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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넌 사형이야 (1)

카가강!

세 개의 검이 동시에 부딪쳤다.

류의건이 김정진과 이연주의 검을 한 번에 막아내고는 박편호의 뭔지 모를 스킬까지 무력화시킨 것이다.

…하얀 길드장은 언제 공격한 거야? 얌전히 있는 줄 알았더니.

비수처럼 짧고 흰 단검을 꾹 누르고 있던 이연주가 검 너머로 승지를 넘겨다보았다.

마치 왜 안 죽었냐는 눈빛 같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격분한 류의건이 소리쳤다.

“다짜고짜 무방비한 사람을 공격하다니!”

아니, 무방비하지 않은데.

공격 대상이 된 건 좀 놀랐지만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달려든 터라 여차하면 프레임 컨트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승지가 제자리에 있었던 건 류의건이 자기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몸 빵만 할 줄 알았는데 설마 다 막을 줄이야.

캬. 확실히 랭킹 2위답다. 세긴 세네.

바르르 검을 누르고 있던 김정진이 소리쳤다.

“비키시게! 자네는 지금 뭘 지키고 있는 지도 모르는 게야!”

“무고한 사람을 공격하게 둘 수는 없습니다!”

“다들 진정하세요! 여기서 싸우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호우, 개판이다.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유청만 뭔 생각인지 가만히 앉아있었다. 덩달아 차분해진 승지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저기 나도 발언권 있습니까?”

팽팽하게 맞서던 길드장과 류의건이 동시에 쳐다보았다.

“죽기 전에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나 좀 들읍시다.”

“허…!”

“말 잘했네! 자네가 마왕을 소환하게 된다는 걸 감추면 아무도 모를 줄 알았나?”

“예?”

“마왕?”

승지의 눈썹이 일자로 모아졌다.

“그래, 당신들이 왜 이렇게 난리치나 했더니 역시 그걸 눈치 채서 이러신다?”

“뻔뻔하긴!”

“당신 때문에 마왕이 소환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칠 줄 알고나 있는 건가!”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졌지만 승지는 냉담했다.

어떻게 글라세로의 저주에 대해서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최대한 저주를 늦추는 방법이나 마왕을 물리칠 방법을 고민하는 대신에 바로 자신을 죽여 버리겠다는 선택을 내렸다는 게 정말로 한심했다.

아무것도 없는 나도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데 있는 놈들이 그냥 날 죽이고 끝내겠다고?

“근성 없는 자식들.”

“채승지 씨!”

순식간에 치닫는 대화에 급하게 이화예가 탁자를 내리쳤다.

“다들 그만하세요! 이딴 식으로 굴라고 데려온 줄 아세요? 당장 무기 집어넣으세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에 다른 길드장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에 류의건의 위협까지 더해지자 하는 수 없이 그들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한숨을 내쉰 이화예가 탁자를 짚었다.

“앉으세요, 승지 씨. 지금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사과는 됐으니까 앞뒤 설명 자르지 말고 다 토해내시죠.”

“…알겠습니다.”

평생 누구한테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어째 각성자가 되고 나서는 여기저기서 참 잘도 준다.

승지가 먼저 의자에 털썩 앉자 류의건도 바로 옆에 앉아버렸다.

또 공격했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라 별 수 없이 다른 길드장들도 탁자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정의감 넘치는 놈이 도움 될 때도 다 있네.

약자로 보인 덕분에 류의건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니 기분이 묘했다.

팔짱을 낀 승지가 물었다.

“일단 어떻게 날 찾아 왔는 지부터가 궁금한데.”

“그건 우리 길드의 서명구 각성자님의 스킬 덕분입니다. 이름과 얼굴을 아는 각성자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지요.”

“위치 추적?”

감시 받고 있었단 소리 아냐, 이거.

어쩐지 감시가 느슨하더라니 믿는 구석이 있던 거였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기분이 더러워진 승지가 명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명구 너 이 새끼! 스토커 새끼!”

“저… 저는 그저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어디 숨었는지 명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넌 다음에 죽었다.

승지가 속으로 이를 가는 사이 최자림이 대신 끼어들었다.

