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의문의 호구 (1)
[하지만 조금 이상해. 분명히 승지가 올려놓은 가격은 백만 원이었는데 본인이 삼천만원으로 가격을 올렸거든.]
“호군가?”
액수에 완전히 홀려버린 승지가 희희낙락했다.
[그게 아니라 이상하다는 거지!]
“경매가 붙으면 그럴 수도 있잖아.”
[아니야. 딱 한 사람만 가격을 걸었는걸.]
“누군지 띄워봐.”
띵! 경매장이 바로 떴다.
[ 등록 : 라드이안의 창
구매 희망자 : 류의건. ]
“켁.”
바로 나가려던 승지가 정지했다.
“저번에 봤던 랭킹 2위 아냐?”
[그러게?]
하필 랭킹 2위를 만난 날 빼앗아온 창을 그 랭킹 2위가 다시 산다고?
라드이안의 창은 자신이 쓰기엔 좋았지만 랭킹 2위가 쓰기엔 턱없이 부족한 무기였다.
게다가 이미 류의건이 고블린 토벌전 때 뻑쩍지근하게 근사한 칼을 쓰는 것도 봤고.
그렇다면 필요한 게 무기가 아니라 그 주인이라는 소리다.
“설마 날 찾고 있는 건가?”
[승지 너를? 왜?]
“그건 나도 모르지. 그때 조졌던 각성자가 이상한 말을 했을 수도 있고, 토벌전에서 1위 보상으로 받은 보상이 필요해진 걸 수도 있지.”
[정말 그렇다면 피해야 하잖아!]
“글쎄, 그렇지도 않아.”
승지가 끼익 문을 열었다.
주위를 살핀 그는 산들바람만 부는 바깥을 확인하고는 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감시하는 사람은 없군.
“그 류의건이라는 랭커, 토벌전 때 보니까 쓸데없이 착하더라고. 만나자마자 칼을 휘두를 성격은 아니야.”
[그래도 위험하지 않을까?]
“거꾸로 생각해봐. 나 하나 유인하자고 삼천만원이나 썼지?”
[응.]
“자기 말고 다른 경쟁자도 없는데 일단 금액부터 높게 불러서 유인하려는 게 일단 조급해. 또 이렇게 터무니없는 가격이면 상대가 의심할 거란 생각도 못 한 게 멍청하고.”
[바보란 뜻이야?]
“호구의 냄새가 난다는 거지.”
아니면 단순히 금전감각이 부족한 놈일 수도 있고.
류의건이 금수저라는 정보가 떠오른 승지의 얼굴이 무덤덤해졌다.
“랭킹 2위니 전투 능력은 끝내줄 테지만 싸우지만 않으면 오히려 상대하기 쉬울걸.”
[그럼 고리를 그냥 넘겨주게? 던전에 들어갈 방법이 없으면 글라세로의 저주는 어떡하려고?]
“바로 그게 좋은 점인데, 현실에 마왕이 나타나면 나만 망하는 게 아니잖아?”
승지가 음흉하게 씩 웃었다.
“만약 정말로 고리를 뺏으려고 하면 저주에 대해 말해주고 협조하라고 해야지. 마침 던전 때문에 센 녀석도 필요하잖아?”
[우와아….]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자해 공갈 계획에 성좌가 감탄했다.
[우리 승지 정말 양아치 같고 대단하다!]
“시끄러.”
승지가 자연스럽게 담장에 발을 걸쳤다.
[응? 왜 문으로 안 가고 담을 넘어?]
“문지기가 있는 대문으로 나갈 순 없잖아. 길드 애들은 내가 아픈 줄 알 텐데.”
황토벽을 올라간 승지가 기와를 밟았다. 광대의 균형 덕분에 둥근 기와 위에서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스킬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능숙한 자세가 한두 번 담을 넘어본 솜씨가 아니었다.
“웃차.”
승지가 가볍게 착지했다.
따라오는 인기척은 없었다.
안심한 승지가 그대로 줄행랑쳤다.
“경매장 열고 류의건한테 상수역 백다방 앞에서 보자고 해.”
[알았어!]
그래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보자고 해야 안전하겠지.
승지는 일단 보이는 택시에 몸을 실었다.
택시 값은 류의건에게 내달라고 해야겠군. 삼천만원에서 알아서 빼주겠지.
열심히 메시지를 쓰던 성좌가 금세 띠링 하고 답장을 알려주었다.
