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발화점 (1)
왜 나는 상대하는 놈들마다 덩치가 큰 건지.
구자호의 어깨 능선을 따라 범프 트럭을 갖다 박아도 될 정도였다. 참, 그건 벌써 몬스터가 했댔나.
각성자가 되고 나선 신경 안 썼는데 매번 덩치 격차 나게 싸우려니 갑자기 벌크 업이 끌렸다.
역시 기선 제압은 체격부터 먹고 들어가야….
[승지야~! 이 중요한 순간에 무슨 딴 생각이야!]
“아니, 어차피 내가 이길 거 같아서.”
승지의 말은 크진 않았지만 구자호에게 고스란히 들릴 정도였다. 그가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이상하군. 내가 그렇게 약해보이나?”
“전혀. 댁은 길 가다가 시비 걸리는 일은 없겠어.”
“그럼 왜 그렇게 자신만만하지?”
“난 반대로 일상이 시비라서.”
승지는 거추장스럽게 나풀거리는 망토를 짧게 뒤로 젖혔다.
펄럭!
투우를 하듯 빨간 망토가 눈앞에 휘날리더니 승지의 모습이 순식간에 앞에 나타났다.
“!”
구자호가 뒤늦게 손바닥을 치켜 올렸다. 곧게 뻗은 주먹은 정석적인 스트레이트였다. 쉽게 막아야 하는 공격이다.
따앙!
정확하게 꽂힌 주먹은 의외로 매서웠다. 그러나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구자호는 역시 랭커라고 해도 다 강한 건 아니라는 소문을 되새기며 잡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웬만한 랭커들도 뼈가 으스러지는 세기였다.
공격이 민첩했으니 힘이나 체력 스탯은 별 볼일 없겠지?
구자호는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가려진 빨간 헬멧 밑에선 여전히 태연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길거리 양아치도 모자라 이젠 고등학생 놈까지 시비를 걸어대니 내 인생 ㅈ나 고달프다.”
구자호가 일순 당황했다. 분명히 으득거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다니?
“확실히 힘은 인정. 더럽게 조이네.”
승지가 반대쪽 손을 흔들었다.
“근데 못 풀 정도는 아니야.”
우득. 그의 손가락이 뒤로 꺾였다.
“?!”
굵은 구자호의 손가락이 순식간에 꺾였다. 그건 단순히 힘의 문제가 아니라 저항할 틈이 없었다는 거였다.
움직임이 느리다?
인식의 저하 속에서 승지가 하는 말만큼은 또렷하게 들려왔다.
“뭐, 그래도 다행이야. 생긴 것처럼 지능 스탯은 별로 안 올렸나보지?”
간만에 프레임 컨트롤 스킬이 제대로 먹히는 상대를 만난 승지가 만족했다.
죽일 수가 없어서 좀 걱정 했는데 오히려 좋잖아?
워낙 괴물들만 만나서 싸우다가보니 프레임 컨트롤이 먹힐 만큼 인간적인 지능을 만나니 반갑기까지 하다.
승지는 히죽 웃으며 프레임을 더욱 떨어트렸다. 이젠 아예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구자호가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내가 독순술은 안 배워서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군.
주먹을 빼낸 승지는 눈앞에 손을 흔들어보였다. 구자호의 눈에 핏발이 서는 게 보일 정도였다.
효과 좋다. 꽤 오래 가겠군.
그럼 움직여볼까.
“퉤퉷.”
가볍게 손에 침을 뱉은 승지는 여전히 꼼짝도 못하고 있는 구자호를 냉장고처럼 질질 밀어 옮기기 시작했다.
“아오, 더럽게 무겁네!”
[승지가 멈춰놔서 그렇지!]
거대 흉상처럼 질질 끌려가던 구자호의 눈동자만 돌아가는 광경은 꽤나 섬뜩했다.
잘 밀려나던 구자호는 기어이 둥근 말판 테두리까지 밀려났다. 그대로 밀어 떨어트리려던 승지가 손을 뻗었을 때였다.
[스킬 지속시간 끝났어!]
콰악!
스킬에서 풀려나자마자 급하게 동아줄을 붙잡듯 구자호의 손이 승지의 팔을 움켜쥐었다.
코끼리가 지푸라기에 매달린 꼴이었지만 용케 둘 다 추락하는 건 면했다.
“벌써 풀렸네?”
“이 놈이 스킬을…!”
“쓰라고 받은 건데, 뭐.”
