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다른 축제 (2)
승지가 발을 내려찍자 유월이 만들어놓았던 금을 따라 바닥이 쩌적 부서졌다.
급한 김에 박살난 돌 판을 걷어찼다. 날아간 돌이 보스의 팔목을 관통했다.
“이렇게까지 소용이 없으니 서운하군!”
보스가 잠깐 멈칫한 틈을 타 번태의 지팡이가 그의 머리를 관통하고 들어왔다.
다 허상인 것처럼 보이던 보스의 몸이었는데 지팡이 끝이 가면에 걸렸다.
“흐음?”
번태가 지팡이 끝으로 가면을 들어 올리자 두족류가 먹물을 뿜듯이 보스의 몸이 검게 흩어졌다.
[으윽! 징그러워! 정말 저게 인간의 몸이야?!]
바동거리는 팔다리는 이미 촉수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사이에 승지는 조심스레 유월을 안아들었다.
“유월 씨?”
[페널티 제대로 들어갔네!]
넋을 잃고 툭 기울어진 고개가 돌아올 생각을 안했다.
싸움 한복판에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승지는 한쪽 어깨에 유월을 걸쳤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칼을 놓지 않는 모습에 성좌가 깜짝 놀랐다.
[뭐하는 거야?! 설마 양 손에 짐을 들고 싸우려고?]
“짐 아니야.”
말과 달리 유월의 허리를 안정감 있게 잡은 모습이 공사판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승지가 제법 멋있게 덧붙였다.
“버프다.”
[(ෆ ͒•∘• ͒)!!]
축 늘어진 유월을 단단히 고정한 승지가 머리 위에 펼쳐진 알러트 보스를 향해 검을 치켜 올렸다.
“!”
번태가 이리저리 흔드는 지팡이를 귀찮다는 듯이 감싸던 보스가 그걸 보고 갑자기 급하게 도망쳤다.
“어딜 도망가나!”
“제가 막겠습니다!”
[어! 승지가 든 검을 무서워하는 거 같아!]
“그럴 리가?”
마왕의 무기를 가지려고 여기까지 난입한 녀석이?
그러나 일단 무기가 승지의 주도권에 들어와서일까. 칼끝이 향할 때마다 보스의 몸이 이상하게 튀었다.
그럼 잡아야지.
승지가 가뿐히 유월을 들고 쫓기 시작했다. 번태와 류의건이 번갈아 가로막듯 스킬을 썼지만 이번에 보스의 도망은 정말 필사적으로 보였다.
쩍!
지팡이에서 떨어져나간 가면이 돌면서 가장자리로 붙자 류의건이 걷어내듯 푸른빛을 흩뿌리며 검을 휘둘렀다.
번태는 유효타가 들어가는 가면만을 계속 노렸다. 그 때마다 가속을 위한 번개가 터져 나왔다.
폭죽처럼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 빛 속에서 알러트 보스의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우주와도 같은 광경을 따라 승지의 검이 움직였다.
파르륵.
어느새 날아온 오조희가 승지를 향해 양 팔을 내밀었다.
“승지 씨! 유월 씨 이리 주세요! 제가 들게요!”
“댁 힘으로는 못 들어.”
“하지만 그렇게 싸우는 것도 무리수예요!”
“…….”
승지는 묵묵히 눈으로 목표만 쫓았다.
다른 사람들이 몸을 빼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처음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조희는 자신이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운지 계속 주변을 맴돌았다.
“승지 씨! 그럼 이렇게 해요!”
오조희가 공중에서 끼긱 멈추자 마법소녀 복장의 프릴이 휘날렸다
“어차피 여기서 도망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잖아요?”
승지와 오조희의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닿자마자 즉각 이해했다는 걸 둘 다 알아차렸다.
다만 오조희는 허락을 구하듯이 승지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무모한 짓을 저지를 테니 따라올 수 있겠냐는 눈짓.
도발에는 질 수 없는 승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해봐!”
“네!”
오조희가 상승했다. 그리고 번태와 류의건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앗!!”
“이보게!”
그들이 놀라 멈췄다. 치열하게 싸우는 한복판에 저렇게 뛰어들었다간 목숨 하나 내놓기 십상이었다.
위험천만한 도박이었으나 적에게는 오히려 호재였다.
알러트 보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공격을 피해 내려왔다. 그의 양 팔이 앞으로 뻗어 나오며 도망치듯 던전 열쇠가 솟아올랐다.
그곳에 승지가 있었다.
[꺄 그렇구나! 쥐구멍을 뚫어놓으면 쥐새끼는 그곳으로 도망치는 법이지!]
몸 한 쪽으로 전해지는 체온의 무게를 느끼며 승지는 그대로 프레임 컨트롤을 사용했다.
