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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Clap your hands (2)

“안 됩니다.”

체스판이 나타날 때부터 얼굴이 굳어있던 류의건이 반대했다.

“마왕이랑 게임이라뇨. 너무 위험합니다.”

“게임은 안 위험해.”

클랩이 지루한 지 눈살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싸우는 데 위험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규칙을 추가하면 되잖아.”

클랩이 조그마한 손을 휘젓자 거대한 체스판 위로 초록색 전광판이 나타났다.

[ 헬바티아의 던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아니…?!”

“저건.”

“지금 너희들이 서 있는 곳은 헬바티아한테서 빌려온 거야.”

클랩이 삐딱하게 머리를 기댔다.

“규칙을 정하고 싶으면 내가 아니라 헬바티아한테 얘기하면 돼. 그럼 상관없지?”

확실히 게임에 참가하는 게 아닌 제 삼자가 규칙을 관리한다면 심판이 생기는 셈이니 믿음이 더 가긴 했다.

문제는 그 심판 놈도 마왕이라는 거지.

유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헬바티아는 자기가 정한 규칙을 어긴 적은 없네요. 문헌에서도 발견된 사실입니다.”

류의건이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게임에 참가한 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클랩이 턱을 까딱였다.

[ 규칙 추가! 게임에서는 죽음 금지! ]

바로 초록색 설정창이 뜨며 규칙을 적용했다.

“주술이나 스킬로 정신을 세뇌해서도 안 됩니다.”

[ 규칙 추가! 게임에서는 세뇌 금지! ]

류의건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전광판이 쉭쉭거리며 한차례 김을 뿜어냈다.

“잠깐, 멈춰 봐.”

승지가 또 안전을 위해선 추가할 규칙이 뭐가 있는지 고민하는 류의건 앞으로 끼어들었다.

“우리가 왜 이걸 해?”

승지가 거절하려는 줄 알고 류의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승지는 착실히 그의 기대를 배신해주었다.

“수지가 안 맞잖아, 수지가. 던전 문 열어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이렇게 거창하게 판을 벌리면 우리 손해지?”

“네? 여기서 왜 이득을….”

“그러네요. 셋이나 싸우는데 받을 건 받아야죠.”

그건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듣던 류의건은 유월까지 동의해버리자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알뜰하게 가성비를 챙기는 민족을 본 클랩이 귀찮은지 대충 대답했다.

“좋아. 그럼. 놀아주는 대신 부탁도 들어주고 내 창고에서 원하는 걸 하나씩 가져가던가.”

“좋다!”

승지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럼 누가 우리랑 싸울 거냐?”

클랩이 가볍게 혀를 굴려 찼다. 그러자 이미 허공을 날아다니며 승지 일행을 구경하고 있던 부하들 중 두 명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마왕님을 위해 겨룰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영광.”

눈이 세모꼴인 것만 빼면 미끈하게 생긴 남자와 이제 막 걷기를 시작한 아기였다.

“야야, 잠깐만. 싸운다면서 쟤는 좀 너무하지 않냐?”

승지가 아기를 손가락질했다. 긴 꼬리가 달린 아기가 승지의 지적에 불만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정말 치고 박고 싸우는 게 아니라 게임이잖아. 해보면 알아.”

클랩이 다시 박수를 치자 이번에는 새까만 왕관이 생겨나더니 아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기가 킹, 남자가 조커였다.

유월이 지적했다.

“숫자가 하나 모자라는데요.”

“퀸은 바로 나야!”

계속 팔걸이에 앉아있던 큐라가 싱긋 웃었다. 허공에 뜬 왕관을 직접 잡아 머리에 쓴 큐라가 팔걸이에서 내려왔다.

세 사람이 체스판 위에서 그들을 마주보고 서자 비로소 게임을 시작할 준비가 끝났다.

그제야 약간 만족스러워진 클랩이 말했다.

“체스에선 하양이 선이야. 너희가 먼저 싸울 상대를 정해.”

“그럼 제가 나가겠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가 먼저 겪어야 대응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류의건이 앞으로 한 발짝 나왔다.

“그럼 우리 쪽 상대는 여기!”

큐라가 웃으며 한 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 밑으로 아장아장 짧은 다리를 움직여 아기가 나왔다.

비장한 얼굴이던 류의건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잠깐, 아기는 좀…!”

“게임 시작!”

팟!

현란하게 빛나던 전광판이 꺼졌다. 마왕성에선 아주 작은 불빛에 불과했는데도 사방이 어두워졌다.

[불이 꺼진 게 아냐! 우리가 있는 체스판에 돔이 덮인 거야!]

조명을 껐다가 켠 순간, 무대가 바뀌는 것처럼 다시 주변이 환해지며 달라진 체스판의 모습이 드러났다.

