았다.
류의건이 차오르는 의문을 숨겼다.
아직은 추궁할 수 없었다. 채승지가 자신의 생존을 감추기로 한 이상 유청에게 묻는 일 자체가 오히려 채승지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청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모른다면 더더욱.
초조함이 밀려왔다.
채승지 씨, 지금 어디 있습니까. 대체 던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 * *
류의건이 그토록 궁금해하는 문제의 승지는 지금 국밥집에 와있었다.
후루룩.
“어우… 국물이 그냥.”
승지가 뚝배기 한 사발을 거덜 내고 국밥을 더 시켰다.
“여기 순대국밥 하나 더 주세요!”
“네~.”
[잘 먹네~!]
남은 석박지 하나를 어금니로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승지가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지금 보시는 순간! 류의건 각성자가 시민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고 앞으로 나섭니다!”
“이제 막 각성자들이 도착해 주변이 아직 위험할 수 있습니다.”
“비각성자 여러분의 각별한 주의 부탁드립니다.”
긴급편성치고는 아나운서까지 배정된 방송이었다. 이미 다수의 미션 경험으로 전담 베테랑 팀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승지가 글라세로의 군단장을 피해 도망쳐 나오긴 했지만. 일단 그들이 노리는 대상이 자신이라 계속 상황을 알아둬야 했다.
그러다 규모가 큰 메인 미션은 언제나 긴급 채널에서 방송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무작정 TV가 있는 가게로 들어온 것이다.
손님도 적어서 내가 채널을 돌리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국밥집이지만 의외로 맛집인걸?
느긋한 승지에게 옮았는지 성좌도 일단 그가 안전한 것에 만족해했다.
[그런데 정말 안 도와줘도 될까? 우리 승지가 없으면 다 못 잡을 수도 있잖아!]
“뭘 도와.”
승지는 찬물로 입가심을 하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길 좀 보라고.”
화면 속에서 류의건은 개미만한 크기였지만 잘도 괴물들을 쓸어버렸다.
글라세로의 군단장은 주춤하더니 뱃속을 터트려 기생충 같은 괴물들을 마구 내보냈다.
“우욱…! 뭐야. 밥 먹는데.”
“누가 틀었어?”
“하필 순대국밥 집에서 저런 걸 보는 놈이 누구야?”
국밥집에 있던 손님들이 항의했다. 리모콘을 갖고 있던 승지가 슬쩍 탁자 밑으로 숨기듯 밀었다.
휘잉~.
미안하게 됐네. 하지만 어차피 먹을 내장이잖냐.
승지 혼자 아무렇지도 않게 새 국밥을 받았다.
“게다가 다들 잘 잡고 있고.”
승지가 새로 나온 국밥에 밥을 말았다.
화면 속의 류의건은 뜨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국물이 식기도 전에 적장의 목을 따버릴 기세였다.
다른 각성자들도 함께 싸우고 있었지만 중계 카메라는 유독 류의건만 잡아주었다.
이야, 잘생기면 다냐. 같이 간 각성자들 서럽겠네.
물론 화면에 다른 사람도 나오긴 나왔다. 그중에서 하필 제일 꼴 보기 싫은 얼굴을 발견한 승지의 표정이 구겨졌다.
“하, 저 새끼도 왔네.”
유청이 류의건과 뭐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다. 카메라가 거기까지 접근하긴 어려운지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류의건의 표정이 썩 좋진 않다.
음, 역시 선인은 악인의 본성을 알아보는군. 유청 개새끼.
승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류의건이 유청과 갈라지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결국 계속 엇갈리다 미션을 말아먹을 뻔한 그들은 유청이 후방으로 빠지고 류의건이 군단장의 목을 치며 메인 미션을 종료했다.
“후우.”
그에 맞춰 식사도 끝낸 승지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말라깽이한테서 뜯어낸 돈이 좀 남아서 배는 불렸지만, 뒷맛이 찝찝했다.
결국 알러트 핵심 인물은 하나도 잡지 못했으니까.
그나마 오조희가 보스를 직접 본 게 유일한 수확이었다.
무사하려나. 무식하게 내 페널티를 다 몸으로 받아놓고.
승지가 지그시 뚝배기를 내려다보았다. 매끈매끈한 바닥에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비쳤다.
오조희가 사랑의 매를 해제하며 남은 페널티를 모두 자신에게 연장되게 했기에 지금 승지에게 남은 페널티는 없었다.
깨끗한 머리 위를 보며 승지는 생각에 잠겼다.
알러트가 페널티 스킬 각성자를 잡아들인다고 했었지.
알러트를 증오하는 유청에게도 페널티 수치가 전혀 없었다.
각성자만 죽였으면 페널티를 안 받긴 하겠지, 쓰벌. 그래도 역시 이놈은 수상쩍다.
알고 보니 짜잔! 유청 새끼가 알러트 보스였습니다, 아냐? 알러트를 미워하는 척 했던 건 사실 연막인거지.
그럴싸한데?
승지가 열심히 헛다리를 짚는 동안 성좌가 띠링 대화창을 올렸다.
[참! 약간이지만 글라세로의 군단장을 사냥한 보상도 들어왔어!]
“어, 정말이네.”
그새 약간의 코인이 올라가 있었다.
승지의 눈썹이 모여들었다.
나도 더 사냥할 수 있었는데. 그놈의 지능이 낮아서 도망가야 한다니. 젠장.
머리로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몸이 강제로 공포심을 느끼는 경험은 정말 유쾌하지 못한 경험이었다.
단순히 강해지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냐.
승지가 냉수를 들이켰다. 국밥으로 뜨끈했던 속이 싹하고 내려가며 머리가 맑아졌다.
스텐 컵을 바라보던 승지가 문득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우지직!
혹시나 하고 컵을 우그러트렸던 승지가 놀라 손을 뗐다.
이게 되네?
손가락 모양이 그대로 남은 컵을 보고 당황한 승지가 얼른 엄지랑 검지로 삭삭 컵을 다듬었다.
단단한 금속이 밀가루 반죽처럼 평평 펴지는 느낌이 새로웠다.
확실히 세지긴 세졌는데 말이야.
승지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아직 부족하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부우우웅.
그때 진동이 울렸다.
[승지야! 주머니에서 소리가 들려!]
“…전화잖아?”
뭐지? 나한테 연락할 사람이 없는데?
잊고 있던 스마트폰을 꺼낸 승지의 눈이 조금 커졌다.
발신자 표시에 류의건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