미리 오조희에게 페널티 전이를 해제해달라고 말한 뒤였다.
그래도 던전 전체에 프레임을 거는 것보다는, 아직 열리지 않는 던전 문을 멈추는 게 훨씬 쉬었다.
“?!”
알러트 보스는 열리기도 전에 멈춰버린 던전 문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것만 믿었지?”
승지가 조롱하듯 웃으며 허리에 힘을 실었다. 이상하게도 유월이 품에 없었을 때보다 그를 안고 있을 때 정체모를 힘이 솟아나는 것만 같았다.
“안 됐네.”
승지는 어떻게든 던전 입구로 비집고 들어가려던 가면을 향해 정확히 칼을 휘둘렀다.
몸이 다 가짜고 가면만 실체라면, 이번에는 타격이 있을 것이다.
콰직!
뒤늦게 도망치려던 가면이 정지한 던전 입구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채 마왕의 무기에 짓눌렸다.
[맞았다!]
단순한 타격이라면 번태의 지팡이로도 몇 번이나 맞았던 가면이다.
그러나 마왕의 무기와 부딪친 순간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금이 가더니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암흑이 크게 뒤틀렸다.
그리고는 붉은 불티가 휘날리는 마왕의 무기로 빨려 들어갔다.
“웃?!”
[빠, 빨아들이고 있어!]
“무으으……!”
괴상한 비명이 새어나오며 보스의 가면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다나우! 안 돼!]
성좌가 비명을 질렀다.
이러다 다나우까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싶던 승지가 칼을 회수하려고 했다. 그만큼 손 안에서 진동하는 무기의 낌새가 심상치가 않았다.
마치 스스로 생명체가 있는 것처럼 달라붙어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뒤진 마왕의 거라면서, 무기만 살아있는 건가?!
“제기랄, 무기 주제에!”
승지가 칼을 비틀어 힘껏 내리 찍었다.
그러자 가면 위에 머물러 있던 칼날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도끼처럼 안쪽을 쪼개며 파고들었다.
우득.
[다나우!!!!!]
쪼개지기 직전, 가면이 언뜻 웃었던 것 같다.
“너도 결국 인간을.”
쐐애애액!
피리 같은 바람 소리가 모든 것을 갈라놓았다. 지금까지 시야를 혼란케 만들던 암흑도 사라졌다.
가면에 달라붙어 있던 칼도 도로 원래의 무게대로 주르륵 바닥을 향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가면이 쪼개진 다음의 진짜 얼굴을 가진 사람이 힘없이 공중에서 추락했다.
“!”
승지가 급히 칼을 놓고 뛰어갔다. 가면 안쪽은 평범한 얼굴을 한 인간이었다. 승지나 그 자리에 있던 누구의 얼굴과도 닮지 않았다.
좀 비열해보이긴 했지만 길 가다가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표정이었다.
“이게 알러트 보스의 정체라고?”
[…다나우, 다나우는?]
성좌가 조급하게 물었지만 승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알러트 보스라는 소리에 기어이 기절했던 유월이 눈을 떴다는 사실도 몰랐다.
유월은 비스듬하게 기대어있던 자신의 몸보다, 승지가 말했던 알러트 보스라는 이야기에 더 빠르게 반응했던 것이다.
“유월 씨?”
“…….”
유월은 지금까지 자신을 안고 있던 승지를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도 바닥에 쓰러진 인간과 두 조각으로 박살난 가면이 고스란히 보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유월이 뚫어져라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응시했다.
“아는 사람입니까?”
“랭킹 78위, 이서진. 패스트 길드 소속 랭커.”
뜻밖에도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만 다닥다닥 붙어 나오는 단어의 속도가 빨랐지만.
유월의 얼굴은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시체의 목을 눌렀다.
“그런데 죽었네요.”
승지는 조금 심장이 쿵 뛰었다.
그냥 쓰러졌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바로 죽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죽었다고…?]
이는 다나우가 사라졌다는 말과도 같았기에 성좌도 넋을 잃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유월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심상치 않아졌다.
무표정이었는데도 그의 동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월의 손가락이 점점 더 깊이 목으로 찔러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알러트 보스였나요?”
“……”
“내가 죽이지도 못했는데.”
승지가 유월의 손을 잡았다. 평소의 대담함이나 수줍음 따위는 다 떠난 동작이었다.
아무리 죽은 인간이라고 해도 점점 더 시체로 파고드는 유월의 손을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
“유월 씨.”
“짐작도 못했어요.”
유월이 여전히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따위 인간일 거라곤.”
파앗.
갑자기 격렬하게 손을 빼낸 유월은 손가락에 묻은 피가 경멸스러운 듯 마구 옷에 문질러 닦기 시작했다.
