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보스를 부탁해 (3)
후두둑.
나무에 걸린 승지의 위로 비처럼 물방울이 쏟아졌다. 승지는 순전한 의지만으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살았네?
온몸을 뒤지게 두드려 맞은 것 같지만 어쨌든 전신에 강한 활력이 돌았다.
승지는 그대로 주변을 조금 돌아보았다. 지금도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물줄기들은 위층에 있던 호수에서 나온 물 같았다.
그럼 거대 라미아는?
삐걱거리며 목을 돌린 승지는 바로 던전 중앙에 쓰러진 거대 라미아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승지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른 각성자들은 어디로 갔지?
성좌라면 보일 것 같아 승지가 성좌를 불렀다.
“어이. 성좌야.”
토독. 토도독.
여전히 가느다란 물방울이 잎사귀를 두드릴 뿐, 기다려도 띠링 하고 나타나는 상태창이 없었다.
“성좌야?”
다시 성좌를 부르던 승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아직 성좌의 이름도 몰랐다. 걔도 인간이라면 이름이 있을 텐데.
그 수다쟁이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끄으….”
승지가 다시 팔다리를 움직였다.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터라 느낌이 이상했다.
아까 살아날 때 성좌가 페널티 어쩌고 하던데, 설마 무슨 부작용 때문에 못 나타나는 건가?
고민하던 승지가 단어를 바꿨다.
“상태창.”
띠링!
이번에는 제대로 상태창이 떴다.
[ 인간 : 채승지
계약자 : 웃고 있는 광대 1.
메인 미션 : 비어있음
서브 미션 : 비어있음
성좌 연결도 : 1 %
스킬 : 완벽한 콤보, 광대의 균형, 상단! 중단! 하단!, 광대의 축복, 프레임 컨트롤, 예스 커맨더, 가드 크래시, 허공답보 … ???, ???
스탯 : 힘 32
민첩 19
지능 10
체력 18
행운 1 (1~99) ]
“성좌 연결도가 왜 이래?”
살아있는 사람으로 따지면 숨만 간신히 붙어있는 수준이었다.
혹시 이래서 못 나타나나?
그동안 마구 구박하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성좌였다. 막상 조용해지니 제법 신경 쓰였다.
“어이, 성좌! 어딨어?”
그래도 잠잠하다.
“…야!”
[승지야!!!!!]
“왁 씨!”
드디어 나타난 대화창이 승지의 눈을 쳤다.
뭐, 진짜로 쳤다는 건 아니고 너무 가까워서 맞은 줄 알았다.
덩달아 놀란 승지가 대화창을 밀어냈다.
“너 아직 말할 수 있냐?”
[엏어헝 물론이지! 승지야 말로 이제 괜찮은 거야? 아픈 데 없어?]
“난 괜찮아.”
[으흐흑 그 나쁜 놈이 우리 승지를 해쳤어! 복수할 거야!]
승지의 눈이 확 불타올랐다.
“그래! 유청 새끼 지금 어딨어?”
[안 그래도 내가 보고 오는 길이야! 정확하게 설명해줄게!]
다행히 성좌는 평소랑 다를 게 없이 떠들었다.
* * *
류의건이 거대 라미아를 쓰러트린 후에도 던전은 여전히 건재했다. 다른 각성자들도 던전 클리어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라설은 혹시라도 몬스터랑 상관없이 파훼법이 있는 던전일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유청은 동의하지 않았다.
“다른 방법을 조사하기엔 점점 나타나는 몬스터의 수준이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바닥도 모두 부서져 버렸고요.”
“…….”
성좌의 말에 따르면 류의건은 거대 라미아를 쓰러트리고 나서도 오랫동안 침묵했다고 한다.
그 사이 유청이 대장처럼 나섰다.
“어차피 우리가 던전에 머무르기 위한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와, 저 가증스러운 놈.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은 놈을 애도하는 척 하는 솜씨가 훌륭한 싸이코패스였다.
침울해진 다른 일행은 유청의 말을 철썩 같이 믿어버렸다.
“하지만 던전에서 어떻게 나가죠? 공략도 어려운데 승지 씨가… 흑… 그렇게 됐으니까….”
사라설이 훌쩍였다. 놀랍게도 유청은 여기서 굉장한 뻔뻔함을 보여주었다.
