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세상이 망해갈 땐 일단 먹어 (5)
승지는 태연하게 되받았다.
“범윤오 어디 있어?”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마왕이 먹고 싶다면서?”
승지가 끽하고 의자를 당겼다. 거의 복도 하나만큼의 거리가 있는 탁자의 끝과 끝에 앉자 클랩 마왕이 거의 돌멩이만큼 작게 보였다.
“아직은 아니야. 덜 자랐잖아.”
아삭아삭 땅콩을 씹은 클랩이 덧붙였다.
“게다가 넌 인간을 위해서 희생할 타입으로는 안 보였는데.”
“내가 미쳤냐.”
승지가 쯧 소리를 내고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큐라에게서 거리를 두듯 의자를 당겼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잡아먹힐 생각은 없지만 범윤오가 마왕이 된다면 사냥을 도와줄 생각은 있지.”
“필요 없는데.”
“하!”
승지가 코웃음을 쳤다.
“나도 마왕에 대해서 들을 만큼 들었다. 네 본체가 그렇게 쪼끄만 걸 보니 아직 마왕의 힘은 대단찮은 모양이지?”
“…….”
던져본 떡밥이 제대로 걸렸다.
글라세로나 피우 마왕을 만났을 때는 본체부터가 이미 인간을 초월한 괴물의 크기였다.
죽어도 죽지 않고 부활하는 글라세로나 우주를 물과 함께 날아다니는 피우를 생각하면 클랩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클랩의 주위로 살기가 피어올랐다.
“너 같은 걸 하나 죽일 힘은 충분해.”
“그것도 못하면 마왕이냐.”
승지가 대수롭지 않게 흘러 넘겼다. 식탁에 있는 음식들은 차가워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는 태연하게 계속 뱃속으로 집어넣었다.
“어쨌든 강해지는 걸 거절할 놈은 없다고 본다. 범윤오는 이미 마왕이 될 준비가 다 끝났을 텐데, 먹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
“의식을 치르기엔 부족해.”
클랩은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빠르게 살기를 거뒀다.
“게다가 다나우가 닥치는 대로 마왕을 끌어들이고 있어서 경쟁자가 너무 많아.”
“포기하겠다는 거냐?”
“난 좀 더 은밀한 쪽을 선호해.”
클랩이 땅콩 그릇을 밀어내고 길게 말린 소시지를 맨손으로 먹기 시작했다.
무슨 마술 쇼를 하듯이 입으로 줄줄 소시지가 사라져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승지가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마왕이 될 리는 없으니까 그 쪽을 노리는 게 나을 텐데.”
“될 거야.”
클랩의 대답이 지나치게 빨리 돌아왔다.
“그게 예언이니까.”
“뭐?”
클랩은 기름진 손가락으로 토마토를 집었다.
“누가 한 예언인데?”
“내가 하나 알려줬으니 이젠 네 차례야.”
“난 마왕이 될 생각 없다.”
승지가 단호하게 말했다. 클랩이 부루퉁하게 눈을 떴다.
“정보를 달라고 했을 텐데.”
“내 확고한 의지가 정보다, X발. 절대 될 생각 없으니까.”
클랩은 빤히 승지를 쳐다보더니 입에 든 걸 삼켰다.
“아닐걸.”
“사람이 아니라면 아니라고 좀….”
“왜냐하면 세상이 곧 멸망할 테니까.”
클랩이 아무렇지도 않게 문장을 휘둘렀다.
“넌 다나우랑 비슷하게 보이니까, 같은 선택을 할 거 같았어.”
이게 무슨 개소리야?
승지는 당장이라도 주머니에서 성좌를 꺼내서 캐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왕성에서 분리된 성좌를 꺼내들었다간 어떤 놈이 노릴지 몰라 최대한 참는 중이었다.
클랩은 일부러 승지를 속일 생각은 전혀 없다는 듯 계속 먹기만 했다.
그러고보니 시발 애초에 성좌신이 나타날 때 뭐라고 했었지?
세계가 멸망할 위기가 닥쳤으니 미션을 깨고 구해달라고 했었나?
그냥 마왕을 다 때려잡으면 끝나는 거 아니었나.
탁자를 짚은 승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거냐?”
“화를 안 내네. 보통 인간들을 여기서 화를 내던데.”
