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오늘 들킬 것이다 (2)
수면제 효과 죽인다.
딱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각성자들이 번쩍 눈을 떴다.
안대를 쓰고 있던 사라설이 하품을 하며 벗었다.
“후와, 신기하네요. 이렇게 정확할 줄이야.”
“보통 약 먹으면 나타난다는 멍한 느낌도 없이 깔끔한데요. 역시 던전제.”
“음! 에너지 충전!”
최자림의 눈이 불길하게 초롱거렸다.
“제발 얌전히 있어라. 여긴 남의 나라다.”
“흠? 승지 씨 아직 모르시나보죠?”
“뭘?”
“일본은 완전히 야생이라구요.”
엄지를 척 든 최자림이 선글라스를 턱 썼다. 마치 게릴라전에라도 나갈 기세였다.
“물론 그럴 리가 있냐.”
“또 속았어.”
일본 나리타공항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관광객들도 평범했다.
다만 한국보다는 수속이 훨씬 오래 걸렸다.
사라설이 직원과 계속 일본말을 나눴는데, 차도 빌리고 여행 경로도 설명하는 듯 했다.
최자림만 계속 손이 근질거리는 표정이었다.
“몸 좀 미리 풀어두시죠, 승지 씨.”
“뭐하러.”
“우린 지금 추격전에 나섰지 않았습니까?”
“그래봤자 박편호 하나 잡는 건데.”
승지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라설이 빌린 차를 보기 전까지는.
천막과 그물까진 쳐진 초대형 덤프트럭이었다.
“……뭐냐?”
“휴! 각성자라는 걸 증명하느라 애썼는데 간신히 이정도 차량밖에 안 남았네요.”
사라설이 해맑게 진땀을 훔쳤다.
“그래도 남은 것들 중에선 이게 제일 좋은 거예요!”
“아니, 어디 전쟁 나가냐?”
흉흉하게 생긴 차체엔 이리저리 치인 흔적과 패인 자국까지 선명했다.
“어쩔 수 없어요. 박편호 각성자님이 마지막으로 계신 지역이 시가지 밖이니까요.”
“시가지밖에 뭐가 있는데?”
“몬스터죠!”
최자림이 음흉하게 웃었다.
부아앙.
엔진에서 코끼리 기침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트럭이 공항 밖으로 빠져나왔다.
사라설과 서명구를 앞좌석에 태운 승지와 최자림이 짐칸에 나란히 앉았다.
“우리나라야 1차 각성자도 많고 전시 상황 대비도 많이 해뒀으니 다른 나라보다 대처를 잘한 편이거든요.”
다행히 최자림은 평소와 달리 제대로 설명이란 걸 했다.
“하지만 사실 일본은 군대도 가지면 안 되고 재해 대비에만 빡센 편이잖아요? 땅도 우리보다 넓고. 관리 힘들죠.”
덜컹거릴 때마다 트럭이 크게 들썩였다.
“아무튼 결론만 말하자면 일본은 많은 땅이 마왕의 영토화 됐어요. 중요한 시설이 있는 곳은 복구했다지만, 아직도 몬스터가 넘쳐나는 세상이죠.”
“미친.”
“아! 그래도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민간인은 다 대피해서 안전하다구요?”
“걔들 걱정하는 게 아니라, 지금 그럼 우리 네 명이 맨 몸으로 거길 돌파하자는 거냐? 심지어 둘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데?”
최자림이 너무 태연해서 광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각성자는 그 몸만으로도 무기!”
“야 이.”
“걱정 마시라구요! 승지 씨 나이스 파이터 잖아요?”
최자림이 씩 웃으며 양 주먹을 부딪쳤다.
“그리고 제가 괜히 미스핏 길드에 유일한 전투원이 아니란 말씀.”
“곧 진입합니다!”
운전석에 있던 사라설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어느새 주변을 달리던 차들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들썩이던 건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트럭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로가 완전히 박살나고 몬스터들이 똬리를 튼 지역으로 넘어온 것이다.
“오 예! 메인 미션!”
최자림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승지 씨도 미션 보셨죠! 여기 대박이네요!”
“어… 어엉.”
승지가 대충 맞장구를 쳤다.
제길. 무슨 미션이냐.
나도 페널티만 아니었으면 미션 받아보는 건데.
미스핏 길드원들에겐 성좌가 분리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으니 승지가 아직 평범한 각성자인 줄 알 것이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봤다면 해외 출국부터 위험하다고 뜯어 말렸겠지만.