콱, 콱. 구자호가 급하게 승지의 팔을 움켜쥐었다. 뼈를 파고들 듯한 기세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잡은 건 썩은 동아줄이었다.
“성좌야, 떨궈라.”
[응!(*^▽^*)]
인벤토리가 열리더니 튕겨 나온 무기가 구자호의 얼굴을 때렸다.
“푸억?!”
쀼악! 하는 소리가 앙증맞게 울려 퍼졌다.
“뿅망치 소리도 간만에 들으니 정겹네.”
[헤헷! 그럼! 금방 정든다니까!]
“이 놈…!”
얼굴을 때리고 떨어져나간 뿅망치를 본 구자호의 표정이 해괴해졌다.
뿅망치가 아프지는 않지만 굴욕감을 선사하기엔 최고의 무기였다.
사용할 때도 굴욕감이 들어서 문제지만.
승지는 여전히 한 손으로 구자호를 매단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메라 많고, 범윤오 자식도 이쪽 보고 있군. 좋아.
자신도 똑같이 얼굴이 가려지니 수치심을 덜 느끼는 걸 자각못한 승지의 망토가 펄럭였다.
“지금 장난치는 거냐!”
“응, 장난이야.”
시비가 걸릴 땐 허세 좀 부려주는 게 진리라서. 미안하지만 퍼포먼스는 좀 맞춰줘야겠다.
승지가 스킬을 시전 하는 것과 동시에 구자호도 인벤토리를 열었다.
“소환!”
“대지 분쇄!”
번쩍! 공중에서 쏟아지는 뿅망치와 반대로 쿵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팔을 잡은 힘이 사라진 걸 깨달은 승지는 바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번쩍번쩍한 쇠망치를 치켜든 구자호가 다시 말판위로 올라온 게 보였다.
[오옷! 스키 타는 것처럼 큰 망치 두 개로 옆면을 찍고 올라왔어!]
너 언제 스키 타는 것도 봤냐?
성좌의 혼용된 지식은 언제 들어도 감탄스럽다.
박살난 옆면에서 떨어진 돌가루가 바람을 타고 상승하는데도 매끄러운 쇠망치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단단히 열 받은 구자호가 사람 두개골 정도는 손쉽게 으깨버릴 듯한 망치를 불끈 솟은 근육으로 들어올렸다.
“지금까진 장난이었다만 이렇게 나온다면 하는 수 없지. 정말로 박살내주마!”
[오오! 저쪽은 진짜 망치잖아!]
구자호의 무기는 고기 다지는 망치처럼 한쪽이 우둘두툴한 금속이었다. 손잡이까지 쇠로 되어 있어 평범한 사람은 제대로 들지도 못할 것이다.
무시무시한 흉기에도 성좌는 오히려 신나서 대화창을 내뿜었다.
[아자! 승지야 우리 내기할래? 진짜 망치랑 뿅망치랑 붙으면 누가 이길지 말이야! 난 당연히 뿅망치에 걸 거야!]
“바보야 나도 너랑 같지.”
[꺅! 고백이야, 지금? 나두 사랑해!]
“그게 아니고 인마, 내가 지는 쪽에 걸겠냐?”
승지가 소환된 뿅망치를 양 손에 쥐었다. 어디선가 푸하학 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아마 관객들까지 서라운드로 웃어젖힐 테니까.
그야 당연히 저 사람 잡을 망치 앞에서 앙증맞은 뿅망치를 들고 있으니 비웃음이 터져 나올 만도 했다.
그것도 하필 쫄쫄이 복장과 똑같은 빨간색이라니. 헬멧과 망토까지 쓴 녀석이 쌍뿅망치를 들고 있으니 완전히 코미디가 따로 없다.
승지도 얼굴을 드러낸 상태였다면 곧 죽어도 이딴 무기는 다시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뿅망치를 든 이유가 있었다.
이걸로 당하면 두 배로 쪽팔리거든?
뿅망치로 싸운 놈보다 뿅망치에 진 놈이 세상 평판은 더 망가지는 법이다.
최종 목표는 범윤오가 그런 허접한 놈이라는 인상을 팍팍 심어주는 거다.
저 덩치 큰 자식에게도 같은 교훈을 남겨주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 너부터 연습 삼아서 조져주마!”
승지가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구자호가 있던 자리에는 은빛 잔상이 남았다.
[승지야 멈춰!]
끼긱, 승지가 발을 틀어 멈춘 바로 그 자리에 망치가 휘둘러졌다.
꽈앙!