클랩이 순간 큐라랑 비슷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성좌신은 이미 멀쩡한 상태가 아니야. 우리 마왕들이 옆구리를 거의 다 뜯어먹었거든.”
무수한 던전. 그만큼 마왕의 뱃속으로 들어간 세계.
승지에게 나타난 염소 대가리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성좌신이 갈가리 찢길 그날까지.’
왜 이따위 말은 잊어버리지도 않은 건지.
주머니를 덮은 손에서 작게 들썩들썩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분명히 충격을 받은 광대가 움직이는 것일 터였다.
일단 얌전히 있으라고 승지가 손바닥으로 꾹 광대를 눌렀다.
“썅, 모든 일은 역시 마왕 때문이잖아.”
“나한테 원망해도 소용없어. 오래 전에 사라진 마왕들이 성좌신을 공격해버렸으니까. 나도 마왕이 되고나선 내 영역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야.”
클랩이 한숨을 쉬듯 생크림을 손가락으로 떠서 쪽쪽 빨아먹었다.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뱃속에 넣어둬야 안전하잖아.”
콩.
광대의 머리가 심하게 승지의 손바닥에 부딪혔다가 내려앉았다.
들썩이는 게 심상치 않아 혹시 다친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승지는 최대한 무표정하게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어보려고 했지만 클랩이 가볍게 던진 말에 곧 수포가 되었다.
“꺼내지 그래. 답답해 보이는데.”
“……처음부터 보였던 거냐?”
“마왕의 눈엔 다 보여. 너희들이 인벤토리라고 부르는 공간까지.”
어차피 마왕이 되면 그것이 하나로 연결될 테니까.
승지는 굳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광대를 꺼냈다.
광대의 얼굴은 울긋불긋했다. 피가 몰렸다가 빠졌다가 심하게 동요한 흔적이었다.
그가 승지의 손가락을 꽉 잡고 속삭였다.
“마왕…이 되면 그걸 지킬 수 있다고 어떻게 알아요?”
“힘이 있으면 지키겠지.”
클랩은 광대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다나우라는 애가 왜 미쳐 날뛰고 있는지 넌 알잖아?”
“……!”
광대가 오들거리며 몸을 떨었다. 승지는 천천히 손을 감싸 쥐어 성좌를 붙들었다.
“어차피 마왕 새끼들이 시작한 거 그냥 너넬 싹 다 죽이면 끝나는 거 아니냐?”
“성좌신은 이미 찢어졌어. 자기 힘으로 복구할 수 있었으면 너희 인간들에게 도와달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클랩이 파앙 하고 식탁보를 당겼다. 그러자 그가 먹어치운 음식들이 떨어지고 승지 쪽에 있던 음식들이 딸려왔다.
어차피 고기나 몇 점 뜯어먹은 거라 아쉽지는 않았지만 어이가 없었다.
뭐, 애초에 어이를 따지자면 남의 식탁에 끼어 앉은 승지부터가 문제였지만.
어차피 마왕 놈들이 약탈해온 음식일 텐데 뭐 어떠냐.
솔직히 말해서 파티 이후로 승지의 배는 항상 허기진 상태였다.
클랩이 한 움큼씩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난 오히려 신이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게 신기해. 아흔아홉 명이나 되는 마왕이 뜯어먹었는데도 말이야.”
“신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
“별이 불바다가 되거나, 얼어버리거나, 폭발하거나. 뭐 적당히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면 이뤄질 거야.”
그럼 씨발 성좌신은 왜 인간들을 각성자로 만든 거야?
승지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저건 마왕이다.
당연히 고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겠지.
성좌신도 자기 목숨이 걸렸으니 성좌를 데려와 각성자를 만드는 건 최후의 저항일 터였다.
각성자들이 세계의 마지막 희망이라니.
승지의 머리가 점점 차가워졌다.
“한 가지 더.”
클랩은 이미 대답 대신 빨간 꼬리가 달린 랍스터를 껍데기도 부수지 않은 채 와득 거리고 있었다.
사람이 묻는 데도 음식에만 집중한 꼬라지에 승지가 홧김에 식탁보를 자기 쪽으로 확 당겼다.
와장창!
접시와 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식탁보에 팔꿈치를 올리고 있던 클랩 마왕도 순간 비틀거렸다.
홱, 눈을 치켜든 클랩 마왕의 눈이 뾰족하게 변해있었다.