“미안해요, 승지 씨! 명구한테 시킨 건 저니까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놈의 사과.

“왜 날 길드에 가입시키는 척 끌어들이려고 한 겁니까? 처음부터 저주에 대해 알았어요?”

“아뇨! 몰랐어요.”

“그럼 진짜로 날 길드에 가입시키고 싶었던 겁니까?”

“아니요.”

그때 뜬금없이 유청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당신을 알러트의 일원으로 의심했습니다.”

“알… 뭐요?”

갑자기 영어 쓰고 난리야.

게임에서 안 나오는 영어 단어만 들으면 알러지가 올라오는 승지가 꺼림칙하게 노려보았다.

“알러트는 요새 2차 각성자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져나가는 집단이에요!”

“범죄 집단이지.”

최자림이 친절하게 설명했지만, 유청이 바로 차갑게 정정했다.

“그들은 경계 스킬을 받지 않음으로써 각성자들의 눈을 피해 밀수, 인신매매 등을 일삼는 집단입니다. 이세계가 나타난 뒤로 원래부터 현실에 판치던 쓰레기들에게도 기회가 되고 말았죠.”

“물론 각국의 각성자들이 열심히 그들을 때려잡고 성좌신도 발견하는 대로 페널티를 내리곤 있어요! 하지만 경계 스킬이 없으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내기가 힘들거든요.”

“못 찾는다고요? 신이?”

“네! 신이 준 힘이지만 워낙 각성자가 많은 덕분에 일일이 개인을 구분하긴 어려운가 봐요.”

“각성자에게 붙은 성좌가 먼저 접촉하면 신도 알 수 있지만, 범죄자들이 먼저 연락할 가능성은 낮습니다. 결국 그들은 바퀴벌레처럼 숨어 다닐 수 있게 되었죠.”

[헉! 그럼 나도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신이 내 위치를 모른다는 거야?!]

성좌도 몰랐던 얘기였는지 상태창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제길, 이런 얘기는 네가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승지의 표정이 굳자 최자림이 서둘러 덧붙였다.

“그렇다고 채승지 각성자님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란 뜻은 아니구요! 실은 문제가 좀 있었어요.”

“문제라니?”

“알러트가 생기고 나서 처음엔 경계 스킬이 없는 각성자면 무조건 잡아들였거든요. 하지만 그중에는 정말 어쩌다 경계 스킬을 못 받은 각성자도 섞여 있었어요.”

“그걸 안 쓰레기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계스킬을 받지 않는 편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를 퍼트렸습니다.”

유청은 서슴지 않고 알러트를 쓰레기라고 칭했다. 어지간히 악독한 집단인 모양이다.

“맞아요! 경계 스킬을 안 받는 게 유행처럼 번지는 바람에 진짜 알러트의 일원인지 민간인인지 구분이 안 가서 엄청 골치 아팠죠!”

“그래서 나를 그들 중에 한 사람으로 의심했다 이겁니까?”

“네!”

“아니요.”

최자림과 유청의 대답이 엇갈렸다.

어리둥절해진 최자림이 돌아보자 유청은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대꾸했다.

“당신은 정체를 모르겠습니다.”

사람 속까지 훑어보려는 싸늘한 시선.

“정말 약한 겁니까? 아니면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기분… 더럽네, 진짜.

다짜고짜 악당 취급 받은 것도 화나고 약하다고 무시하는 것도 열 받는 데, 다 떠나서 유청 자체가 신경을 건드렸다.

알바를 하면서 사람을 쓰레기 취급하는 진상들은 많이 만나보았지만, 유청처럼 사람을 옭아매고 못 견디게 하는 인간은 처음이다.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눈빛.

그게 세상에서 제일 자존심 상했다.

저절로 반발심이 치민 승지가 한 대라도 먹여주고 싶어서 들썩인 순간, 옆에 있던 류의건이 탁자 밑으로 승지의 무릎을 눌렀다.

뭐야.

지켜보고 있었나?

류의건은 일부러 승지 쪽을 보지 않고 있었다. 참으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니까.

그러나 담담한 류의건의 표정이 솟구치던 열을 한 풀 꺾었다.

