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더 플래닛 오브 더 데드 (3)
[뾰로롱! 다시 부활!]
“부활이라니, 나 아직 안 죽었다.”
[히잉! 난 승지가 다친 것만 보면 꼭 죽을 것처럼 무섭단 말이야!]
승지가 가볍게 훌쩍 일어났다. 어깨가 꺾인 체자라는 완전히 무력화 되었다.
“이건 압수.”
승지는 주먹을 툭툭 건드려 검을 빼냈다. 물론 입수한 무기는 바로 인벤토리 행이다.
제법 두둑하게 찬 인벤토리 안으로 검이 덜커덩 떨어졌다.
결국 도끼 하나는 완전히 작살났군.
이번에도 새 무기 하나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무기를 아무리 얻어도 금방 망가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내가 딱히 이상하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니까.
승지가 물었다.
“시체가 괜히 살아서 돌아다닐 리는 없고 여기 어디 시체들을 조종하는 인간은 있겠지?”
[하지만 이미 황폐화 된 별에서 시체를 지배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이야?]
“추락한 비행선에서 살던 노인네도 네크로맨서였잖아.”
[으음, 그러네. 하지만 그 사람은 지킬 게 있었으니까 따로 시체를 부린 거였잖아! 제국에 들키지 않으려고 말이야.]
“그럼 반대로 여기도 뭔가 숨겨져 있다는 거 아니겠냐?”
승지가 합리적 의심을 발휘했다.
물론 앞에 보이는 성은 아주 제대로 의심해 달라는 듯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매력을 물씬 풍겼다.
클랩의 마왕 성이 정석적인 마왕성이었다면 이곳은 폐가를 연상시켰다.
승지가 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체자라의 시체가 어정어정 따라왔다.
“어이, 꺼져.”
“…….”
시체는 말이 없었다.
“에휴, 내가 뭐하는 짓이냐. 맘대로 해라.”
승지는 성문을 지나 안으로 계속 들어갔다. 찢어진 깃발이나 부서진 탁자가 사람이 살던 흔적이 바람을 따라 괴괴하게 흔들렸다.
성좌는 계속 기억을 더듬어가며 얘기했다.
[앗, 저기도 부서졌네. 저기도! 아무튼 다나우는 마녀에게서 직접 마왕의 힘을 뽑아내려고 했었어. 제국에서 마검사 교육을 받았거든!]
“그래놓고 어쩌다가 결론이 마왕이 된 거냐?”
[고향에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하자 다나우는 다른 곳을 도우러 가기로 했어. 이제 마왕의 힘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나도 따라갔고!]
기억 속에선 둘이 그렇게 싸우더니 결국 사이가 좋아졌나. 같이 다니네.
“그래서? 여기서라면 나머지 얘기도 불기로 했잖아.”
[우린 별 하나를 만났지. 우린 그 때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마왕이었는걸.]
속아서 마왕을 만드려고 했다는 건가.
쿠웅!
그 때 어디선가 바위가 떨어지듯 육중한 소리가 들렸다.
“뭔가 온다.”
[어느 쪽인지 바로 확인할게!]
승지는 콜로세움처럼 자신을 둘러싼 성벽을 빠르게 훑었다. 그는 전술이나 전쟁에 대해선 잘 몰랐다. 그래도 성벽에 튀어나온 저게 대포라는 건 알았다.
왜 바깥쪽이 아니라 안 쪽으로 향해있지?
마치 뭔가를 몰아넣고 한꺼번에 공격하려던 것처럼.
“!”
승지는 또 다시 쿠웅 소리를 듣고는 표정을 굳혔다.
“성좌야.”
[응?]
“원래 네가 살든 어쨌든 여긴 던전이잖아?”
[응! 보스만 잡으면 클리어야!]
“근데 그 보스가 마왕이면 보스 전까지 잡몹들이 많이 나오겠지?”
[으응? 그렇겠지…?]
“근데 이 근방에서 어디서 제일 사람이 많이 죽었을 거 같냐.”
[!]
쿵!
또 다시 육중하게 들리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제법 지척이었다.
방향을 찾는 승지보다 성좌가 먼저 적을 발견하고는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저게 뭐야!]
“와… 씹.”
승지가 턱을 벌렸다.
갑옷만 남겨놓고 그 많던 시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저기 다 있다. 하나로 뭉쳐서.
거대한 시체의 산이 둥글게 뭉쳐서 성벽을 삐져나오고 있었다.
