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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의 떡 뺏어 먹기 (1)

뭐야, 이 평화주의자는.

승지가 이상한 눈으로 지나치자 그가 아예 팔까지 붙잡았다.

“싸울 필요 없다니까요?”

그가 중앙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 혼자 검을 휘두르는 남자가 보였다.

“캬아악!”

화려한 빛이 번쩍이고 고블린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나가떨어졌다.

분노한 고블린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지만, 그는 아주 간단하게 손목을 비트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쓸어버렸다.

검이 날아가는 궤적이 소름 돋을 만큼 깔끔하고 선명한 잔상을 남겼다.

“저 사람이 왔으니 우린 여기서 안전하게 있다가 보상만 받으면 돼요!”

“저게 누군데?”

“류의건이잖아요! 몰라요?”

몰라 시발.

승지가 인상을 쓰자 그가 알아서 나불거렸다.

“한국 랭킹 2위 각성자잖아요! 인성, 실력, 외모 다 갖춘 금수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여기서 뭉개고 있는데?”

“워낙 착해서가 아닐까요? 다른 랭커들은 이런 자잘한 싸움은 안 한다고 들었는데 류의건은 꼭 위험한 상황을 보면 지나치지 못하더라구요! 정말 멋있죠?”

글쎄다.

자기한테 이득도 안 되는데 저렇게 열심히 싸운다고?

약점이라도 잡힌 건지 아니면 타고난 오지랖인지는 모르겠지만 혼자서 싸우는 모습이 아득해 보이긴 했다.

게다가 그 뒤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각성자들이 보여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사람이 강하다고 저렇게 맡겨놓고 있는 건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각성하기 전엔 그래도 각성자들은 열심히 싸우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알바를 구할 때든 직장을 구할 때든 각성자를 우선해서 뽑아도 참았지.

그런데 저렇게 편하게 팔짱 끼고 구경하는 걸 보니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다.

각성자라도 일반인과 다를 게 없으면 화나지.

승지는 아직도 동경하는 눈빛으로 구경만 하는 각성자를 밀쳤다.

“비켜.”

“어디 가세요?”

“싸워야 할 거 아니야.”

“네에? 아니, 뭐하러요? 가만히 있어도 보상 받는다니까요!”

“너나 그렇게 해. 난 싸우러 왔으니까.”

무임승차는 질색이다.

승지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그가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걸로 싸우시게요?”

아 씨.

좀 진지해져 보려고 하는데 망할 뿅망치가 분위기를 깼다.

승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댁이 무슨 상관이야!”

“아… 넵. 그렇죠…!”

각성자가 미친놈 보듯이 슬슬 승지를 피했다.

시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승지야! 뿅망치는 너한테 아주 적절한 무기인걸! 게다가 아주 잘 어울려!]

“닥쳐. 이딴 거 위로하지 마.”

죽상이 된 승지가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류의건이 계속해서 고블린을 밀어붙이고 있었기에 몬스터보다 다른 각성자들에게 먼저 가까워졌다.

“방금 봤냐?

“캬아, 끝내준다.”

“저 스킬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무기도 장난 아니야.”

구경하는 각성자들은 온통 찬양하는 소리밖에 없었다.

아니,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긴 있었다.

“저 새끼는 랭커면서 전체 미션까지 털어먹네.”

“가뜩이나 요새 토벌전도 잘 안 뜨는데 다른 조건 많은 미션이나 할 것이지.”

인상이 더러운 두 각성자가 뒤에서 열심히 욕을 해댔다.

인성과는 별개로 경력은 있는지 장비가 꽤나 화려했다.

무슨 갑주에 무기나 포션이 주렁주렁 달려있었으니까.

저거에 비하면 난 완전히 맨몸 수준이네.

겨우 뿅망치 하나 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내 자신이 존경스럽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어어! 저기 좀 봐!”

이대로 무난히 토벌전이 끝나려나 싶었을 때, 누군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먹구름이 갈라지듯 검은 물결이 일더니 갑자기 뾰족하고 흰 것이 하늘에서 튀어나왔다.

앞에서 싸우던 류의건도 잠깐 당황했는지 위를 올려다보았다.

송곳니처럼 열을 지어 나타난 뾰족한 것이 하늘을 물어뜯듯이 벌리더니 검은 점액과 함께 거대한 몬스터를 토해냈다.

쿠우웅!

하늘에서 떨어진 몬스터가 지축을 뒤흔드는 것과 동시에 날카로운 알림음이 떴다.