“저는 승지 씨의 마지막을 지켜보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죽어가더라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걱정하더군요. 이걸 양도했습니다.”
그리고 유청이 열쇠장이의 고리를 꺼냈다.
“이런 개새…!”
설명을 듣다듣다 참아보려던 승지의 입에서 기어이 욕설이 터져 나왔다.
“와!! 그걸 아무도 의심을 안했다고?”
[응!]
“아오! 누가 하나 거짓말 탐지 스킬 정도는 갖고 있어야지! 어떻게 그걸 믿냐!”
[믿던데?]
“그 빡대가리 새끼들! 그래서 진짜 갔다고?”
[류의건이 반대하긴 했어!]
끝까지 승지의 죽음을 믿을 수 없었는지 류의건은 시체라도 찾아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청은 강경하게 나왔다.
만약 승지의 시체가 나온다면 괴물이 아니라 사람에게 당한 게 분명한 목의 상처를 들킬 테니까.
“승지 씨가 무슨 저주에 걸렸는지 잊었습니까? 안타깝지만 승지 씨의 시체는 이곳에 두고 가는 게 현명합니다.
“…찾아가려는 게 아니라 승지 씨의 유족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시신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아뇨. 그의 마지막 모습은 고통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게다가 시체도 잔해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 찾으려면 오래 걸릴 겁니다.”
유청이 고의적으로 사라설과 정준호에 눈길을 주었다. 이렇게 약한 애들을 또 위험에 빠트릴 거냐? 그런 거겠지.
“이미 우리는 목적을 잃었습니다.”
결국 류의건은 포기하고 일행과 함께 돌아갔다.
“그래서 결국 나 혼자 던전에 남겨졌다고?”
[안타깝지만 그렇게 됐어! 유청이 고리를 가져가버렸거든!]
승지의 미간이 푹 썩어들어갔다.
어찌어찌 살아난 건 좋은데 다른 의미로 좆됐군.
이 거지같은 던전에 버려지다니.
[하지만 괜찮아! 승지라면 분명히 이 던전을 공략할 만큼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성좌는 열심히 응원했다.
애쓴다 싶다가도, 자기가 쓰러져있는 동안 아무것도 못 했을 성좌가 떠오르니 마음이 복잡했다.
네가 뭘 하겠냐.
날 깨우기를 해, 건드릴 수 있길 해.
그럼에도 온갖 애를 써가며 자신을 살렸다.
승지는 일부러 그때 얘기를 자세히 묻지 않았다.
성좌 페널티면 분명 뭔가 문제가 생겼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밝게 행동하는 성좌가 묘하게 기특했다.
“그래, 까짓거 던전 하난데 설마 평생 못 깨겠냐.”
[맞아! 바로 그 자세라니깐!]
승지는 나무에서 내려왔다.
연달아 천장이 부서지고 몬스터의 시체가 남아있는 던전 중앙의 모습은 꽤나 처참했다.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기까지 하네.
“나 기절한 동안 몬스터 나온 건 없었냐?”
[아직은 없었어! 다른 사람들이 떠난 지 얼마 안 됐거든.]
정말로 간발의 차였던 모양이다.
“쓸 만한 거 있나 좀 뒤져보자.”
거대 라미아의 시체는 꼬리부터 머리까지 가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승지 무기는 떨어질 때 인벤토리로 다 주워놨어!]
“잘했어. 문제는 식량인데…….”
반은 뱀이고 반은 사람처럼 생긴 몬스터는 먹어도 되는 걸까?
……진짜로 굶어 죽기 직전까진 고민하지 말자.
미역처럼 널린 거대 라미아의 머리카락을 건너뛰던 승지는 문득 갈비뼈쯤에 걸친 작은 푸른빛을 발견했다.
“저건 뭐지?”
거대 라미아는 위층에서 떨어지기 직전까지 그것을 보호하려고 했는지 꼬리나 팔 같은 부위가 둥글게 말려있었다.
[알이다!]
“아 시발, 나 알에 트라우마 있다.”
모든 일의 원흉인 글라세로의 저주도 알을 깨면서 시작했으니.
영 찜찜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승지는 사람 머리만한 알을 들어 올렸다.
“차갑네?”
광택이 나는 푸른 알은 겉보기엔 신비로운 느낌을 풍겼다.
[ 로이에르의 알 ]
상태창이 떴지만 설명은 없었다.