[우웨엑! 우웨에엑!!]
성좌가 정신적인 토악질을 해댔다. 승지가 봐도 눈이 이상해질 만큼 괴상한 광경이었다.
상체와 하체가 제멋대로 엉겨 붙었는데 삐죽 튀어나온 팔 다리가 없었다. 저것이 구르듯이 다니느라 뭉개진 것이다.
쿠웅! 쿠웅!
크기가 얼마나 큰지 지금도 성벽 외곽과 성 사이에 끼어서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들썩이며 부딪칠 때마다 쿵 소리가 나던 거였다.
안 쪽까지 굴러갔다가 지금 날 찾으러 다시 굴러온 거냐. 생각만으로도 뇌가 썩는 기분이다.
“진짜 생긴 거 봐라.”
승지가 낮게 욕설을 뇌까리며 인벤토리를 열었다.
둥근 게 크기만 좀 작았으면 발로 까고 싶게 생겼지만 구성품이 시체다 보니 맨 손으로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
그 때 승지를 따라온 체자라가 시체의 공을 향해 절뚝거리며 걸어갔다.
시체공이 굴러오기 전에 먼저 공격하려던 승지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저건 왜 합체를 안 했지?
승지는 잠깐 행동을 보류했다.
지금도 시체 공은 당장이라도 틈을 빠져나와 굴러올 것처럼 성벽을 부서트리고 있었다.
체자라는 빠직빠직 떨어지는 돌가루를 맞으며 무언가 흔드는 동작을 했다. 어깨가 나가서 매우 볼썽사나운 동작이긴 했지만.
그들의 돌진을 막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 저 병사들도 원래는 체자라와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야!]
성좌가 뒤늦게 소리쳤다.
[체자라는 마녀와 대등하게 싸울 만큼 강했으니까 죽은 뒤에도 따로 움직일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승지를 공격했던 것도 그렇잖아!]
“하지만 저것들 다 조종당하는 중이잖아?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냐?”
[…조종이 아닐 지도 몰라!]
성좌가 정신없이 대화창을 띄웠다.
[웃음의 마왕은 숙주와 감염의 관계잖아. 어쩌면 그들이 갖고 있던 마왕이 힘이 죽어서까지 발휘된 것일지도 몰라.]
“네크로멘서의 조종이 아니라 진짜… 그냥 순수한 좀비가 됐다고?”
[애초에 시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부터 무언가 다른 힘이 끼어든 건 분명한 걸! 마녀를 찾아야 해!]
[마녀라면 분명히 뭔갈 알고 있을 거야!]
“마녀도 이쯤이면 죽은 인간이잖냐. 죽은 인간한테 물어본다고?”
[……일단 시체라도 찾아보자! 바깥쪽은 맡기고!]
체자라의 저지는 전혀 통하는 것 같진 않지만. 굳이 공격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승지는 일단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성 안도 사람이 없고 적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끔 바깥에서 시체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멀리서 쿵쿵거리는 메아리만 들려왔다.
“마지막으로 여기 왔을 때 마녀가 어디로 튀었다고 했는데?”
[성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여기가 마음에 걸려! 확인해보고 떠나자!]
“그래 좋아. 마침 나도 찝찝한 곳이 하나 있었거든.”
역류 스킬로 성좌의 기억을 엿봤을 때 유일하게 들어갈 수 없던 공간이 있었다.
승지는 직감을 발휘해가며 달렸다. 성 내부는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어서 기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좌가 다나우 공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공간을 지나자 순식간에 공주의 방이 드러났던 것이다.
[……우와.]
갑자기 추억에 압도되는지 성좌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러나 승지는 아래쪽으로 가는 길을 찾느라 신경 쓰지 않았다.
“성좌야, 여기 비밀 통로 없냐?”
[으응? 비밀 통로?]
“아래쪽에도 방이 하나 있었어. 몰라?”
[글쎄… 다나우한테 못 들었는걸. 잠깐만!]
성좌는 재빠르게 주변을 훑는지 잠깐 사라졌다. 그동안 바깥에 있던 시체공이 기어이 벽을 뚫었는지 쿵, 대신에 우르르 하고 돌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와, 굴러오는 시체라니. 차라리 거대한 철구로 해주지 그랬냐. 미친 마왕아.
[찾았어! 침대 밑이야!]
승지가 바로 침대를 휙 집어 던졌다. 방을 차지하고 있던 육중한 나무틀이 박살나며 흩어졌다.
