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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마왕은 해로워

다행히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갈 때까지 승지에게 일부러 접근하는 각성자는 없었다.

어제 길드장들처럼 빠르게 죽이려고 드는 사람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만 않았을 뿐 분위기는 몹시 적대적이었다.

“그러게 처음부터 이런 길드에 던전 열쇠를 맡기는 게 아니었다니까.”

“생각 없이 굴다가 이게 뭐야? 미션 안정화 된지 얼마나 됐다고 마왕이라니.”

“저 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마왕까지 불러온 거야?”

미스핏 길드랑 쌍으로 엮여서 욕먹고 있군. 흠, 욕도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먹으니까 좀 나은걸.

오히려 승지보다 미스핏 길드원이 안절부절 못했다.

“죄송해요, 저런 말 듣기 싫으시죠.”

“그건 상관없는데 너넨 화 안 나냐.”

“저희 잘못이긴 하니까요….”

이때까지만 해도 미스핏은 본인 잘못을 잘 수용할 줄 아는 길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원래 글라세로의 저주가 무엇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그 평가가 뒤집혔다.

“이런 미친.”

환자들이 누워있는 침대를 본 승지의 입에서 저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건 사람의 형체가 아니었다. 누군가 진흙 한 덩이를 뭉쳐서 던져놨다면 차라리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건 온몸에서 진물을 흘리는 사람이었다.

“윽…!”

구역질이 치민 승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에 묻혀 그의 헛구역질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길드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승지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정신 나간 놈들. 너넨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드는 저주를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던전에 들여보낸 거냐?!”

“안전 수칙을 지키기만 하면 괜….”

“수칙만 믿고 이딴 현장에 들여보내는 얼간이가 어디 있어!”

결국 승지가 화를 냈다. 이러니 길드에 온 각성자들이 죄다 욕을 하지. 이런 일에 아무것도 모르고 막 각성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다니.

게다가 결국 그 수칙이란 게 완벽하게 지켜지지도 못했다.

쩔쩔매던 길드원이 변명했다.

“저희로서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웃기지 마!”

“정말, 믿어주세요!”

길드원이 급하게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에게도 선명한 글라세로의 문양이 찍혀있었다.

“저희 길드는 모두 이 문장이 찍혀있어요! 저마다 진행 속도가 다르긴 하지만… 알을 처리하기 위해서 글라세로의 던전에 들어가기엔 다들 너무 위험한 상태였어요.”

길드원이 강하게 호소했다.

“여기 누워계신 분들은 다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던전을 탐색하기 위해 자원하신 분들이에요. 그래서 상태가 더욱 심하신 거구요.”

승지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환자들을 노려보았다. 부풀어 오른 살갗이 글라세로의 던전 입구와 똑같이 생겼다.

“그건 변명이 안 돼.”

“맞아요,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인 건 잘못이에요. 하지만 저희가 전부 쓰러지면 더는 글라세로의 저주를 연구할 사람이 없어요.”

길드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5년. 각성자가 나타난 뒤로 5년 동안 이세계 연구만 한 길드는 저희뿐이에요. 던전 고어를 해독한 것도 저희뿐이고요. 만약 저희 길드가 이렇게 사라지면 다음에 또 글라세로의 저주가 나타났을 때 누가 대처하죠?”

“…….”

이미 다른 각성자들의 태도만 봐도 연구에는 관심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자신 같아도 따분하게 해석이나 하고 있느니 미션이나 더 해서 강해지는 걸 택할 테니까.

글라세로의 저주를 알리고 던전을 막아봤자 열쇠는 미션에서 저절로 나타나기 때문에 완전히 출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무분별하게 들어가다가 다 저주 걸려서 저렇게 드러눕고 뒈지면?

존나게 배드 엔딩이다.

승지의 표정이 떫어졌다.

“날 굳이 여기 데려오려던 이유가 뭐야. 이딴 걸 보여주고 설득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감히 없었다고는 말 못 하지만, 저희에게 그만큼 승지 씨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주시길 바랐어요.”

길드원의 어깨가 잔뜩 위축되었다.

…젠장할. 승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

“그래서 결국 나한테 뭐 시키려던 건데?”

