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갑자기 분위기 친선전 (3)
“아아 정말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한 대결이었습니다!”
최자림이 마이크를 붙잡고 외쳐댔다.
“류의건 씨가 조금만 빨랐어도 심판의 개입으로 대결 자체가 무효화 되었을 텐데요! 채승지 씨가 한 끝 차이로 끝내버렸죠! 아주 놀라운 공격이었습니다! 이런 실력을 왜 숨기고 있었어요!”
“어흠… 분석 그만하고 다음 대결 진행하게.”
민망해진 김정진이 헛기침을 했다.
“어이, 사회자. 근데 심판 하나만 믿고 이렇게 막 진행해도 되냐? 방금 그거 필살기잖아. 생각해보니까 나 방금 죽을 뻔 했네?”
“에잉, 류의건 씨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세요? 아까도 죽기 전에 딱 막았잖아요~.”
“최선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류의건이 최자림의 말을 거들었다.
썩… 믿음은 안 간다만 안전장치가 있다는 거에 만족해야 될 처지니까 어쩔 수 없나.
손깍지를 낀 승지가 짧게 기지개를 켰다.
씩씩거리며 올라온 박편호가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아! 이번 상대는 커넥트 길드의 박편호 각성자님이 나와 주셨습니다! 대부분의 길드장들이 1차 각성자인 상황에서 2차 각성 후 빠르게 길드를 창립하신 큰손이시죠!”
최자림이 열심히 설명했다. 미스핏 길드원들은 원래 아는 얘기인지 별다른 호응이 없었다.
흠,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린가?
최자림 나름대로 정보를 줘서 도와주려는 모양이다.
일부러 사회자를 자처한 것도 그렇고 자신을 잡아오자마자 죽이려던 상황에 약간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과연 이번엔 어떻게 발라버릴지! 누가 개망신 당하는지 한 번 지켜보자구요! 촤하하학!”
아님 그냥 즐기는 거야. 저거.
고개를 내저은 승지가 천천히 양 주먹을 들어올렸다.
[자아 다음 대결을 시작하기 전에! 승리 기념으로 보너스도 받아가야지!]
[ 미션 승리 추가 보상! 스탯 분배치 5 ]
“오오, 이 기특한 자식…! 시키지도 않았는데.”
[엣헴. 내가 챙겨주려고 하면 얼마나 잘 챙겨주는지 알겠지?]
“자알 했어. 민첩에다 다 때려 박자.”
[좋아, 좋아!]
성좌가 신나서 상태창을 마구 띄웠다.
[그럼 바로 다음 보상을 정해볼까!]
[(o^∀^o) 돌려돌려~ 돌림판!]
띠링!
[ 친선 대결 상대 결정!
두 번째 미션 보상이 스킬 ‘딜레이 캐치’로 고정됩니다! ]
여기서 딜캐가?
대련을 통해서 스킬을 얻는 미션이다보니 보상으로 격겜 관련 스킬이 잘 뜨고 있었다.
아주 좋아.
“흥! 이번에도 쉽게 이길 거란 생각은 마라!”
박편호가 호랑이처럼 앞발… 아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생긴 것과 다르게 무투파였냐.
승지가 살짝 긴장했다. 박편호의 손에서 다시 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까는 무슨 술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텐 통하지 않을 거다!”
“나왔습니다! 커넥트 길드장의 자랑, 끈끈이 손!”
“점착 그물이야!”
박편호가 벌컥 화를 냈다. 어이없는 작명에 그만 승지의 긴장이 풀렸다.
“끈끈이 손이 더 나은데?”
“하하! 감사합니다!”
“저걸 또 칭찬으로 듣고 있나! 사회자를 할 거면 남의 스킬 이름은 똑바로 말하란 말이다!”
“그래도 끈끈이 손이 더 확 와 닿지 않습니까? 이참에 바꾸시죠!”
두 사람이 바보 같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승지는 유심히 박편호의 손을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단순히 빛나는 줄 알았던 손은 그물처럼 끈적거리는 점액이 흘러내려서 반짝거리는 거였다.
윽, 더러워. 안 잡히고 끝내야겠는데.
그나저나 아깐 대체 무슨 커맨드로 승룡권이 발동한 건진 모르겠단 말이지.
현실엔 스틱도 없고 버튼도 없었다.