이대로도 싸울 수 있잖아?
승지도 말없이 인벤토리를 열고 무기를 쥐었다. 물론 최자림을 의식해 미리 뿅망치가 아닌 형상으로 바꿔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캬. 그게 윷놀이 때 받은 우승 상품입니까?”
“볼 수 있을 때 실컷 구경해둬라.”
승지가 무기를 까딱거렸다. 최자림이 킬킬거렸다.
“자, 아시겠지만 우린 구역 보스는 안 잡고 넘어가기만 하면 돼요. 앞좌석이 다치면 게임 오버. 지키면서 싸우는 거 잘 하십니까?”
“날 뭘로 보냐? 당연히 자신 있지.”
“좋습니다!”
피잉!
최자림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팔을 바깥쪽으로 뿌렸다.
“꽤액!”
바깥쪽에 어른거리던 검은 것이 얼굴에 칼을 맞고 나가떨어졌다.
최자림이 잔뜩 신난 얼굴로 어깨 근육을 부풀렸다.
“그럼 저부터 나갑니다!”
망둥이처럼 펄쩍거린 최자림이 트럭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맹렬하게 몬스터를 향해 달려갔다.
“아자아자아자아아!!”
손가락 사이로 뾰족한 것이 치솟더니 최자림 주변의 몬스터들에게 발사되었다.
보통 투척 무기는 암살자가 멀리서 쏘거나 견제용으로 쓰인다.
그런데 최자림은 달랐다.
본인이 적에게 돌진하더니 순식간에 수 십 개의 투척무기를 폭발처럼 사방으로 쏘아 보냈던 것이다.
만약 가벼운 무기라 맞아도 상대가 쓰러지지 않는다면 바로 막아서기 무섭게 최자림 본체가 몸통박치기를 박아버렸다.
그리고는 상대가 방어하든 말든 지근거리에서 급소를 노리고 다시 무기를 폭발시키면 쓰러지지 않는 적이 없었다.
순식간에 연쇄 폭발이 터지듯 최자림이 달려간 자리가 초토화 되었다.
“으하하하! 다 죽어!!”
“저 미친 놈.”
짐칸 너머로 고개를 내민 승지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걸어 다니는 지뢰가 따로 없었다.
아직 구역에 진입한지 초반이라 크게 강해보이는 놈도 없으니 내버려둘까.
오히려 저렇게 신나서 싸우다가 돌아오는 게 더 걱정이었다.
길 때문에 트럭이 가는 속도가 빠르진 않았지만 최자림이 반대 방향으로 간 게 문제였다.
차에서 뛰어내리기에 생각이 있는 줄 알았더니.
“길을 뚫어야 할 거 아니야.”
승지가 혀를 차며 긴 창 형태로 변한 마왕의 무기를 휘둘렀다.
“끽!”
“끼익!”
달려오는 트럭이 신기한지 공중에서도 몬스터가 내려앉았다.
“와이번이야!”
혼란을 틈타 광대 성좌가 머리를 내밀었다. 최자림도 가버리고 승지가 혼자 남았으니 나와도 될 줄 알았나 보다.
“이 자식이 들어가 있으라니까.”
“아앗! 승지야! 공격한다!”
“깨애액!”
쪼끄만 광대의 머리가 먹이로 보였는지 와이번들이 길쭉한 입을 내밀며 날아왔다.
“어딜!”
따닥!
[ 1콤보! ]
[ 2콤보! ]
승지가 휘두른 창에 순식간에 두 마리가 머리를 맞고 떨어졌다.
하지만 그건 오히려 하늘을 날고 있던 다른 놈들을 불러오는 효과만 가져왔다.
“까으윽! 꺄이이익!”
와이번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머리 위가 시끄러워졌다.
“승지 씨! 위에 괜찮으신 거죠!”
“운전이나 똑바로 해!”
승지가 서있는 짐칸은 푹푹 발이 빠지는 천막이라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바닥보다 허공답보에 의지해서 걷는 게 낫겠군.
살짝 위쪽에 자세를 잡은 승지를 향해 와이번 떼가 후두둑 내려왔다.
쿵! 따다다당!
“꺄아아악!”
승지가 민첩하게 창을 움직였다. 아예 처음부터 창의 중간을 잡고 있던 그는 트럭 크기를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길이를 늘려두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승지를 상대하기엔 너무 약한 몬스터들이다.