[ 메인 미션 발생! ]

“뭐?”

[ 메인 미션 : 킹고블린 처치하기

자격 : 스탯 종합치 500이상, 미션 클리어 횟수 100회 이상, 성좌 연결도 80 퍼센트 이상 중 하나라도 해당하는 각성자.

기여도에 따라 보상이 배분됩니다.

1위 단독 보상 : ‘열쇠장이의 고리’ ]

상태창을 다 읽기도 전에 킹 고블린이 포효했다.

“…! ……!”

차마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괴기함에 각성자들이 귀를 틀어막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맙소사!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데!]

설명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성좌 대신 다른 각성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보스 몬스터다!”

“다, 다들 도망쳐!”

킹고블린은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하는 살기를 뿜어냈다.

“안 돼! 잠깐만요!”

너무 무서워서 바닥에 주저앉은 각성자 옆에서 누가 소리쳤다.

“아직 고블린이 사라진 게 아니라구요! 우리가 토벌전을 맡아야 해요!”

그 말대로 류의건은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서 이미 몸을 빼낸 뒤였다.

킹고블린이 시꺼먼 몽둥이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빌딩이라도 박살낼 수 있을 기세로 내리쳤다.

콰아앙!

간신히 몽둥이를 막아낸 류의건이 뿌득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킹고블린의 주의는 류의건에게 쏠렸지만, 그가 막아내던 고블린들은 뻥 뚫린 앞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캬아악!”

“막, 막아!”

“알 게 뭐야! 비각성자야 뒤지든 말든!”

“이대로 도망치면 진짜 다 죽어요! 다른 랭커가 올 때까지만…!”

“도망도 못 치면 빠져!”

사람들이 순식간에 뿔뿔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류의건 한 명 빠졌다고 완전히 개판이다.

[승지야, 뭐해! 너도 도망쳐야지!]

“어차피 잡아야 한다매?”

그가 뿅망치를 붕붕 돌렸다.

“저 보스 몬스턴가 뭔가는 류의건한테 붙잡힌 거 같은데 난 토벌전만 하면 되잖아.”

[뭐어? 너 미쳤어!]

“당신 미쳤어요?”

누군가 성좌랑 동시에 소리치기에 승지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그러나 소리친 사람은 승지를 향해 말한 게 아니었다.

“당신 얼굴 기억해놨어요. 당신도! 이대로 도망치면 각성자 관리소에 고발할 거예요!”

“네가 뭔데?”

“비각성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면 자동으로 페널티 받는 거 알죠?”

위협적인 말투에도 그가 꼿꼿하게 목을 치켜들었다.

“내 스킬은 페널티 연장이에요. 평생 비각성자처럼 살고 싶으면 어디 그렇게 해봐요!”

“별 거지 같은 년이….”

“야, 야. 일단 잡자.”

아까 같이 류의건을 욕하던 놈이 말리듯이 툭툭 쳤다. 이미 고블린이 코앞까지 들이닥치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각성자들은 일단 무기를 꺼내 들고 싸우기 시작했다.

간신히 형성된 전선이 고블린을 방어해냈다.

됐다. 이제 나도 좀 싸울 만하겠네.

승지가 뿅망치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첫 싸움이라 긴장이 감돌았다.

그러나.

“뭐야, 당신?”

“저기요. 각성자 맞으세요?”

승지가 뿅망치를 들고 앞으로 뛰어가려고 할 때마다 옆에서 방해가 들어왔다.

“장난치지 말고 빨리 도망치세요!”

“안전한 곳으로 가시라구요!.”

“아니, 나도 각성자….”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한 분 같은데.”

“뭐 이 새끼야?”

“미친 짓은 좀 딴 데 가서 하세요. 지금 상황 심각한 거 안 보이나?”

“허!”

기가 막힌 승지가 직접 스킬을 보여주려고 해도 각성자들이 황급히 끌어냈다.

갑자기 없던 보호 정신이 왜 생겨났나 했더니.

아까 페널티 연장 운운했던 각성자가 감시하듯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불쌍한 분한테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마세요! 자, 얼른 이쪽으로 오세요!”

돌아버리겠네.

오해를 해도 단단히 했다.

[그냥 돌아가자, 승지야! 이대론 어차피 한 마리도 못 잡을 거야!]

“누구 마음대로?”

결국 자꾸 피하라는 각성자들을 피해 밀리고 밀려서 구석까지 왔다.