자신의 몸이 게임 커맨드에 대응하는 건지, 콤보 시스템인지 몸으로 때워서 알아내는 수밖에.
승지가 승룡권을 썼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천천히 다리 하나 팔 하나씩 움직여보고 있을 때 박편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 상태였으니.
흥, 사회자와 떠든 것도 다 전략이다! 라고 속으로 외친 박편호가 슬금슬금 다가갔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일을 대충 처리하면 내 미스핏 길드와의 연합도 끊어버릴지 몰라!”
“으악! 그것만은 참아주세요!”
“잘 들었어? 길드원 관리 똑바로 해!”
계속해서 입으로 최자림에게 욕을 퍼부으며 박편호가 승지에게 근접했다.
그때까지 승지는 별다른 반응 없이 주먹이나 까딱거리고 있었다.
옳다구나. 냉큼 스킬을 발동한 박편호가 바로 필살기를 썼다.
원래 전투 계열이 아닌 만큼 이 한 방에 내 모든 걸 걸겠…!
“소류겐!”
“케에엑!!”
뻐엉 소리를 내며 날아간 박편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
“아닛?!”
놀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케… 케이오!!! 넉다운!! 한방에 끝나버렸습니다!!”
경악한 최자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퍼져나갔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 누가 알았으랴.
승지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작 자신은 승룡권 커맨드인 →↓↘ + 펀치를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내 대가리가 스틱 손잡이라고 상상하고 상체를 당겼다가 다리로 앞바닥을 쓸었을 뿐인데.
주먹을 날린 순간 정말로 커맨드가 발동해 승룡권이 나간 것이다.
공격은 했지만, 전혀 맞출 생각이 아니었건만.
“아니… 왜 와서 맞아주고 그러냐.”
“이, 이, 이것이이!”
얼굴이 시뻘개진 박편호가 밀려오는 쪽팔림을 못 이기고 소리 질렀다.
“말도 안 돼! 이건 무효야! 심판! 심판!!! 아직 시작한다고 말도 안했잖아!”
“허….”
“그만하시죠.”
보다 못한 류의건이 정리했다.
“채승지 씨가 공격하기 전에 이미 박편호 길드장님이 스킬을 쓴 걸 봤습니다. 공격으로 대련을 시작했으니 무효가 될 수 없습니다.”
“크윽…!!”
채승지에겐 잘만 삿대질하던 박편호가 턱을 꽉 다물었다.
저런 강약약강 같으니. 아니지, 이제 내가 박편호를 이겼으니까 강강약강이네?
승지가 비웃는 걸 본 박편호의 혈압이 날뛰었다.
“저런 건방진! 처음부터 수상했어! 사실 이거 다 미스핏하고 짜고 치는 거 아니야?!”
“자자, 거기까지 하세요. 추넥트 길드장님. 커해지십니다.”
“뭐라고?”
말을 못 알아들은 박편호는 최자림에게 떠밀려 내려갔다. 씩씩거리던 그는 그렇게 무시했던 김정진을 보고는 움찔했다.
“내가 말했잖은가.”
“시끄럽네!”
“자자! 이번 대결이 너무도 빨리 끝나 아쉬운 마음은 다들 똑같겠지만! 그만큼 채승지 각성자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한판이었죠! 과연 채승지 씨의 연승 행진은 이어질 것인가!”
두구두구하고 허공에 드럼질을 해댄 최자림이 마이크 끝으로 사람을 콕 찍었다.
“이번엔 당신 차례입니다! 올라오시죠, 이연주 길드장님!”
“와아아아!”
이연주가 지목받자 미스핏 길드원들이 마구 환호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이연주가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제 차례까지 오는군요.”
“멋있다! 예쁘다아아!!”
“우리 미스핏 길드의 구세주! 이번에도 솜씨를 보여주세요!”
저 사람은 인기가 왜 이렇게 많아?
생판 남의 길드장인데 미스핏 길드가 왜 저렇게 환호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다.
“전 직업 의사! 현 성좌 대도서관장! 이세계의 지식도, 현실의 의술도 모두 놓치지 않겠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 이연주 각성자입니다!”
컥, 의사라고?
본능적으로 승지가 주춤했다.