길드원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해, 해주시게요?”

“그러려고 데려왔다며.”

승지가 짜증을 냈다. 깜짝 놀란 길드원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아, 그, 그렇죠! 승지 씨의 저주는 저희 것보다 훨씬 더 강하니까 오히려 약한 저주를 누를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럼 승지 씨를 통해서 백신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러니까 내 몸에 저 지저분한 걸 집어넣겠다고?”

“네에….”

길드원이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대담한 사람이라도 글라세로의 저주를 직접 보면 경악하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말이 병이지 살아있는 괴물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러나 승지는 오만상을 쓰긴 했지만, 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선뜻 팔뚝을 내밀었다.

“빨리 해.”

“헉…! 감, 감사합니다!”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숨을 들이켠 길드원이 서둘러 인벤토리를 열었다. 이미 많이 실험해보았는지 주입 키트가 벌써 준비되어있었다.

승지는 찌푸린 얼굴로 팔뚝에 주사를 꽂아 넣는 걸 지켜보았다.

미스핏 길드원은 숨까지 참아가며 몇 분간 결과를 기다리더니 곧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됐다!! 발진이 안 올라와요! 저주에 걸렸던 다른 사람은 바로 수포가 올라왔었는데!!”

감격한 길드원이 소리를 지르다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환자들이 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거의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길드원이 승지를 끌어안았다.

“감사합니다!”

“우왓, 야!”

“승지 씨!! 정말 감사드려요! 승지 씨가 아니었다면 정말 좌절만 하다 끝나버렸을 거예요! 던전이 사라져도 저주가 안 풀려서 저희 다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알았으니까 놓고 말해.”

승지가 과하게 애정을 표현하는 길드원의 이마를 밀어냈다.

“딱히 너희들이 좋아서 한 건 아니니까 찾았으면 똑바로 쓰기나 하시지.”

“저희의 평생 은인이십니다! 이제 피만 좀 뽑아서 주시면 다 끝나요!”

길드원의 울 것 같던 얼굴이 금세 희번덕거렸다. 언제 꺼냈는지 새 주사기를 꺼내든 걸 본 승지가 헛웃음을 지었다.

승지는 체념하고 순순히 피를 뽑혀주었다. 그러면서 길드원이 얼마나 계속 고맙다고 하는지 고막이 아플 지경이다.

“이번 일이 잘되면 길드 안에 승지 씨 동상을 만들고! 기념비도 세우고! 매년 이 날을 기념하겠….”

“알았으니까 적당히 해!”

승지의 성질에도 불구하고 길드원은 천국에서 방금 환승한 사람처럼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백신을 만드는 대로 승지 씨한테도 연락드릴게요. 모두들 감사할 거예요!”

“됐고, 다시는 나한테 연락 안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승지가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그동안 이상하게 조용하던 성좌가 웬일로 얌전하게 상태창을 띄웠다.

[⸝⸝ʚ̴̶̷̆ ̯ʚ̴̶̷̆⸝⸝]

“왜 또.”

[승지 너무 멋있어…♥]

오소소. 팔에 소름이 돋아났다.

“미친… 제발 징그러운 소리 좀 하지 마.”

[쑥스러워서 그래? 방금 얼마나 훌륭한 일이었는지 나 감동받고 말았어.]

“미친놈.”

승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작 주사 두 방 맞았다고 감동이고 자시고 할 게 있냐.

물론 승지는 자신에게 항체가 없었을 경우 그대로 괴물 같은 피부병에 걸릴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래서 주저했을 테지만.

길드원의 설명을 들었음에도 자신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냥 한 거다.

[승지는 진짜 멋있다니까♥]

…그냥 성좌는 무시하자.

바깥으로 나온 승지는 우연찮게도 최자림과 서명구와 딱 마주쳤다.

숙취로 다 죽어가던 최자림은 승지가 나온 장소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는지 표정이 확 달라졌다.

“다 들으셨나요?”

“그래, 빌어먹을.”

승지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최자림이 드물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승지의 태도를 보고는 협조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금세 장난을 쳤다.