[알겠다고 금방 온대!]
“몇 분?”
[십 분이면 충분하다는데?]
“어디에 있었길래 그렇게 빨리 와?”
[그것도 물어볼까?]
“아니! 됐어.”
팔짱을 낀 승지가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설마 아무것도 안하고 내 연락만 기다린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냥 능력이 워낙 출중하신 놈이라 그렇겠지.
가능하면 별일 아닌 것처럼 무기를 넘겨주고 삼천만원을 챙기고 싶다.
택시는 막히는 일 없이 쭉쭉 나아갔다.
각성자가 생긴 이후로 툭하면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판에 도로가 무척이나 넓어졌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안전을 위해 인테리어나 크기를 줄이고 실용적인 창고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번화가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택시가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승지는 차창으로 슬쩍 바깥을 확인했다.
“윽, 저게 다 뭐냐.”
만나기로 한 백다방 앞에 사람이 와글와글 모여 있었다.
“류의건이다! 진짜 류의건이야!”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오빠 잘생겼어요!!”
“혹시 미션 때문에 온 겁니까? 저도 끼워주세요!”
“형! 나 형한테 인생 배팅 했잖아! 세계 1위 함 찍자, 시발!”
바글거리는 인파 너머로 곤란해 하는 류의건의 머리가 하나 쑥 올라와 있었다.
생긴 것도 그렇고 반응도 뭔 연예인 같네.
랭커쯤 되면 얼굴 팔리고 실력 팔려서 대우가 장난 아니라던데, 이렇게 실감을 한다.
[우와 인기 좋다~! 부러워!]
“네가 부러울 게 뭐가 있냐, 성좌 주제에.”
[나도 광대라 인기에 목 마르다구!]
“그나저나 저기 있는 놈을 어떻게 접근하냐.”
괜히 사람 많은 데로 불렀나.
그래봤자 각성자 하난데 저렇게까지 사람이 몰릴 줄은 몰랐다.
혼잣말하는 승지를 훔쳐보던 택시기사가 말했다.
“저기요, 도착했는데 계산하셔야죠.”
“아. 잠시만요.”
앉은 채로 뒷좌석 문을 연 승지가 다시 경매장을 켰다.
[뒤돌아서 택시 앞으로.]
짤막한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류의건이 두리번거렸다.
“이쪽.”
승지가 앉은 채로 손짓하자 거래자라고 확신했는지 류의건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승지는 앉아서 기다리다가 그가 완전히 가까워지자 차 뒷문을 잡고 몸을 빼냈다.
“미안하지만 대신 계산 좀 해주시죠. 대금 받기 전까진 빈털터리라.”
“…….”
갑작스런 요청에도 류의건은 태연하게 지갑을 꺼냈다.
호구 맞네, 맞아.
그러나 순순한 류의건의 태도에도 승지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류의건의 머리 위에 달린 숫자 때문이었다.
[승지야… 너도 보여?]
아주 잘 보인다.
성좌마저 숨죽여 물을 정도로 긴 글씨가 류의건에게 붉게 붙어 있었다.
[ 357091 ]
저거, 페널티잖아.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승지의 머리는 복잡해졌다.
던전에서 고생고생을 해서 얻은 보상이 바로 페널티 수치화다.
자신의 머리 위에 보였던 64라는 숫자도 사람을 한 방에 기절시킬 정도였는데.
저렇게 큰 숫자는 뭐야?
저게 가능한 숫자인가?
[세상에… 저렇게 높은 페널티 수치는 처음 봐!]
잔뜩 긴장한 상태창이 바르르 떨렸다.
[나도 승지 네가 페널티 수치화를 얻은 덕분에 남의 페널티가 보이는 거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심한 페널티를 받은 걸까?]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원래 페널티는 각성자들이 사람을 해치거나 현실을 위험하게 만들 때 강제로 부여하는 징벌이었다.
성좌랑 계약하고 나서 스킬에도 페널티가 붙을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수치는 위험하다.
뭐하는 놈이야?
계산을 마치고 다시 일어나는 류의건이 아무리 멀끔하고 정중한 태도를 보여도 승지의 시선은 머리 위에 뜬 페널티 수치에서 떨어질 줄은 몰랐다.
살인이라도 저질렀나?
테러?
아님 너도 마왕 부활 예정자니?
류의건은 오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관찰하는 승지를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리를 옮길까요.”
“멀리 가지 말죠.”
