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돌리고 돌리고 (1)
승지는 가벼운 마음으로 번태가 부른 회식에 참여했다. 어쨌든 비밀리에 진행한 마왕 토벌전이었으니 작은 규모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격적일 줄이야.
웬만한 연회석 뺨치는 실내에 긴 테이블이 쫙 깔려있었고, 음식도 미리 세팅되어 있었다. 특히나 화룡점정이었던 부분은 테이블마다 얌전히 올려둔 음료수와 주류 병이었다.
대체 누가 회식을 저렇게 뷔페 단체 예약처럼 해놓는 거냐.
누구긴 누구겠나. 번태 밖에 없지.
시원하게 씻고 나온 번태는 찜질방에서나 볼 법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늘색 반바지에 머리에 수건까지 양머리로 야무지게 말아놓았던 것이다.
와, 저게 대체 언제적 거야?
“자 다들 앉게! 앉아!”
승지가 기묘한 표정으로 자리로 들어갔다.
게다가 메뉴 선정도 엄청나게 아저씨 같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능이 백숙과 참치 회와 소고기 육회는 반지르르한 윤기가 흘렀다.
아직 삼십대라면서 이렇게까지… 아저씨처럼 굴어야 되겠습니까. 번태 양반.
[히야~ 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야!]
“너라도 신기하다니 그나마 낫네. 많이 먹…지는 못하니 봐두기라도 해라.”
[히잉.]
하긴 확실히 돈 주고 사먹으려면 비싼 음식들이긴 했다.
옛날 생각난다. 예전에 알바하면서 봤던 아재들이 이런 거에 환장했었지.
비싸서 자주는 못 먹었지만 승지도 꽤 좋아하는 메뉴였다.
게다가 그래도 랭킹 1위가 쏜 음식이라고 육질이 남달랐다.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서 사라지는 참치 회는 같이 싸먹는 김마저 풋내가 달라 담백하고 깊은 맛이 났다.
계란 노른자를 살짝 풀어서 배와 함께 얹어 먹은 육회는 또 어떻고. 시원하고 고소한 향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맛있네.
여기에 야들야들한 닭다리까지 뽀얀 국물 속에서 끓고 있으니 쌀밥이 아주 당겼다.
딸각, 공깃밥을 제 앞으로 당겨오는 승지에게 두 번째로 도착한 류의건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언제 봐도 잘 드시고 계시네요.”
“음.”
승지가 가볍게 머리를 흔들며 너도 빨리 먹으라는 몸짓을 취했다.
밥보다 얘기가 고픈 류의건은 일단 분위기를 맞춰보려고 얌전히 앞자리에 앉았다.
역시. 저놈은 이런 데 앉아있어도 분위기가 살아있군. 소주잔을 들어도 보드카나 위스키 같은 느낌을 낼 수 있다니.
애늙은이 같은 고지식함이 그런 정취를 더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에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이토록 무사하게 해결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에이, 왜 그렇게 딱딱한 얘기를 하세요. 회식 자리에서. 먹는데 체하겠다.”
최자림이 털썩 옆자리에 앉으며 끼어들었다. 승지의 눈이 사나워졌다.
“너 아까 쓰레기장에서 쓸데없는 짓만 너무 열심히 하더라?”
“하핫, 환호 진짜 완벽했죠? 감사 인사는 넣어두세요~.”
“다신 하지 마.”
승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근데 명구는 어디가고 혼자 오냐? 맨날 둘이 붙어 다니더니.”
“사춘긴가 봐요? 갑자기 혼자 다니고 싶다고 방문도 안 열어주던데요.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네가 헬바티아 던전에서 미련 없이 떨군 게 원인 아닐까?”
“아하, 그럴 리가요!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헉 승지 씨 여기 백숙 안에 전복도 있어요!”
“…그래 먹기나 해라.”
최자림만 왔을 뿐인데 회식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승지는 먹으면서 눈으로 유월을 찾았다. 아까 먼저 온 거 같더니 왜 안 보이지.
