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돌리고 돌았냐? (3)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잠시 모두가 침묵했다.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마침내 류의건이 중압감을 이겨내고 입을 열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무슨 문제가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지…….”
“류의건 씨는 길드 연합과 연락을 안 하니까요. 그쪽은 다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 다른 각성자들에게 알러트의 위험성을 경고해야만 했으니까요.”
“동시에 비각성자들에겐 무조건 알러트의 이름을 숨겨야 할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뭣도 모르는 자들이 각성할 수 있다는 말에 홀려 알러트에 가입하는 일을 막아야하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유청은 알러트에 혹해서 넘어간 놈들은 죽어도 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갔던 인간들은 거의 다 죽었습니다. 결국 남 좋은 일만 하는 줄도 모르고 배신한 대가를 치른 셈이죠.”
“…죽은 사람들 중엔 우리가 정말 가족처럼 여기던 사람도 있었어.”
유월은 참혹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매끄러운 얼굴에 분노나 평정심이 아닌 감정이 깃들었다.
“난 아직도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더 구할 수 있었을 것만 같아.”
“……이미 지나간 일이야.”
유청이 외면하듯 고개를 돌렸다.
유량이 성좌를 빼앗긴 순간, 스킬을 잃고 폭주한 몬스터는 마왕의 힘까지 더해져 변해버렸다.
두 사람은 어린 동생이 눈앞에서 괴물에게 삼켜져 뒤섞이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 유청은 본능적으로 동생을 구하러 달려가고 말았다.
남은 자리가 마왕이 토해낸 몬스터가 뒤덮이는 줄도 모르고. 유월이 몇 명이나마 수습해 탈출한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유청은 마왕도 증오했고 알러트도 증오했다. 깊은 곳에선 자신도 증오했다.
차라리 던전에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알러트의 수하라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고통스러우면 생각을 멈추게 된다.
유청은 이 얘기를 하는 내내 승지를 쳐다보지 않기가 몹시 힘들었다.
알러트일지도 모르는, 마왕을 불러내는 저주에 걸린 인간이라니.
일부러 트라우마를 건드리려고 작정한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허나 만약 유월이 자신보다 먼저 승지를 봤다면 유청처럼 행동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유청은 앞으로도 죄책감과 분노를 이겨내지 못할 터다. 승지를 죽이고도, 팔을 잘리고도, 결백하다는 걸 알아도.
여전히.
“돌아버리겠네.”
승지가 툭 내뱉었다.
부들부들 떨고 있던 유청도, 자괴감에 젖어있던 유월도, 말문이 막혀있던 류의건까지 모두 승지를 바라보았다.
승지는 유량의 귀를 슬쩍 가리며 말을 이었다.
“왜 각성자들 절반이 멍청하고 나머지 절반도 또라이들인지 이해했다.”
번태나 최자림같은 각성자들이 과하게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즐거운 일에 집착하는 지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그렇게 안하면 딱 유청 꼴 나니까.
전쟁터에서 무슨 생각을 해. 그냥 죽이는 거지.
승지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각성자들은 죄다 2차 각성자더라니. 5년 동안 살아있는 전쟁을 치른 그들은 이미 일반인의 기준에서 많이 벗어나 버린 것이다.
“돌려돌려 말했지만 결국 싸우다 돌아버렸다는 게 결론이잖아.”
“승지 씨.”
“어쨌든 평생 머슴으로 부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있냐. 난 속죄하거나 반성하거나 그런 거 신경 안 쓴다. 알고 싶지도 않고.”
승지는 일부러 유월 쪽을 바라보지 않으며 얘기했다.
“만족할 때까지 써먹으면 그만이야.”
“…그래요.”
유월이 복잡한 표정으로 손을 모았다.
“그럼 앞으로 청이를 잘 부탁드릴게요. 유용하게 쓰시길.”
“예. 쓸모가 많은지 여러모로 써먹어 보겠습니다.”
“잠깐… 지금 되게 자연스럽게 인신매매가 이뤄진 거 같은데….”
갑자기 치닫는 대화에 류의건이 당황하며 중얼거렸다. 승지가 태연하게 덧붙였다.
“저 놈은 인권 없어. 일단 나한테는 계속 없을 예정이다.”