승지가 간신히 턱을 까딱였다.
사람들을 피하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진짜로 둘만 봤다간 위험할 것 같았다.
원래 약속 장소였던 백다방은 굉장히 좁았다.
그러나 승지와 의건 모두 차라리 사람이 적게 들어가는 공간이 낫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유명인인 류의건이 있는 한 다들 대화를 엿들으려고 할 테니까.
류의건이 가게로 들어가자 이미 북적북적하던 안쪽 공간이 신기하게도 비워졌다.
계산대 앞에 선 의건이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뭔 음료를 시켜. 그냥 거래하고 끝내지.
그냥 돈 받고 가고 싶은 승지의 속내가 그대로 드러났는지 의건은 꿋꿋하게 주문대 앞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첫 예상처럼 단순히 무기나 사자고 자신을 부른 게 아닌 모양이다.
에휴.
“키위 스무디로. 그것도 그쪽이 먼저 계산해야 되는 거 아시죠.”
“뭐야? 싸가지 없어.”
“류의건한테 지금 삥 뜯는 거야?”
뒤에서 쑥덕대는 거 다 들린다, 인간들아.
표정이 썩어들어간 승지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아예 사이즈업까지 해주시죠. 제일 큰 걸로.”
가뜩이나 배고픈데 이걸로 배나 채워야겠다.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승지의 모습에도 의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메리카노 하나랑 키위 스무디 제일 큰 걸 주문해주었다.
[완전 착하다~! 승지 말고 저런 사람이랑 계약했으면 좋았을 걸!]
성좌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놈 자식이.
괜히 키우던 개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는 느낌을 받은 승지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어차피 나한테 줄 돈에서 까는 거거든.”
[그래도 태도가 올바르잖아! 저런 사람이 어쩌다 저런 페널티에 걸렸을까. 거짓말 같아!]
“그래봤자 저것도 사람이지. 나랑 뭐 별 차이도 없구만.”
승지가 속닥거렸다.
그러나 정작 반응한 건 성좌가 아니라 몰려든 구경꾼들이었다.
“갑자기 왜 혼잣말해?”
“우리가 하는 말이 들렸나보지?”
“웃긴다. 찔리나 봐.”
승지의 이마에 바로 핏대가 솟았다.
찔리긴 뭘 찔려.
더 듣다간 거래고 뭐고 확 엎어버릴 뻔했는데, 다행히 주문이 들어간 알바가 요란하게 얼음을 갈기 시작했다.
위이잉-!
덕분에 주변에서 들리던 잡소리가 사라졌다.
[에이, 우리 승지 삐졌어? 물론 우리 승지가 세계 제일 대단하지!]
승지의 기분을 알아차린 성좌가 금세 알랑거렸다.
성좌가 저렇게 가벼워서야.
속으로 혀를 찬 승지가 의자에 앉았다.
끼익.
마주 앉은 류의건은 포장마차에 앉은 슈퍼모델처럼 참 어울리지 않았다.
조그마한 탁자 옆으로 드러난 옆구리가 정장을 입고 있어서 더 그랬다.
심지어 저게 다 근육이냐. 하 씨 개 부럽네.
불행인지 다행인지 승지는 의건이 입은 브랜드가 얼마나 비싼지는 몰랐다. 만약 그 가격까지 알았다면 혹시 음료수라도 튀길까 겁나 물만 마셨을 거다.
물론 태도까진 바뀌지 않을 테지만.
“용건만 빨리 끝내고 가죠. 서로 바쁜 마당에.”
“…승지 씨가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아요, 류의건 씨. 설마 진짜로 삼천만원이나 주고 무기를 살 생각은 아닐 테고. 나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승지는 일부러 세게 나갔다.
어쨌든 여기도 사람들이 많으니 막나가지는 못하겠지.
여차하면 프레임 컨트롤을 쓰고 도망갈 생각으로 승지의 몸이 긴장했다.
의건은 몹시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습니다.”
응?
[사과라니?]
승지와 성좌의 긴장이 바로 흐트러졌다.
“갑자기 사과를 한다뇨?”
“…….”
뭔 놈의 사과? 라고 튀어 나가려는 말을 간신히 다듬어 내놓았더니 류의건이 또 한참 머뭇거렸다.
“그 날 있었던 일말입니다.”
힘겹게 입을 연 의건은 차마 승지를 보기 힘든지 시선을 피했다.
그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