승지를 포함한 사람들은 모두 체스판의 바깥 가장자리로 밀려나있었다. 그들을 체스판과 분리한 틈 밑으로 바닥을 가득 채운 칼날이 보였다.

따로 떨어져 나온 류의건과 아기는 딱 한 칸을 건너뛴 중앙선에서 서로를 대각선으로 마주 보았다.

[ 첫 번째 대결! 킹 VS 킹! ]

승지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격투 게임 전광판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게임은? 왕의 전진! ]

헬바티아의 던전이 초록빛 전광판을 번득이며 규칙을 띄웠다.

[ 왕에게 후진은 죽음뿐! 자신이 서있던 칸에서 벗어나면 발판이 사라진다! 마지막 칸까지 살아남는 자가 승리! ]

전광판에 뜬 규칙을 본 류의건은 당황하고 말았다.

“게임에선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지는 않아.”

헬바티아의 전광판 대신 클랩이 대답했다.

“그냥 떨어져서 잠깐 아플 뿐이지.”

“잠깐?”

가장자리에서 보고 있던 승지가 회의적으로 틈을 내려다보았다.

웬만한 단두대 뺨치게 생겼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류의건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 나갔다. 아무리 봐도 상대는 아기였다. 그리고 류의건의 성좌는 도덕 끝판왕이었고.

“이거 망했네.”

승지가 중얼거렸다.

분명히 아기의 정체는 괴물이다. 당장 튀어나온 저 꼬리만 봐도 각이 나오잖아?

하지만 그것만 빼면 생긴 건 인간의 아기와 너무도 똑같았다. 류의건의 깐깐하고 더럽게 고지식한 성좌가 아기를 죽이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본인도 너무 괴로워 보여!]

성좌가 걱정스레 류의건을 바라보았다. 승지 일행 중에서 가장 아기에게 잔혹할 수 없는 인간이 바로 그였다.

“상대가 머리를 잘 썼군요.”

유월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장 약한 패로 가장 강한 패를 상대하는 건 기본이라지만, 그걸로도 모자라 작정하고 이기려 할 줄이야.”

“설마 이걸 지겠습니까?”

“지금 보세요. 건드리지도 못하는걸요.”

아기가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은 기세로 아장아장 걸어가자 류의건이 주춤 물러났다.

한 칸을 지나자마자 툭 하고 발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상대로 바닥 밑은 날이 시퍼렇게 선 칼로 가득했다.

다가오는 아기의 모습에 류의건이 어쩔 수 없이 다른 칸으로 옮겨갔다. 그가 있던 자리도 툭 떨어졌다.

하지만 아기가 다가오는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류의건은 낭패한 얼굴로 그를 피하기만 했다.

답답해진 승지가 소리쳤다.

“야! 그대로 당하고만 있을 거냐!”

“같은 칸에 올라가 보세요!”

유월이 뒤이어 소리쳤다. 유월의 말을 들은 류의건이 얼른 아기가 있던 칸으로 뛰었다.

그가 아슬아슬하게 아기를 밀치지 않고 착지했지만, 이번엔 둘 다 칸 위에 서 있는데도 발판이 툭 떨어졌다.

“…!”

“게임이 그렇게 간단할 리가?”

관람하고 있던 클랩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바닥이 꺼지자마자 황급히 솟아오른 류의건은 그 와중에 아기까지 구해 다른 칸에 올려놓았다.

“환장하겠네.”

승지가 이마를 쳤다. 이 게임, 이기는 건 고사하고 끝날 수나 있는 거냐.

한편 류의건에게 잡혔을 땐 잠깐 사색이 됐던 아기는 무사히 칸 위로 몸이 놓이자 눈매가 비열해졌다.

어떻게 해도 류의건이 자신을 해치지 못할 거란 확신이 든 것이다.

아기가 통통한 볼로 음흉하게 씩 웃으며 류의건을 향해 손을 꼼지락거렸다.

“에비.”

“……제발 거기서 멈춰주시겠습니까?”

“싫어.”

툭. 투둑. 아기가 걸어올 때마다 발판이 사라져갔다. 한참동안 마른세수를 하던 류의건은 곧 생각을 바꿨다.

[오오! 뭔가 보여주려나 봐!]

타앗!

가볍게 뛰어오른 류의건이 아기의 진로방향에 있는 칸을 모조리 한 번씩 밟았다가 떠났다.

당연히 바닥에 있던 발판은 모두 아래로 떨어졌다.

“!”

갑자기 갈 곳이 없어진 아기가 서둘러 방향을 바꿨지만 이미 뒤쪽도 류의건이 밟고 지나간 뒤였다.

