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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우린 X나 예전에 망했어 (1)

승지는 자신 있었다.

류의건의 성좌와 클랩 마왕이 상극인 존재라는 사실은 큐라를 통해서 진작 밝혀졌다.

게다가 신의 심판자는 한 번 써본 적도 있다.

문제는 시간이지.

아무리 류의건이 호구라도 무한정 성좌를 빌려주진 않을 테니까.

스킬창을 연 그가 다시 한 번 스킬을 확인했다.

[ 구속 ]

[ 정화 ]

[ 심판 ]

[ 소멸 ]

[ 가호 ]

급하게 빌려온 남의 성좌라 기본적인 스킬은 다섯 개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번에 한 번 써본 경험이 있어 다루기는 쉬웠다.

승지가 가호를 켜며 양 손을 꿈틀거렸다.

앞에는 클랩 마왕이 뒤에는 큐라가 눈을 번득이며 천천히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맹수가 한 마리를 동시에 노리듯 느릿느릿한 자세였다.

탐색은 길지 않았다.

파직!

“윽?!”

계속 무기를 잡고 있던 승지의 손에서 용접을 하듯 푸른빛이 튀었던 것이다.

“이거 왜 이래?”

“캬앗!”

클랩이 다시 높은 야수 같은 소리를 내며 뛰어올랐다. 그의 치마가 소용돌이처럼 회전했다.

젠장! 맞다! 신의 심판자랑 마왕의 무기는 상극이라 못 쓴댔지!

파라락!

치마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소리에 승지는 피하지 않고 마주섰다.

푸른빛이 그의 근육을 따라 터져 나왔다.

몸집을 크게 보이려고 큰 드레스를 입었지만 몸통이 있을 자리는 뻔하지!

따닥!

승지의 손과 뼈로 만든 코르셋이 부딪치자 돌이 깨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악!”

클랩이 한 순간 컥, 하고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지만 대신 승지의 허리도 작살이 났다.

살쾡이처럼 튀어나온 손톱으로 승지의 허리를 찍어버린 것이다.

분명 피할 수 있는 공격이었다.

그러나 슬그머니 나타난 큐라가 그의 발목을 붙잡은 채 웃고 있었다.

“안 꺼져?”

승지가 아예 발목을 휘둘러 그를 걷어찼다.

심판자의 가호 때문에 자기가 붙잡아놓고 타격을 입은 큐라가 꺅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승지 바로 옆에 떨어진 클랩은 배가 움푹 들어간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클랩이 손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승지 허리에서 나온 피가 손톱에서 뚝뚝 떨어졌다.

클랩이 아이처럼 손가락을 쪽 빨았다.

“웩, 맛없어.”

“원래 내장 터지면 쓰거든.”

승지가 훅 하고 숨을 내쉬자 조금씩 상처가 저절로 아물었다.

캬, 자가 치유까지 있었냐.

신의 심판자 스킬은 역시 사기구만.

클랩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내가 심판자를 상대하기 힘들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부하 보면 대가리도 알쪼지.”

“그래. 역시 이런 일은 나랑 안 맞아.”

클랩이 혀를 둥글게 말아 두 번 찼다.

“먹기 전에 내장부터 처리해줘.”

“어딜 가려고?”

승지가 성급하게 나서려다 멈칫했다. 인기척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스스슷.

천막처럼 부푼 클랩의 치마 뒤로 눈이 새빨간 인간들이 차차 나타났다. 하나같이 고딕 양복을 차려입은 그들이 삐죽거리는 귀와 이를 드러냈다.

“아 이 새끼들은 꼭 질 것 같으면 패거리를….”

“처리해.”

“키아아악!”

바닥과 천장을 포함해 달려드는 부하들을 향해 승지가 양 주먹을 쥐었다.

흠, 이제 와서 광대가 조금 아쉽군.

일대다로 싸우기엔 그래도 광대만한 녀석이 없었던 것이다. 프레임 컨트롤도 쓰면 편했고.

하지만 이 녀석들한텐 이게 제격이지.

파앗!

승지가 손을 펼치자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와 마치 방패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키익!”

“잔재주를!”

이게 잔재주로 보이면 뒤지는 거지 뭐.

승지는 훙, 하고 빛을 양 옆으로 쓸며 손으로 그들의 머리를 으깼다.

특이하게도 신의 심판자의 스킬은 발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발동한 채로 내버려두면 점점 더 힘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몸을 따라 흐르는 빛의 세기가 강해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이세계에 있는 신의 심판자에게서 힘을 전송받는 것 같았다.