“왜 다른 별이 아니라 지구지?”
“다른 별도 둥글어.”
“아니 썅, 지구를 다른 말로 뭐라 해야 해. 성좌신이 왜 하필 내가 사는 별을 골랐냐고.”
이곳에서 비행선을 탔을 때 승지는 자신이 아닌 인간들을 많이 보았다.
굳이 각성자가 필요했다면 꼭 승지가 사는 지구가 아니어도 됐을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하필 자신들이 선택 된 것일까?
“……그거야 당연하지.”
클랩은 느릿하게 식탁 위로 기어올랐다.
“너희별에서 마지막 마왕이 나온다고 했으니까.”
마치 짐승처럼 두 손 두 발로 식탁을 짚은 클랩이 기묘한 눈빛으로 이를 드러냈다.
“그게 예언이야.”
저딴 예언은 대체 어떤 자식이 한 거야?
승지는 내용보다 먼저 얼굴도 모르는 예언자에게 빡이 쳤다.
빌어먹을. 신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성좌신은 마왕이 나오기 전에 각성자들에게 막으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각성자들 중에서 마왕이 나오게 만들어 직접 통제하려는 건가?
알 수 없었다.
승지가 빠르게 혼란을 가라앉혔다.
다만 지금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었다.
저 클랩 마왕이 지금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
터벅. 지익, 터벅.
클랩 마왕이 식탁 위를 기어올 때마다 차려져있던 음식이 뭉개지며 떨어졌다.
승지가 천천히 의자를 뒤로 빼냈다.
“…왜 나한테 이런 걸 다 알려주는 거지?”
“왜냐하면.”
클랩이 음산하게 말했다.
“이건 마왕이 되는 의식의 일부거든.”
텁.
승지가 앉아있던 의자를 누군가 붙잡았다. 계속 구경하는 척 서있던 큐라가 등받이와 함께 승지를 껴안았다.
“마왕님! 지금이에요!”
“캬악!”
클랩이 네 발로 튀어 올랐다. 그가 입은 거대한 치마가 휘날리며 시야를 순식간에 까맣게 덮었다.
그러나 승지는 대비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승지를 껴안은 큐라에게서 벗어나는 대신, 오히려 그에게 몸을 맡겨버리고 있는 힘껏 다리를 위로 차올렸던 것이다.
“캑!”
나풀거리는 드레스가 휙 왼쪽으로 걷어졌다.
얼마나 격하게 찼는지 의자가 살짝 들릴 정도였다. 광대가 승지의 손을 꽉 잡았다.
“잘했어, 승지야! 도망치자!”
“…아니!”
승지는 당황한 큐라가 계속 잡고 있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동안 외쳤다.
“소환!”
허공에서 유청을 잡았던 것과 같은 구속구가 나타나 클랩의 손발을 묶었다.
“어리석긴! 고작 이런 걸로 날 붙잡을 수…!”
“없겠지.”
승지는 클랩을 걷어찰 때 났던 소음과 펄럭이는 치맛단 속에서 적들의 시야도 함께 가렸다.
빠르게 중얼거려 광대의 친구 스킬을 발동한 것이다.
[ 광대의 친구 스킬 시전! 우리 친구친구지? 상대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광대가 분리되고 나서부턴 상태창을 띄우지 못했지만, 원래는 모든 스킬이 성좌신이 준 힘이다.
번태에게서 이미 성좌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확답도 받아냈다.
망설일 필요가 없지.
광대는 경악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있었다. 성좌이기에 그는 자신의 몸이 사라지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광대가 와락 승지를 껴안았다.
“스, 승지야! 싫어! 널 혼자 두면!”
“잠깐 피해있어라.”
차라리 성좌 상태였으면 모를까.
한 뼘도 안되는 크기의 광대를 본 승지는 가차 없이 그를 놓았다.
그의 눈은 허공에 뜬 푸른 상태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띠링!
[ 승인 완료! ]
[ 신의 심판자가 웃고 있는 광대1과 자리를 바꿉니다! ]
“승지야!”
손 안에서 광대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클랩이 이미 박살내고 있던 구속구도 사라졌다.
그건 광대의 스킬이었으니까.
이제는 익숙해진 신의 심판자의 엄숙한 느낌이 승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잔뜩 분노한 마왕과 그의 부하에게 붙잡혀 있는 상태로 승지가 웃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2차전을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