순식간에 섬 형태가 된 칸에 갇혀버린 아기가 우왕좌왕했다.

“휴우.”

멀찍이 떨어진 칸에 도착한 류의건이 간신히 숨 돌릴 틈을 찾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승지는 속이 터졌다. 그가 소리쳤다.

“멍청아! 저대로 놔두면 네가 져!”

“예?”

“규칙 까먹었냐! 마지막 칸에 서있는 사람이 이기는 건데 이제 게임이 끝날 때까지 너만 움직일 수 있게 됐잖아!”

승지의 말에 류의건도 난감하게 고개를 들었다.

“저어, 패배해도 저희에게 오는 손해는 없으니 혹시 지는 건….”

“뭐? 미쳤냐! 일단 게임을 하면 이겨야지!! 그러려고 먼저 나섰냐!”

승부욕 근성이 가득한 승지로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대사였다.

저래서 있는 놈들은! 손해 볼 게 없다고 물러나는 게 가능한 건 너뿐이지. 우린 발을 들였으면 그 순간부터 승리해야 된단 말이다!

유월도 잔뜩 집중했는지 덩달아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가 소리쳤다.

“아직 이길 수 있습니다! 한 칸만 남겨놓고 먼저 발판을 다 떨어트린 다음 아기를 집어다 던지세요! 다시 아기를 받기 전에 의건 씨가 마지막 칸에 서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거다!”

승지가 냉큼 따라 소리쳤다. 류의건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움직이려 했다.

아기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누구 마음대로?”

크르릉.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아기의 등에서 털이 터져 나왔다. 급속한 사춘기를 겪는 게 아니라 짐승인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후하하하!”

주황색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괴물이 물개 같은 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단숨에 따라잡아 주마!”

투웅! 파열음과 함께 짐승아기가 발판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어찌나 강한 힘이었는지 발판은 아래로 떨어지는 대신 산산조각 났다.

내가 저럴 줄 알았다!

딱 봐도 꼬리가 수상했잖아! 꼬리가!

류의건의 뒤로 쿵쿵거리며 짐승아기가 뒤쫓았다. 이제 남은 발판은 십여 개도 채 되지 않았다.

승지가 양 주먹을 그러쥐었다.

“오히려 좋아! 이제 괴물이잖아! 싸울 수 있다고!”

“…안 됩니다!”

“뭐? 성좌가 저 꼴인데도 죽이지 말래?”

“아니요!”

류의건이 이를 악물었다.

“처음부터 성좌는 죽이라고 했습니다!”

콰앙!

같은 발판에 착지하려고 했던 괴물아기와 류의건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근육이 아니라 바위끼리 부딪친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처음부터 성좌가 죽이라고 했다니.

승지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아기라서 손을 못 댔던 건 순전히 본인 성격 때문이란 말이야?

생각해보면 아무리 성좌가 착하게 살라고 시켜도 집까지 내줄 필요는 없었다.

그냥 류의건이 타고난 호구였던 것이다.

승지가 뒷목을 잡았다.

“야 이! 환장하겠네!”

“또 옵니다!”

유월이 다급하게 류의건에게 경고했다. 털북숭이 삼각근을 불룩 내민 괴물이 칸에 서있는 류의건을 밀쳐내려 몸통박치기를 가했다.

“크르륵!”

류의건이 발판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이번엔 괴물을 붙잡았지만, 그래봤자 둘이 바닥을 디딘 순간 발판은 어김없이 추락했다.

이제 남은 발판은 단 세 개.

부들부들 힘을 쓰던 류의건과 괴물아기는 떨어지기 직전에 서로를 밀쳐냈다. 각각 착지한 두 사람이 딱 하나 남은 칸을 쳐다보았다.

상황을 예감한 둘이 동시에 최후의 칸을 향해 뛰어올랐다.

“!”

[빨랐다!]

[류의건이 먼저 착지할 거야!]

성좌가 말한 대로 힘껏 내민 류의건의 발이 먼저 발판을 밟을 것처럼 보였다.

“크아아!”

공중에서 괴물아기가 발악하듯 팔을 휘둘렀지만 류의건은 간단하게 막아냈다. 결국 능력 차이로 이기게 되나?

그 때 패배를 예감한 괴물아기가 돌연 모습을 바꿨다.

순식간에 아기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천진난만하게 눈망울을 글썽였다.

“죽일 거야?”

“…!”

류의건이 순간 몸을 뒤로 뺐다. 찰나였지만 승패를 가리기엔 충분한 망설임이었다.

그대로 류의건을 밀어낸 아기가 오동통한 발로 발판을 먼저 밟았다.

[ 게임~ 오버! 블랙 킹 승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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