그나마 여긴 아까 성질을 부렸던 두 각성자가 사냥하고 있던 자리라 아까처럼 신경 쓰는 인간이 없었다.

“아오! 개 같은 거!”

“내가 왜 이 고생을 해!”

욕설이 서라운드로 울렸지만, 승지는 가볍게 흘려 넘겼다.

게임하면서 보는 것들이 맨날 저런 것들인데 뭐.

가볍게 귀를 후빈 승지가 뿅망치를 잡고 달려들었다.

“캬륵!”

[ 1콤보! ]

혹시나 다른 힘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소리는 정직했다.

뾱!

귀염뽀짝한 소리에 고블린이 멈췄다.

“크르르륵…!”

자신이 당한 게 뭔지 이해가 잘 안 가는지 멈칫거리던 고블린이 바로 공격했다.

“큭!”

무섭게 날아온 몽둥이를 간신히 피했다. 다행히 고블린의 움직임은 평범한 사람보다 살짝 느렸다.

힘은 훨씬 셌지만.

“에라이!”

승지가 마구잡이로 뿅망치를 휘둘렀다.

[ 2콤보! ]

[ 3콤보! ]

[ 4콤보! ]

뾱뾱뾱!

경쾌한 소리와 타격감 제로.

고블린은 맞아도 아프지 않자 오히려 더 신이 나는지 캬륵거리면서 승지를 따라왔다.

환장하겠네.

“저건 또 웬 미친놈이야?”

“야, 저거 봐.”

승지가 혼자만의 혈투를 벌이는 동안 류의건은 차원이 다른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콰광!

아무리 랭킹 2위라지만 온갖 공격을 쏟아내는 킹고블린을 상대로 우위를 차지하다니.

콱! 콰가각!

류의건이 연달아 터지는 공격을 모두 검 하나로 막아냈다. 예리하게 빛나는 날은 심지어 몇 번이나 킹고블린에게 치명상을 입혀놓았다.

쩍 벌어진 킹고블린의 상처에서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잡을 거 같지?”

“근데?”

“우리도 미션 조건은 되잖아.”

갑자기 두 각성자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수상해.]

“뭐가?”

뾱! 하고 20번째 콤보를 날리던 승지가 물었다.

이제 슬슬 그의 공격이 꿀밤만큼은 아픈지 고블린의 성질이 더러워지고 있었다.

[저 두 사람! 아무래도 토벌전이 아니라 킹고블린을 잡을 생각인가 봐!]

“하긴 그게 보상이 더 좋긴 하지.”

[아니,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저 두사람은 제대로 보스를 공격한 적이 없잖아! 보상을 가로챌 생각이야!]

성좌의 말과 함께 두 각성자가 고블린을 뚫어버리고 킹고블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켜, 비켜, 비켜!”

어디서 꺼냈는지 철퇴를 휘두른 각성자가 주변에 있던 고블린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

자신을 도와주러 온 줄 알았는지 류의건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그러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류의건을 그대로 지나친 다른 각성자가 냅다 킹고블린의 가슴에다 창을 꽂아 넣었다.

“크아아아악!”

[ 킹고블린이 마지막 숨을 토해냅니다! ]

모두에게 전체 상태창이 뜨는지 사람들이 멈칫했다.

그 틈을 타 계속 창으로 몬스터를 찔러대던 각성자가 심장이 있을 부위에 주먹을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새까맣게 절여진 무언가를 꺼냈다.

“크하하하! 막타 고맙다!”

급히 뒤쫓아 가려던 류의건은 각성자가 그에게 킹고블린의 시체를 밀어버리는 바람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잽싸게 물건을 챙긴 각성자는 부리나케 달아났다.

막타를 칠 동안 고블린을 잡던 각성자도 뒤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와, 다 잡아놓고 뺏겼네.

안색이 바뀐 류의건은 곧장 그들을 쫓아가려고 했지만, 뒤에서 각성자들이 비명을 지르자 멈칫하고 말았다.

설마 구해줄 거냐?

고민은 짧았다.

방향을 튼 류의건은 정말 다른 각성자들을 구해주러 갔다.

와, 진짜 손해 보면서 살 성격이네.

승지가 혼자 감탄한 순간 성좌가 신이 나서 띠링 거렸다.

[우리가 대신 쫓아가자!]

“좋아!”

미련 없이 고블린을 버린 승지가 두 각성자를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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