똑똑한데 칼질하고 돈까지 왕창 뜯어가는 존재 앞에서 움찔하지 않을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특히나 그중에서도 의사는…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승지야, 힘 풀어! 이번에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성좌가 응원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까 미션 보상은 어떻게 됐냐?”
[30콤보를 달성하기도 전에 이겨버려서 승리 보상만 받게 될 거야!]
성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 알림이 떴다.
[ 두 번째 미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여 스킬 ‘딜레이 캐치’가 보상 목록에서 지워집니다. ]
[ 대결에서 승리했기 때문에 서브 미션은 계속됩니다. 승리 보상으로 스탯 배분치 5를 받습니다. ]
[ 친선 대결 상대 결정!
세 번째 미션 보상이 스킬 ‘가드 크러쉬’로 고정됩니다! ]
두 번째 보상 스킬을 잃은 건 아깝지만 미션이 중단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게다가 승리 보상은 확실히 들어왔으니까.
이연주가 허공에 손을 올렸다.
“차트 열람.”
“바로 시작하냐?”
“아뇨, 잠깐 기다려요. 공격 스킬은 아니니까.”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이연주는 싸울 준비가 아니라 검진을 하는 것처럼 눈을 내리떴다.
“채승지 씨, 처음 봤을 때보다 스탯이 조금 늘었군요. 지금 대련을 통해서 성장하고 있는 건가요?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당연히 스킬이죠.”
이연주가 스킬 창을 닫는지 허공에서 가볍게 손가락을 접었다.
“제 스킬인 차트 열람은 눈앞에 있는 환자의 상태창을 확인할 수 있어요. 아쉽게도 스킬이나 미션까진 자세히 볼 순 없지만 말이에요.”
“너 내가 기절했을 때 들어왔구나.”
“정답.”
이연주가 살풋 입술을 올렸다.
“미스핏 길드와 하얀 길드는 오랫동안 교류한 사이에요. 쓰러진 당신을 바로 내게 보여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그래서?”
“미스핏 길드보다 글라세로의 저주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나란 뜻이죠.”
승지가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부터 미스핏 길드에 접근한 이유가 글라세로의 저주 때문이긴 했다.
“지금도 내가 당신의 상태창을 볼 수 있다는 건 글라세로의 저주가 병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연주의 눈이 살짝 번득였다.
“그러니 이번 대결에서 내가 이기면 당신을 실험체로 쓰게 해줘요.”
“뭐?”
[꺄악! 우리 승지가 해부 당해버려!!]
미쳤나, 절대 안 돼!
“내가 제정신으로 그걸 허락할 거 같아?”
“당신의 저주는 마왕을 소환할 정도로 강력하지만 적어도 다른 환자들처럼 몸이 변하진 않잖아요?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실험해보긴 딱이죠.”
“마왕?”
“잠깐만… 글라세로의 저주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다고?”
미스핏 길드원들이 웅성거렸다. 그냥 싸움 구경을 나왔던 그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글라세로의 저주는 미스핏 길드가 먼저 고통 받던 문제였다.
그런데 승지를 이용하면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다니.
이걸 노렸는지 이연주가 열렬하게 외쳤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환자가 고통 받고 있어요.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구요.”
“아니….”
“부탁입니다! 제 친구도 글라세로의 저주에 걸렸어요!”
“제 오빠도요!”
“도와주세요!”
미스핏 길드원들이 앞다투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절박한 목소리였다.
승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장, 당했다!
저런 똑똑한 자식! 일대일 대련에서 여론전을 펼칠 줄은 몰랐다.
이러면 대련에서 이겨도 나만 쓰레기가 되잖아!
[대단해…! 인간은 역시 재밌어!]
얌마, 지금 그 대사는 아니지.
이연주가 여유롭게 덧붙였다.
“승지 씨에게 일부러 져달라는 부탁까진 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적어도 이 조건만큼은 받아줄 수 있죠?”
“죽어가던 거 살려줬으니 보따리까지 내놔라?”
“당신을 죽일 생각도 살릴 생각도 저의 제안은 아니었답니다. 그리고 이 보따리는 제 순수한 제안.”
“내가 이기면 넌 뭘 줄 건데?”
“저희 길드에서 평생 무료로 치료받게 해드리죠. 전 의사 연합이니 도움 좀 되실 거예요.”
움찔. 평생 무료 치료권이라는 얘기에 승지의 눈빛이 달라졌다.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