망치에 맞은 돌바닥이 호두처럼 으깨졌다.
“접근하게 둘 줄 아느냐!”
구자호가 바람처럼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마구잡이로 망치를 휘둘러댔다. 들어간 순간 뼈 하나는 작살날 각오를 해야 할 만큼 험악했다.
“네놈, 알았다! 접근하면 마비 스킬을 쓸 수 있는 모양이지! 힘은 제법 있다만 두 번은 안 통할 거다!”
접근해야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비 스킬도 아닌데.
혹시나 싶어 진짜 마비 스킬인 무대 매너도 걸어보았지만 한 번 프레임 컨트롤에서 풀려난 상대라 먹히지 않았다.
지능 스탯에 관련된 스킬은 한 번 상대가 인지하고 나면 다시 걸 수는 없는 건가?
상대가 견디고 나면 일종의 내성이 생기는 듯 했다. 매혹에 한 번 걸렸다 풀려난 상대는 쉽게 다시 매혹에 빠지지 않는 것처럼.
스킬엔 표시되지 않는 한계와 쿨타임이 명백히 존재하는 듯 했다.
하긴 내 프레임이 높다고 상대방 똥컴 프레임까지 좋아지진 않으니까.
다 이긴 게임을 랜선 연결 오류로 끊긴 적이 한 두 번이었어야지.
스킬로 상대방의 지능을 통제하다가 과부하가 걸려 툭 끊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쉬웠다.
“그럼 번태 길드장이 틀렸네.”
[응?]
“내 힘은 시간도 뭣도 아니라고.”
승지가 뿅망치를 톡 떨어트렸다.
“그냥 게임이지.”
그가 맨 손을 드러냈다.
자, 상대방이 무적기를 쓸 땐 나도 가불기를 써야겠지.
구자호가 미친 듯이 망치를 휘두르고는 있지만 부피가 큰 무기인 만큼 빈틈이 많이 보였다.
문제는 승지가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느냐였다. 승지의 민첩은 현재 60으로 중상위권 수준이다.
하지만 승지는 그건 걱정하지 않았다.
프레임 컨트롤은 나한테도 걸 수 있거든?
후욱, 순식간에 세상이 느려졌다. 프레임컨트롤은 사실 양날의 검처럼 장단점이 있었다.
공격이 빠른 대신 상대방의 공격을 전부 파악하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꼼짝없이 얻어맞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멍청이처럼 제자리에 선 채 망치만 휘둘러대는 단순한 녀석은 오히려 마음 놓고 쓸 수 있지!
한 번 프레임 컨트롤에 걸린 다음이라 승지에게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점도 이득이었다.
필살기가 아니어도 프레임을 자신 쪽으로 가져온 승지는 여유롭게 망치가 움직이는 방향과 궤도를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드러나는 빈틈!
[약점은?!]
“중단이다!”
승지의 시점이 아니라 바깥에서 촬영 중이었던 카메라에는 승지의 몸이 쏜살같이 뛰쳐나간 것처럼 보였다.
붉은 궤적이 옆으로 크게 휘두르는 망치의 관성과 뒤늦게 들어 올리는 반대쪽 망치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하단은 그 무거운 망치를 지탱하느라 무겁게 힘이 들어가 있었으니 공격 몇 번에 쓰러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상단도 망치를 휘두르느라 자칫 쉽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휘둘러진 망치의 무게까지 더해져 흔들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니 중심을 망가트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중단을 깨부수는 거였다.
“으랏차!”
승지의 발차기가 명치를 찍었다.
“웁…!”
숨을 훅 토해낸 구자호의 허리가 크게 뒤로 밀렸다. 그러나 그도 각성자였다. 크게 굽은 허리에 놀랄 틈도 없이 바로 판단을 바꿔 종을 치듯 망치 두 개의 끝을 꺾은 것이다.
꽝 소리가 나며 승지를 노린 망치가 맞부딪쳤다.
[꺄아아악! 승지야!]
역시 공격 한 번으론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지.
간발의 차로 망치를 피했지만 구자호의 반응도 빨랐다.
“어리석은 놈! 내가 망치가 없어도 잡힌 순간 너도 끝이야!”
순식간에 망치를 놓은 구자호가 처음 승지를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확 팔로 그를 끌어안았다.
망치를 피하느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던 승지의 몸이 고스란히 붙잡혔다.
“이제 넌 독안의 든 쥐다!”
“아니, 난 네가 망치만 놓으면 돼서.”
승지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그의 무릎을 걷어찼다.
“메모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