유월 대신 엉뚱하게 번태가 이쪽을 발견하고는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또 번개를 치며 이쪽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자네들!”
“어우 씨!”
쿠루릉 하는 천둥번개의 진동 때문에 테이블이 흔들리며 그릇이 엎어 졌다.
“실내에선 좀 걸어 다닐 수 없습니까?”
“모르는 소리! 길드 건물만큼 순간이동을 자주 할 수 없는 곳이 없다네!”
번태가 설명했다.
“내 순간이동 좌표가 길드원들에게만 찍혀있거든. 자네들에게 나눠준 소환부로도 이동이 가능하긴 하지만 1회용이라 말일세!”
“아 예. 그렇습니까.”
“근데 승지 자네 정말 우리 길드 올 생각 없는가? 자네라면 적극 환영하지!”
“사양하겠습니다.”
승지는 거절했다. 물론 랭킹 1위 길드면 혜택도 좋고 길드장 라인이니 잘해주겠지만.
지금 회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가족적인 분위기가 자신에게는 몹시 불편했다.
그냥 적당히 알고 지내는 정도가 좋겠지.
“번호나 알려주십쇼. 가끔 연락드리겠습니다.”
“이거 참 아쉽구만.”
번태가 입맛을 다시며 승지에게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를 저장하며 승지가 물었다.
“근데 어쩌다 말투랑 취향이 그 지경이 된 겁니까? 성좌가 그래요?”
“음? 아냐. 내 성좌는 오히려 얌전한 편이지. 나 때문에 고생이 많은 친구야.”
번태가 빙그레 웃었는데 이 때만큼은 컨셉종자가 아니라 정말로 길드 하나를 책임진 길드장다워 보였다.
“이번 일도 그렇고 다른 길드원들도 잘 따라와 줘서 고마울 뿐일세. 그러니 내가 더욱 힘내서 마왕을 사냥하고 강해져야 하지 않겠나!”
잠깐 지속하던 번태의 진중함은 최자림이 끼어들면서 금방 끝났다. 최자림이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바짝 붙었던 것이다.
“자! 우리 사진 찍어요, 사진! 글라세로 토벌 기념으로 사진 하나 없어서야 되겠어요?”
“그거 좋지! 류의건 선생도 이리 오시게!”
“아 저는 괜찮….”
“어차피 이따 단체 사진도 찍을 걸세! 우리끼리도 따로 한 장 있어야지!”
“인간들아 이거 마왕 잡은 거 비밀로 하는 거 아니었냐고.”
승지가 투덜거렸지만 번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손가락으로 K-하트를 그렸다.
“우리끼리만 보면 되지! 자 어서어서!”
번태가 다른 팔로 류의건을 끌고 와서 얼결에 그도 함께 어색하게 카메라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왼쪽엔 최자림, 오른쪽엔 번태라니. 기력 빨리는 최강 조합이다.
[으앙! 나도 찍히고 싶어!]
성좌 넌 이게 아쉽냐. 나랑 바꾸자.
승지는 기어이 대문짝만하게 얼굴 사진이 한 장 찍히고 나서야 풀려났다.
“어우 너무 잘나왔다! 유청 씨랑 유월 씨는 어딨죠? 그 분들이랑도 한 장 찍어야 하는데!”
“내가 찾아올게.”
승지가 냉큼 의자를 뒤로 빼냈다.
탈출이다!
자연스럽게 빠진 승지와 달리 타이밍을 놓친 류의건은 그대로 붙잡힌 채 필터까지 먹인 사진을 계속 찍혀야 했다.
마지막으로 본 게 고양이 필터던데. 불쌍한 녀석.
유월과 유청은 연회장 반대편 구석에 있었다. 그들도 랭커니 사람들이랑 실컷 어울릴 줄 알았는데, 자기네 길드가 아니라 그런지 의외로 겉도는 느낌이었다.
승지를 발견한 유월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고생하셨어요. 결국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에요.”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아… 그렇죠.”