“번태 길드장님에게 다른 간부들의 소재를 확인해야겠어요.”
알러트 보스의 죽음을 확인했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그러나 냉정한 행동이 어째서인지 아까보다 훨씬 심한 동요처럼 느껴졌다.
유월은 더 이상 시체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전화를 건 그가 돌아섰다.
“량이한테 성좌가 돌아왔는지 확인 좀 해주세요. 지금 당장.”
위쪽에 떠있던 다른 각성자들이 천천히 사태를 파악하고는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유월은 바로 번태와 류의건에게 갔지만 오조희는 놀란 눈으로 승지에게 다가왔다.
“승지 씨… 방금, 유월 씨가 보스를 죽인 건가요?”
“아니.”
승지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내가 죽였어.”
“…하지만 위에서 보기엔….”
“자네가 해냈군!”
급작스레 호탕한 목소리가 들리며 번태가 그들 위로 쑥 나타났다.
그리고는 다소 굳어있던 승지의 얼굴에다 대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알러트 보스를 잡은 거야!”
큼지막한 손바닥이 승지의 등을 두드렸다.
[ 서브 미션 달성! ]
[ 선행되었던 페스티벌이 종료됩니다. ]
펑! 퍼펑!
축포가 터지듯 그들의 복장이 원래대로 되돌아오며 꽃종이가 휘날렸지만, 번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웃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광대인 성좌까지도.
* * *
“저기! 저기 나옵니다!”
체육관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진이 경기장 위로 뻗어있던 빛이 사라지자 조금씩 앞으로 몰려나왔다.
이미 번태가 열었던 윷놀이 행사가 사실은 알러트를 잡기 위한 미끼였다는 사실이 언론에 입수되었다.
관객을 대피시켰던 초록 헬멧, 그린이 자세한 전말은 몰라도 대강의 상황을 전달해주었던 것이다.
“분명히 알러트 보스라고 했습니다. 다른 각성자들이 바로 도망친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윷놀이 던전에서 추락한 각성자들은 마치 대비라도 해둔 것처럼 비상구 바로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들이 관객과 함께 나갈 때 중계진들도 같이 대피시키는 바람에 안쪽의 상황을 알 방법이 없었다.
미리 촬영하고 있던 드론 카메라는 이상하게도 모두 박살났던 것이다.
때문에 소식을 입수한 방송사들은 혹시라도 휘말릴 위험을 무릅쓰고 체육관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잘 찍어! 이건 찍는 순간 해외 토픽 감이야!”
“잡았을까요?”
“잡아야지! 저기 있는 랭커들만 몇 명인데. 고작 인간 한나를 못 잡겠냐?”
카메라를 굴린 그들이 마침내 체육관 출입구에서 걸어 나오는 한 무리에 렌즈를 들이댈 수 있었다.
“번태 길드장이다!”
“류의건이랑 유월도 있어!”
“안에서 어떻게 된 겁니까!”
“말씀 한 마디만 해주세요!”
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평소와 달리 걸어 나오는 모습도 찍기가 좋았지만, 그렇게 언론을 피하던 번태 길드장이 웬일로 얼굴을 드러낸 채 한 인간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인간의 얼굴은 노란 헬멧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안 움직이는데?”
“쓰러진 동료인가?”
번태는 기다리고 있는 카메라를 향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들었다.
“다들 오래 기다렸구만. 우리는 지금 알러트 보스를 잡아 나오는 길이라네.”
“뭐, 뭐라구요?!”
“보스를 잡았다!”
“그 유명한 알러트 보스를!”
“어디 있습니까!?”
번태는 침착하게 그들이 다 소리칠 때까지 빙긋이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웃고만 있었다.
그리고는 주변에서 주저하고 말리는 모든 암시들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 그의 시체를 들고 있네.”
“예?!”
“그, 그게 무슨!”
번태는 이정도만 알리면 충분하다는 듯 시체를 안은 채 사라졌다.
콰르릉 떨어진 섬광이 순식간에 카메라를 뒤덮더니 이미 번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벙 쪄있던 기자들이 남은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안에 있었던 분들이시죠!”
“설명 좀 해주십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다른 사람들도 쟁쟁한 랭커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은 이미 특종에 돌아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유월의 표정도 평소의 유순함을 잃어버린 류의건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했다.
그게 열이 받았다.
빠각.
갑자기 뻗어 나온 손 하나가 수 백 만원을 호가하는 카메라 렌즈를 박살냈다.
빨간 머리를 한 남자였다.
“엇! 내 카메라가!”
“당신 뭐야!”
와지직!
승지가 코앞까지 다가온 두 번째 렌즈를 박살냈다. 최자림과 오조희가 힐긋거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형형한 눈빛이 렌즈를 터트리듯 찔렀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