“넌 이런 거 들어본 적 있냐?”
[전혀 모르겠어!]
빠드득.
[헉!]
설마 또 깨트렸나?
당황한 승지의 위로 그늘이 졌다.
알이 아니라 훨씬 단단한 게 발톱에 눌려 박살나는 소리였다.
나무를 부러트리며 나타난 용이 승지를 내려다보았다.
“……!”
흰 바위 같은 껍질, 숲의 한 면을 잘라다 놓은 듯한 크기. 사슴보다 더 길고 가는 주둥이에 까맣게 박혀있는 눈동자가 이질적으로 빛났다.
산신이 짐승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몸을 보호하듯 얽힌 식물들은 던전에 있는 식물과 똑같았다.
[꺄아아아아! 던전의 주인이다!!!]
성좌가 요란하게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승지는 먼저 공격할 순간을 놓쳤다.
그러나 용은 승지가 아니라 그가 안고 있는 알에 관심을 보였다.
뭐, 먹게? 날 안 먹고 알만 먹을 거면 얼마든지 요리해 드릴게.
승지가 슬쩍 용을 향해 알을 내밀었다. 그러나 용은 알을 삼키는 대신 다시 뒤로 물러났다.
쿵. 쿠웅.
한 번 걸을 때마다 바닥이 울렸다.
“……뭐지?”
[어, 어떻게 된 거야?]
천천히 물러난 용의 발톱이 바닥을 긁었다.
드드드득.
가벼운 동작에도 파묻혀있던 포석들이 뒤집히며 어떤 모양을 드러냈다.
[키워다오?]
“넌 또 뭔 소리야?”
[용이 만든 글씨 말이야! 그 알은 나의 후계이다. 키워다오. 라고 적혀있어!]
“야 그거 아무 때나 읽지 말라고 사라설이….”
승지의 말이 뚝 끊겼다. 방금 들은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던 것이다.
“키우라고?”
두근. 갑자기 알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하마터면 알을 놓칠 뻔한 승지가 허둥지둥 다시 알을 끌어안았다.
띠링!
[ 메인 미션 발생! ]
[ 메인 미션 : 던전의 후예
자격 : 던전의 책임을 부여받은 자
던전이 안정화될 때까지 주인을 안전하게 키워내면 보상을 받습니다.
보상 : 용의 숨결, 숲의 가호, 지지 않는 낮의 눈동자 ]
“왜 네가 안 키우고….”
무심코 중얼거린 승지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용이 다시 바닥을 긁었다.
드드득.
[자기는 던전을 지켜야 해서 알에만 집중할 수 없대. 그리고 승지네 일행이 여길 박살내고 몬스터들을 다 죽여서 대신 맡기는 것도 안 된대!]
아.
갑자기 승지는 뻥 뚫린 천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내리꽂히는 한기를 느꼈다.
용은 승지에게 간곡하게 부탁을 하거나 분노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 감정이 없는 눈동자는 그저 우연히 앞에 있는 자가 알을 키울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했다.
안 키우면… 죽이겠군.
승지가 한숨을 내쉬웠다.
“오냐, 책임지지.”
펄럭!
대답을 듣자마자 용은 흰 날개를 펼치더니 사라졌다. 그렇게 거대한 물체가 날아가지도 않고, 바람도 없이 사라지다니.
완전히 괴물이네.
[꺄아! 잘됐다! 용을 키우게 되다니!]
성좌는 금세 태도를 바꿨다.
[던전의 보스를 잡는 것보다 키워내는 게 훨씬 쉽잖아!]
“그럼 다행이다만…….”
문제는 자신이 동물이든 애들이든 키워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불길하게도 알은 점점 차가워졌다. 막막해진 승지가 무작정 알만 끌어안았다.
아, 시발! 어떻게 키우는지 물어볼걸!
난 씨몽키랑 선인장도 죽여 버린단 말이다!
그러나 사육법을 물어볼 용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승지는 알이 물속에 있던 것만 간신히 기억해냈다.
…담그자.
비장한 표정으로 승지가 물을 펐다. 그나마 항아리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호수가 박살나서 알을 넣어놓을 데가 없었다.
마무자의 항아리에 알을 집어넣자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퉁 소리가 났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
승지의 얼굴은 여전히 심각했다.
“성좌야. 우리 큰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