우우웅.

육탄전으로 달려드는 부하들 뒤에서 조그마한 대머리 집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게 보였다.

마법을 준비하는 듯 바닥에 보랏빛 금이 그어지고 공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저러면 당연히 원거리부터 노려야지.

그러나 당장 그 쪽으로 달려가려는 승지의 앞을 삐딱한 부하들이 가로막았다.

심판자의 가호 때문에 제대로 승지를 만질 수도 없으면서 그들은 그냥 시체로 길을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하찮은 소모품이었던 것이다.

“저리 안 비켜!”

“후후후흐.”

“이히히히!”

그들이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승지를 계속 껴안으려고 들었다.

납작한 그들의 팔 다리는 금방 부러질 것처럼 생겼는데도 의외로 강철처럼 단단하고 질겼다.

섬광에 타들어가면서도 좀처럼 끊어지질 않아 살아있는 경계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큐라도 마찬가지였다.

승지가 발이나 손을 움직이려고 잠깐 주의를 돌릴 때마다 갈비뼈 부근에서 불쑥 나타나 승지를 껴안으려고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반항할 거 없어!”

“안 꺼져?”

큐라가 확하고 머리를 내밀 때마다 승지는 정화 스킬을 터트려야 했다.

한 때 인간까지 말려들어 새하얗게 정화해버렸다는 심판자의 스킬은 과연 위력이 대단했다.

반경 3미터 주변에 있는 부하들이 모조리 재가 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문제는 한 번 쓸 때마다 몸에 반응이 바로바로 온다는 점이었다.

쿠웅!

누군가 두개골에 쇠고리를 씌우고 망치로 때린 것 같았다.

[ 이계의 힘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기존 페널티에 합산 됩니다! ]

순간 눈앞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래도 신의 심판자를 계속 쓰기엔 승지의 스탯이 많이 부족한 거 같았다.

게다가 기존 페널티라니.

승지는 아귀처럼 달려드는 부하들을 밀쳐내고 이빨을 박살냈다.

마지막으로 광대 성좌를 데리고 있었을 때는 분명 페널티를 모두 해소한 상태였다.

그런데 기존 페널티를 운운하는 상태창이라니.

혹시 성좌를 데려왔을 때 류의건 놈의 페널티도 같이 온 건가?

파아앗!

승지가 폭풍처럼 클랩의 부하들을 으깨고 있을 때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었는지 보라색 빛이 폭발하듯 천장까지 치솟았다.

그 빛에 주문을 외우던 대머리 집사들의 몸이 퍽퍽 터져나갔다. 뒤이어 불길한 그림자가 드러났다.

“크르륵.”

뜨거운 입김이 콧김을 따라 뿜어져 나오는 소 머리의 괴물이었다.

불끈 솟은 허벅지와 어깨의 근육 하나하나가 모두 흉기처럼 보였다.

저거 미노타 어쩌고 하는 괴물 아냐?

신화에서나 등장하던 괴물을 본 승지가 인상을 썼다.

“죽여라!”

큐라가 응원하듯 꺅꺅거렸다.

승지는 꽤 몸에 무리가 가는 걸 무시하고 연달아 스킬을 사용했다.

쾅, 쾅, 쾅!

정화로 남은 부하들까지 치워버린 그가 구속 스킬을 사용했다.

푸른 말뚝이 허공에서 미노타를 향해 쏟아졌다.

“크어어어!”

괴물이 포효하며 양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심판자의 말뚝이 그의 팔로 두두둑 박혔다.

그러나 그까짓 건 바늘만큼의 충격도 없다는 듯 말뚝이 꽂힌 팔이 그대로 승지를 향해 내리쳐졌다.

콰앙!

그가 신은 운동화가 바닥에 긁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간신히 주인을 타격 장소에서 밀어냈다.

순간 등골이 짜릿했다.

프레임 컨트롤이 없으니 모든 공격을 직접 느끼고 반사 신경으로 피해야 했다.

까딱하면 그대로 으깨질 뻔 했으나, 죽음을 각오해야 할 공격의 섬뜩함은 순식간에 스릴로 탈바꿈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림도 없지!”

승지가 기울었던 몸을 긁듯이 일으키며 뛰어올랐다. 푸른빛이 더욱 거세게 뿜어져 나왔다.

[ 이계의 힘을 감…. ]

콰앙!

“므어어어!”

승지가 괴물의 팔에 박힌 말뚝 위로 힘껏 내려찍었다.

근육 위쪽에 박혀있던 말뚝이 그대로 밑을 찢고 나가며 피를 푸확 뿜어냈다.