껌이지.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와이번들이 트럭 주변으로 떨어졌다.
“우왁!”
조수석 창문에 철퍽 붙은 와이번을 본 서명구가 기겁하며 책으로 때렸다.
다행히 창문을 쿵쿵 울리는 진동에 미끄러진 와이번은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졌다.
가뿐하게 와이번을 잡던 승지가 창끝으로 천장을 퉁퉁 쳤다.
“어이,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되는 거냐?”
“명구 씨! 지도 좀 다시 보여주시겠어요?”
“네넵!”
업그레이드 된 명구의 스킬은 구체화 된 지도를 확대할 수도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박편호가 있는 위치를 그려본 명구가 빠르게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적어도 여덟 시간은 가야 되겠는데요?”
“뭐?”
“화, 화내지 마세요! 박편호 각성자님도 계속 이동 중이라서 그렇습니다!”
“어딜 싸돌아다니는 거야, 그 양반.”
승지가 짜증스럽게 홱 돌린 창에 와이번의 머리가 깨졌다.
갑자기 미스핏 길드원이 연락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하면 수상하겠지?
제길, 기습이란 거 말처럼 쉽지가 않구만.
승지가 다시 빠르게 탕 천장을 쳤다.
“일단 알았다!”
“채애승지 씨!”
드디어 만족할 만큼 해치웠는지 최자림이 저 멀리서 휘딱휘딱 뛰어오는 게 보였다.
“같이 가욥!”
“니가 올라타, 임마!”
승지가 소리치는 사이 날아온 와이번 한 마리가 끽하고 날개로 뺨을 쳤다.
찰싹!
별로 아프진 않지만 바로 승지의 눈이 홱 돌아갔다.
“이자식이?”
잠깐 창을 떨어트린 승지가 주먹으로 응징했다.
“꿰에엑!”
“어딜 얼굴을 쳐.”
“맞아! 잘생긴 우리 승지 얼굴을!”
“기분이 상하잖아.”
똑같이 얼굴에다가 주먹을 돌려줬으면서도 승지의 좁혀진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어차피 미션 보상도 안 들어오는 거 귀찮네.
시선을 돌린 승지가 덥석 날아다니는 와이번 두 마리를 붙잡았다. 당황한 그들이 끽끽거렸다.
“인사는 좀 그만하자.”
꽈앙!
깔끔하게 서로 박치기를 당한 놈들이 헤롱거리며 떨어졌다.
압도적인 장난에 드디어 힘의 차이를 실감했는지 몰려들던 와이번이 물러났다.
“꺄아! 멋있어, 승지야! 최고!”
“넌 어째 떨어져도 변하질 않냐.”
상태창으로 볼 때보다 육성으로 들으니 훨씬 민망해진 승지가 헛기침을 했다.
광대가 방긋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후와아앗! 승지야! 우리 저것도 잡을까?”
“뭔데?”
승지가 고개를 치켜들자 하늘을 꿈틀거리며 흘러가는 검은 미꾸라지 같은 몬스터가 보였다.
“음, 저건 패스.”
“히잉. 역시 시간이 없어서 그런 거야?”
“아니. 저기까지 닿을 도구가 없잖아.”
승지는 다시 무기를 주워 길이를 늘려보았지만 하늘까지 닿으려면 까마득했다.
음, 역시 안 되겠구만.
휘이. 몇 번 창을 돌려보던 승지는 위쪽 대신 늘린 무기를 뒤쪽으로 뻗어주었다.
“앗싸!”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어오던 최자림이 무심하게 내밀어진 무기에 냉큼 올라탔다.
토토통!
원숭이처럼 가느다란 막대 위를 순식간에 뛰어온 최자림이 트럭에 쿵하고 안착했다.
“촤하핫! 감사합니다!”
“딴 짓하지 말고 앞 쪽은 네가 봐라.”
승지는 중단된 콤보 페널티를 빠르게 광대의 축복으로 주사위를 돌렸다.
“난 좀 더 큰 걸 노린다.”
“호오, 승부욕이신가요!”
“여덟 시간이나 달려야 되는데 피라미만 잡을 수는 없잖아.”
승지가 넘쳐나는 괴물들 속을 노려보았다.
자. 저기서 어떤 놈이 제일 세냐?
미션이 없더라도 승지의 투지는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