이 정도는 껌이지.
승지는 열쇠를 찾는 귀찮은 수고도 버리고 바로 문을 박살냈다.
그런데 쉽게 부순 나무문과 달리 보이는 계단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투명한 막에 가로막힌 듯 발이 걸렸던 것이다.
“뭐야 이건?”
[허억… 마법이다!]
성좌가 덜컥 대화창을 내렸다.
[어쩌지!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잖아!]
“나도 그러긴 싫다.”
[하지만 마법을 푸는 법은 모르는 걸! (´;Д;`)]
“힘으로 안 돼?”
승지는 주먹을 쥐고 땅땅 마법을 내려쳐보았다. 거울에 부딪치듯 깡! 하는 소리만 크게 났을 뿐 소용없었다.
“아냐. 완벽한 콤보라면 되겠는데?”
승지가 99콤보를 채우려고 손을 치켜 올렸다.
[히익! 승지야 그럴 시간은 안 될 거 같아!]
성좌가 급하게 띠링 거렸다. 승지가 쿠르르릉 굴러오는 거대한 소리를 급히 피했다.
기어이 벽을 뚫은 시체공이 우득거리며 굴러왔던 것이다.
쿠르르르, 콰앙!
벽과 문틀을 부수며 굴러온 시체 공이 엄청난 기세로 벽에 부딪쳤다.
가뜩이나 엉망이 되었던 다나우의 방이 완전히 가루가 되었다.
저거 단순히 살덩이의 집합체가 아니잖아! 끼이면 완전히 뼈도 못 추리겠다.
“이게 진짜 저승길 두 번 가고 싶나!”
승지가 버럭 소리쳤다. 그가 손을 내리자 성좌가 재빨리 인벤토리를 열어 승지가 아무 무기나 잡도록 해주었다.
그런데 승지가 무기를 꺼내기 직전에, 시체공 뒤를 느리게 따라온 체자라를 발견하고 말았다.
마치 승지가 시체공을 제거하길 원하지 않는 듯 최선을 다해 달려온 그의 팔이 사방으로 마구 흔들렸다.
뭐, 어떡하라고! 내가 죽기 전에는 말해야 할 거 아니냐!
눈살을 찌푸린 승지가 맨주먹을 쥐고는 시체공을 후려쳤다.
퍽!
굴러다니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시체공이 낮게 부웅 떴다.
[히익! 승지 열 배는 넘는 크기를!]
“으, 젠장. 여기 다 부서지겠네!”
공간이 협소해 시체공은 멀리 날아가지 못했다. 그게 벽에 부딪쳤다가 바닥으로 다시 떨어졌다.
쿠어엉! 우득!
시체공이 거세게 내려앉자 충격을 이기지 못한 바닥이 무너졌다.
빠직, 부서지는 나무 바닥을 피해 움직이던 승지가 순간 미끄러운 걸 밟고는 살짝 비틀거렸다.
뭐야, 이건 또?
“!”
승지는 자신이 밟은 투명한 부분을 내려다보고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침대가 있던 자리를 꼭대기 삼아 투명한 막으로 가로막혀 있던 부분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아래쪽까지 이어져있었다.
아랫부분은 땅에 파묻혀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위로 드러난 완만한 곡선만 봐도 뭔지 짐작이 갔다.
길쭉하고 둥근 타원.
“…ㅆ발, 이거 알이잖아.”
[허억……!]
승지와 성좌가 동시에 신음을 흘렸다.
이미 그들은 알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던전에서 본 알은 대부분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마왕과 얽혀있었다.
“…이 아래에 웃음의 마왕이 있을 확률은?”
[제… 제로.]
“아오, 왜 0 퍼센튼데!”
[웃음의 마왕은 본체가 없잖아! 진짜진짜 이상하긴 한데 저게 마왕의 알이라면 다른 마왕이야!]
“하나 잡으니까 둘이 오냐?”
승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흔들거리며 부서진 바닥에서 끝부분을 빼낸 시체공이 다시 승지를 향해 굴러왔다.
[으앙!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소식은 우리 예측이 맞았다는 거야! 이 별은 두 명의 마왕이 있어!]
“하나도 안 기쁘거든.”
승지는 굴러오는 시체공을 노려보며 팔을 벌렸다.
어쨌든 대충 목적지는 찾았으니 이제 문제는 들어갈 방법이다.
물론 승지는 단순한 방법을 택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해볼래?”
힘이 불끈 들어간 팔이 시체공을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