“혹시 궁금할까봐 알려드리는데 제 저주는 어깨에 있답니다!”

“아니, 그걸 또 왜 굳이 보여주려고 하세요!”

굳이 상의를 끌어 내려서 보여주려는 최자림을 명구가 뜯어말렸다.

이젠 아예 일상이 된 저 둘의 대화에 승지도 적응해버리고 말았다.

“비위도 좋긴. 이런 저주에 걸린 걸 알면서도 싸돌아다녔냐.”

“전 유일한 전투 계열 각성자라 다른 사람들보단 던전에 오래 있었거든요. 그래서 저주 진행도도 제일 낮아요.”

“잘됐네.”

승지는 그저 국밥이나 한 그릇 말아먹고 싶었다. 피 뽑았더니 선지가 땡겼던 것이다.

최자림이 싱긋 웃었다.

“사실 전 승지 씨가 마왕을 소환하는 저주에 걸린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글라세로를 완전히 없애버려야만 다시는 이 저주에 걸리는 사람이 없어지지 않겠어요?”

“내가 저주에 걸린 게 다행이라고?”

“저주에 걸린 사람이 승지 씨라 다행인거죠.”

최자림이 환하게 웃었다.

“승지 씨가 아니었다면 우린 모두 더 힘들어졌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밥이나 한 번 사라고 하려다, 승지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누군가에게 감사를 받는 일이 제법 어색하고… 나쁘지 않았다.

* * *

어쨌든 승지도 마왕 글라세로를 잡는 일이 조금은 진지하게 느껴졌다.

“대책 전략팀은 이쪽으로!”

여운남 길드장이 소리를 질렀다. 미스핏 길드에 모인 각성자들은 저마다 살벌한 무기를 하나씩 꺼내 들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분위기에 긴장감이 흘렀다.

어제 보았던 길드장들끼리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보였고, 가볍게 몸을 푸는 각성자들도 있었다.

“짠! 여기 승지 씨 무기요.”

최자림이 불쑥 나타나 칼을 내밀었다.

“유청 씨 길드에서 젤 좋은 걸로 훔쳐온 거예요.”

“그 녀석도 오냐?”

“그럼요~. 게다가 듣고 놀라지 마세요. 무려 승지 씨 호위팀으로 배정되었다니까요!”

뭐라. 그건 별론데.

떨떠름하게 승지가 무기부터 확인했다.

[ 여명의 드래곤 소드 : 알에서 막 깨어난 어린 용의 정수가 담겨있다. 오래 쓸수록 날이 예리해진다.

착용 시 추가 데미지 132 상승. 힘 20 상승. 비행 종족을 상대할 때 추가 데미지 30. 용족을 상대할 때 간헐적으로 비명을 지른다. ]

와 씨, 무기 개 좋잖아!

무기를 본 승지의 눈이 번쩍거렸다.

[승지야! 그렇게 강한 무기는 실전에서 안 돼…!]

응 그래, 그래.

성좌의 상태창을 휘휘 저으며 승지가 냉큼 무기부터 인벤토리에 받아 챙겼다.

“이것도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거냐?”

“살아남으면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최자림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기왕 우리가 최초로 마왕을 불러내는 거 잡아버리기 까지 해야 멋있지 않겠어요?”

“동의한다.”

한참 앞에서 소리치던 이화예 길드장이 두리번거렸다.

“승지 씨! 어디 계시죠? 바로 호위팀 소개하고 던전 진입하겠습니다.”

“아! 마침 갈 때가 되셨네요. 저희가 글라세로 약점을 다 공략할 작전을 짤 때까지 부디 몸 조심히 버텨주세요.”

“응? 넌 안 가냐?”

“전 남은 길드원들 데리고 다른 던전 뺑이를 돌아야 해서요. 저주 때문에. 아시죠?”

“…고생해라.”

저 망둥이 같은 최자림도 나름대로 길드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좀 다르게 보였다.

철이 들어 보인달까.

[자 그럼 우리도 출발하자! (งᐖ)ว세계를 위하여!!!(งᐖ)ว]

…내 성좌는 철드는 날이 오기나 할까.

승지는 또 다른 망둥이인 성좌를 데리고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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