유월이 잠깐 조용해졌다. 이런. 앞으로도 잘해보겠다는 말이었는데.
단어 선택에 실패한 승지가 한숨을 삼켰다. 젠장 우린 아직 정산이 덜 되어서 다르게 들리는 사이였지.
원인이 된 유청 놈은 전혀 도움도 안 된 채 서있기만 했다.
“약속했던 대로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제대로 이해하시려면 우리 길드로 한 번 방문해주셔야겠어요. 보여드린 다음 설명하는 게 편하실 겁니다.”
이번엔 들여보내주는 겁니까?”
“얼마든지요.”
유월이 희미하게 웃었다. 와! 우와! 웃는 건 처음 보는 데 이건! 진짜! 개 예쁘네!
잠깐 미모에 홀린 승지의 표정이 잠깐 풀리자 귀신같이 그걸 잡아낸 유청의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 새끼? 라고 하는 거 다 보인다, 임마.
그래도 우리 둘이 잘 되면 너한텐 좋지. 머슴에서 처남으로 승격할 수 있는 기회라고. 좋게 생각해라.
승지가 은근하게 히죽거리며 입꼬리를 올리자 유청이 기어코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당장 내일 오십시오. 빨리 설명하고 끝내는 게 서로 좋을 것 같군요.”
“뭐, 가긴 갈 건데. 천천히 연락하지. 일단 부활 신고 하러갈 거라서 말이야. 집에 들러서 유품도 챙겨야 하고.”
“유품?”
“내 물건이 돌고 돌아서 집으로 갔다고 해서 말입니다.”
승지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잠깐 집에 들러 열쇠장이의 고리만 챙기고 나올 생각이었다.
유월이 말했다.
“그럼 그 전에 사죄하는 의미로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하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
“예의를 지키는 거야. 네가 안한 거.”
“난 상관없습니다.”
승지의 웃음이 점점 짙어졌다. 자기편을 들어주는 유월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반대로 유청의 표정은 점점 썩어 들어갔다. 어떻게 저 빤히 보이는 흑심을 모르냐고 속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유월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승지 씨 가족 분들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같이 모셔도 좋겠군요. 유품을 가져오실 때 말씀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갑자기 승지가 뒷목을 긁적였다.
뭐야, 그런 거였나.
사심 충만한 이쪽과 달리 저쪽은 정말로 사과만 목적인 모양이었다. 가족까지 얘기가 번지자 갑자기 승지의 얼굴도 차분해졌다.
“서로 칼부림까지 한 사이에 굳이 밥까지 얻어먹는 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요?”
유월이 진심으로 의아해하자 더 아까웠다. 그냥 이걸 빌미로 밥이나 같이 먹을까 싶긴 하지만.
승지는 깔끔하게 털어냈다.
“그래요. 다음에 연락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설명 기대하죠.”
“아, 네.”
유월이 묘한 표정으로 승지를 바라보았다.
그와 거리가 멀어지자 유월이 유청을 돌아보며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어?”
“…너 일부러 눈치 없이 구는 거냐? 저 인간은 죽어도 안 돼.”
“왜 또 시비야? 그리고 죽인 건 너잖아.”
유월과 유청이 투닥거리는 걸 뒤로하고 승지는 잠시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나 잠깐 쐴까.
좀 조용해지고 싶어서 나왔는데, 역시나 잠잠히 있을 리가 없던 성좌가 슬쩍 대화창을 내밀었다.
[…아깐 왜 거절한 거야?]
“응?”
[밥 먹자는 거! 그것도 유월이 먼저 먹자고 한 거였잖아!]
“뭐, 그냥.”
내키질 않아서.
승지가 시선을 돌리자 성좌가 부담스럽게 달라붙었다.
[(๑ӦㅅӦ๑)이상하다…. 뭔가 있는데…?]
“있긴 뭐가 있냐.”
승지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어, 거기 누가 담배 피웁니까?”
복도 쪽 창문에 기댄 사람에게서 담배 연기가 하나 새어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