“크어어어! 므흐어어어!”

팔이 관통 된 괴물이 울부짖으며 날뛰었다. 그러나 승지는 이미 두 번째 구속 스킬을 발동한 뒤였다.

콰과곽!

이번에는 괴물의 머리와 어깨로 빛의 말뚝이 떨어졌다.

디잉!

동시에 또 한 번 머리 옆쪽으로 심한 고통이 강타했다. 페널티 탓이다.

와, 미친. 돌아버리게 아프네.

순간 뒤로 넘어갈 뻔한 눈동자에 승지가 혀끝을 꺽하고 넘기며 간신히 초점을 되돌려놓았다.

어쨌든 스킬의 효과는 확실했다.

소환된 지 60초 만에 괴물이 쓰러져버린 것이다.

이번엔 근육이 아닌 뼈까지 제대로 관통했는지 괴물이 무력하게 바닥에 박힌 채 경련했다.

구속 스킬 두 번밖에 안 썼는데 벌써 이 정도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켜놓은 가호 스킬은 이제야 좀 몸에 활력을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을 타고 흐르는 푸른 힘이 새로운 세 번째 핏줄처럼 두근거리며 기운을 더했다.

이야, 진짜 사기 스킬. 류의건 진짜 성좌를 타고나긴 타고났어! 부럽게 말이야!

페널티의 충격도 계속 발동되어있는 가호 덕분에 쉽게 잊혀졌다.

그럼 뭐, 남은 일은 다 털어버려야지.

타앗!

승지가 괴물을 박차고 달려 나가자 말뚝에 박혀있던 그 큰 몸뚱이가 찌익 찢어지며 훅 뒤로 밀렸다.

“누가 누굴 먹는다고?”

승지의 목표는 클랩이었다.

진작 도망갈 줄 알았더니 부하들이 당하는 걸 보고도 그는 가만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클랩이 박살난 허리를 한 손으로 우아하게 짚었다.

“이걸.”

그의 입술이 쭉 찢어졌다.

클랩의 손엔 아까 승지가 던져버린 마왕의 무기가 들려있었다.

“!”

젠장! 저런 것도 먹을 수 있는 거냐?!

마왕이 마왕의 힘을 흡수할 수 있으니 노리는 게 당연했다.

승지는 미간을 좁혔다.

그래도 내가 더 빠르다!

“어딜!”

콰악.

마왕의 무기가 클랩의 입에 들어가기 전에 승지가 먼저 칼날을 붙잡았다.

그러나 납작한 무기는 클랩의 손에 잡혀있었을 때보다 승지를 만났을 때 더욱 충격을 받은 듯 파르르 떨렸다.

“야 이, 주인도 못 알아보냐!”

“당연하지.”

클랩은 어깨를 덜덜 떨면서도 무기를 놓지 않는 승지를 한 번 흘긋 올려다보았다.

“마왕은 마왕을 섬길 뿐이야.”

터업.

클랩의 입이 괴기하리만큼 크게 벌어지더니 무기와 함께 승지의 손을 삼켰다.

그러나 승지의 손도 번개같이 움직였다.

클랩이 제 오른 손목과 무기를 삼킨 순간 반대쪽 손으로 곧장 클랩의 목을 틀어쥔 것이다.

“!”

“웁.”

승지가 급하게 힘을 주었다.

심판자의 가호가 그의 팔을 두르고 있었는데도 과연 마왕은 마왕이라.

부하들과 달리 목이 우그러들뿐 승지에게서 도망치듯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모양새가 이상해졌다.

마치 마왕의 무기가 생선 가시처럼 클랩의 입과 목 사이에 걸려버린 것이다.

“뱉어.”

뭘 잘못 먹은 개를 다루듯 승지가 피식 웃었다.

“지금 뱉으면 범윤오 위치만 듣고 살려주지.”

클랩은 어림도 없다는 듯 눈썹을 홉떴다. 좀 우습다는 눈빛이기도 했다.

지금 삼키고 있는 쪽은 엄연히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클랩은 오히려 놓지 말라는 듯 승지의 손목을 양 손으로 붙들었다. 손부터 시작해서 전신을 꿀꺽 삼킬 기세였다.

“어쭈, 안 뱉어?”

후회할 걸.

승지가 속으로 비웃었다.

지금 누가 망했는지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그가 여전히 승지의 손에서 달아나려고 요동치는 무기에게 소리쳤다.

“도망가고 싶냐? 그럼 토해내게 해!”

꿈틀.

무기의 형태가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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