유청은 동의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도 살해한 이유를 밝힌다고 딱히 상황이 나아지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가족인 유월까지 한 술 더 뜰 줄은 몰랐지만.
“취직 축하해 청아. 앞으로 잘 모시길 바랄게.”
“…그게 지금 인권이 사라진 가족을 보고 할 소리야?”
“자업자득이라잖니.”
유월은 묘한 표정으로 응답했다.
“오히려 난 승지 씨가 이 얘기를 듣고도 네 팔다리를 더 자르지 않아줘서 참 착하다고 생각해.”
하긴 남이 들었으면 사람을 죽인 주제에 혓바닥이 길다고 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과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더 괘씸하네? 뭐 이런 식으로.
뜻밖에도 유월이 승지를 좋게 보자 유청의 눈이 뒤집어졌다.
“그건 저 놈이 착한 게 아니라 이미 협박을!”
“어허, 머슴아? 내가 아직 말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승지는 은근슬쩍 넘어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유청을 부리는 데 딱 하나 있는 거리낌이 바로 유월이었다. 혹시라도 유청을 막 대하는 자신을 보고 호감이 사라질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젠 유월이 자신의 편으로 넘어왔으니 더 이상 승지의 갑질을 막을 자가 없었다!
승지의 입이 음흉하게 올라갔다.
“가서 물이나 좀 떠와라. 큰 컵으로 사람 수 맞춰서 얼음 넣고 겉에 물기는 싹 닦아서.”
“젠장!”
“말도 곱게 해야지? 아, 그리고 이빨 보이지 말고 웃고 다녀라.”
유청은 부글부글 끓는 속으로 휙 몸을 돌렸다. 표정을 바꾸느니 차라리 그게 낫다고 여긴 모양이다.
본인이 원래 갖고 있는 증오와 달리 승지가 부려먹는 건 참 새로운 빡침을 가져다주었다.
훗. 내가 안 만나본 진상이 없다 이거야.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신적인 고통으로도 조져줄 수가 있었다.
[…우리 승지는 타고났구나.]
성좌가 탄식했다.
[승지야말로 우리 쪽 세계에서 왕으로 태어났어야 하는데!]
“탄핵당해서 목 잘릴 일 있냐.”
폭군 노릇하기엔 또 성격에 안 맞는다.
승지가 슬며시 유량의 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그럼 알러트 보스한테서 성좌만 되찾으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길 기대하고 있어요.”
유월이 천천히 유량을 쓰다듬었다. 유량은 승지의 셔츠에 침을 질질 흘리며 졸고 있었다.
“하필 량이가 예민한 나이에 변해버려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놀랄 때마다 스스로를 다치게 할 때가 많아요. 이렇게 낯선 사람을 보고도 편하게 있었던 적이 얼마만인지….”
승지는 유월이 혹시 우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말라있었다.
“고마워요, 승지 씨.”
“…별 거 아닙니다.”
“오조희 씨한테 새로운 정보도 받았으니 조만간 다시 조사해봐야겠죠.”
고맙다고 말하는 유월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텅 비어 보였다.
“알러트의 대가리가 잡히면 부숴버리겠어요.”
“비유적으로요?”
“말 그대로요.”
유월이 뿌드득 주먹을 쥐자 온갖 것이 다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뼈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옳은 판단입니다.”
복수는 철저하게. 그게 입맛에 맞았다.
유월이 문득 허공을 바라보았다.
“잠시만요. 길드 연합에서 연락이 와서.”
“편하게 받고 오십쇼.”
“그나저나 오늘 일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승지가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유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깐 자리를 떴다.
류의건도 이제는 유량의 생김새에 익숙해졌는지 조심스럽게 그를 관찰하고 있었다.
좀 과하게 뜨겁고 묵직하고 털이 나고 손발톱이 두껍고 긴 것만 빼면 평범한 애랑 똑같다.
승지가 문득 말했다.
“그런데 듣다 보니까 하나 궁금한 게 생기더라.”
“무슨 말씀이신가요?”
“유월한테 물어볼 얘기는 아닌데, 그 다른 도장 놈들 말이야.”
승지가 아래층에 있을 인간들을 생각하며 흙바닥을 쿡쿡 찔렀다. 자신이 빌딩에 침입했을 때 그들이 적극적으로 막아서던 생각이 났다.