…젠장.

망설이던 승지가 다시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댔다.

이 녀석은 이 녀석대로 속을 모르겠다.

“에이잇! 지금 그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잖습니까! 글라세로의 저주에 걸렸다면서요! 마왕을 소환하는!”

참을성 부족해 보이더니 역시나 박편호가 먼저 탁자를 내리쳤다.

“아, 그래요. 그 저주에 대해서도 얘기해야죠.”

마찬가지로 최자림과 유청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이화예가 다시 주도권을 되찾아왔다.

“어쨌든 승지 씨가 미스핏 길드에 머물겠다고 알려 와서 저희는 찬찬히 승지 씨를 살펴볼 생각이었습니다.”

“최자림 각성자가 조금 막무가내로 데려온 감이 없잖아 있었거든요.”

내내 조용하던 여운남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 대충 최자림이 사고치고 미스핏 길드장 두 명이 수습하는 그림은 쉽게 그려진다.

“하지만 내가 글라세로의 저주에 걸린 걸 보고 계획이 바뀌었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이화예가 말을 이었다.

“글라세로의 던전을 공략해서 저주를 없앤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알러트의 일원일지도 모르는 자가 초보 각성자인 척 잠입해 몰래 던전을 공략했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쳇. 역시 내가 던전을 공략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들켰군.

한술 더 떠서 그들은 무슨 거대한 꿍꿍이가 있는 거냐고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

와, 나도 모르는 거대 조직의 음모?

열이 뻗친 승지가 대꾸했다.

“그럼 여기서부턴 내가 말해볼까요? 나는 당신들을 다 고소해서 손해배상을 억대로 받아내고 싶은 심정이야.”

“…….”

“당신들이 어떻게 믿든지 간에 난 무고한 각성자고, 진짜로 던전에 처음 들어가 본 거란 말이지.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저주 받은 당사자야.”

승지의 목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당신들 개짓거리에 내가 휘말렸다고. 그런데 다짜고짜 사람을 납치해서 죽이려고 해? 마왕이 소한 된다는 이유로?”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다.

시발, 휘말린 것도 잘못이냐?

“탓하려면 원인 제공을 한 미스핏 길드부터 다 척살하고 생각해보던가!”

“승지 씨 그건…!”

척살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 류의건이 따라 소리쳤다.

어후, 이 자식아.

아까 막아준 건 고맙지만 류의건을 따라서 착하고 정의롭게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승지가 탁자를 걷어찼다.

“그리고 이 멍청한 것들아, 내가 죽는다고 마왕의 추적이 멈춘다고 누가 그래?”

“뭐, 머, 멍청?”

“그래, 새끼야! 잘 생각해봐!”

혈압이 한계치에 달한 승지가 내질렀다.

“내가 만약 저주까지 내려서 복수하는 입장이었으면 시체라도 찾아서 찢어발겼어!”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제길, 마왕이 우습냐고!

한낱 인간조차도 눈 돌아가면 미치는 판국에!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참지 못한 승지가 이죽거렸다.

“니네 양심이 존재하는지는 안 물어본다. 대가리랑 같이 잃어버린 거 같으니까. 하지만 딱 한 가지만 알아둬라.”

승지가 지근지근 탁자를 짓밟았다.

“난 혼자 안 뒤지니까.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마왕이 소환될 때 니네 길드에 기어들어 가서 같이 망하는 꼴은 보고 죽는다.”

승지가 협박하듯 길드장들의 얼굴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처음엔 그렇게 죽이려고 들던 얼굴들에 당황한 빛이 흘렀다.

정말 승지가 도주하다가 자신의 길드에서 마왕 자폭 테러를 해버리면 무수한 사람들이 죽을 때 자신의 주변부터 포함되어 버릴 테니까.

나도 죽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너네만 사는 꼴은 못 보지!

“그러니까 생각이 있으면 없는 대가리 굴려서 해결책 찾기나 해. 아님 팔 한 짝씩 잘라서 던져주고 마왕 다중 소환이나 한 번 해볼 테니까!”

승지의 협박에 긴 침묵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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