“어떻게 그런 일을 겪고도 계속 여기 붙어있을 수가 있냐? 보통은 함께 들어간 던전에서 사고가 나면 무서워서라도 같이 있기 싫어하잖아.”
“서로 의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한 류의건이 이내 조금 더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어쨌든 청월량 길드에 있는 분들은 강하니까요. 각성자들은 어쩔 수 없이 강한 사람 곁으로 모이게 됩니다.”
“응? 왜?”
“미션을 더 편하게 깰 수 있기도 하고, 정말로 위험할 때 자신을 지켜줄 사람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류의건이 마치 그들의 심리를 꿰뚫어보듯이 설명했다.
“이 빌딩에 있는 분들은 유월 씨가 말한 사고를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곳에서는 바로 그들을 구하러 올 사람이 없다는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흐음. 그래서 열심히 유량을 지키는 것으로 청월량 길드의 보호를 받겠다는 건가.”
“아마도요.”
정작 청월량 길드 사람들은 죄책감 때문에 새로운 길드원을 받지도 않는데 말이지.
참 기생적인 관계다. 사람 사는 거랑 똑같이.
기분이 꿀꿀해진 승지가 유량의 털만 쓰다듬었다. 의외로 빗자루 같은 게 쓰다듬는 맛이 있었다.
“길드가 다 그런 거면 댁이 굳이 길드를 안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가네. 지금 혼자서도 빡세잖아?”
“……제가 아직 부족합니다.”
류의건은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뒤늦게 유청이 딸그락거리며 물을 갖고 왔다.
“월이는 어디 갔습니까?”
“엉. 누구 연락 왔댄다.”
물을 집어든 승지가 비스듬히 나무에 등을 기댔다.
인공적으로 만든 초원은 분명 넓긴 했지만, 천장이 한 번에 들여다보여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확연히 구분지어 졌다.
잘 꾸며놓았지만 역시 답답하다.
“여긴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냐?”
“예. 외출하는 건 불가능한데 량이와 섞인 괴물의 욕구는 만족시켜줘야 하니까요.”
“…….”
승지는 뚱하게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상황이 이런데 연애하는 건 아무래도 힘들겠지?”
“……!!”
“당신 진짜?!”
주어 없이 말했지만 찰떡같이 알아들은 류의건과 유청이 기막히게 반응했다.
역시. 유월만 빼고 다 눈치 까고 있었군, 젠장.
어차피 이 놈들한텐 들킨 거. 승지가 당당하게 배짱을 부렸다.
“뭐. 어쩌라고.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허…!”
“너보고 거들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옆에서 똥 씹은 표정만 짓지 마라. ㅈ나게 방해 된다.”
“하…!”
“오, 머슴 된 김에 노래도 하게? 에블바디 쿵푸 파이팅?”
약 올리듯 쿵푸 자세를 취해 보이는 승지를 보며 유청이 뒷목을 잡았다.
흑심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나올 줄이야!
“어디 학원 다닙니까? 사람 말려 죽이는 공시 치렀어요?”
“무슨 섭한 소리. 내가 사교육의 혜택을 받았을 거 같냐?”
“으윽! 젠장! 돌겠네!”
유청이 정말 미치고 팔짝 뛰었다. 엉덩이에 불붙은 놈처럼 난리를 치는 유청을 보고 성좌마저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크흡 이럴 수가. 승지가 이렇게 기깔나게 잘 놀리는 사람이었다니! 게다가 성장했잖아! 자기 마음을 인정했어!]
오냐. 그런다고 별로 달라질 건 없지만 말이다.
유월을 생각하니 유청을 놀리는 것도 재미가 없어진 승지가 대충이나마 지금까지 들은 정보를 정리했다.
보아하니 알러트를 잡기 전까진 유월은 조금도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도 졸지에 또 다른 마왕에게 찍혀서 서큐버스가 따라붙게 생겼으니 편한 상황도 아니었고 말이다.
설마 또 마왕을 소환하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나겠지.
행운이 이제 30이나 됐는데 또 그러면 나 진짜 파업한다. 반드시 파업해버린다 성좌신 놈아.
도저히 행운 수치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막장 인생이라니 상상하기도 싫군.
“아무튼 알러트나 마왕이나 먼저 걸리는 놈부터 조져버린다.”
그게 내 계획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