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돌리고 돌았냐? (1)
어제는 이상하게 염색도 잘 나오고 물건도 찾고 운수가 좋더라니.
자다가 뒤척이려던 승지는 무언가 명치가 묵직해서 잠에서 깼다.
가위라도 눌렸나?
미간을 찌푸리며 허우적거리던 승지의 손끝에 무언가 부드럽게 눌렸다. 음? 뭐지?
움푹 들어간 허리에 승지의 손을 올려놓은 그가 말끄러미 승지를 내려다보았다.
“안녕?”
“…으아아악!”
귀신을 본 것보다 더 놀란 승지의 상체가 덜컥 튀어 올랐다.
웬 여자가 자기를 깔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뭐지? 나 어제 류의건네 집에서 잔 거 맞는데?
잠이 덜 깬 눈으로도 제 위에 올라탄 여자가 엄청난 미인이라는 사실만은 똑똑히 보였다.
류의건 누난가? 사촌? 안 닮았는데?? 아니 누구든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당황한 승지는 말까지 더듬었다.
“누, 누구십니까?”
“날 모르는 거야? 서운하네.”
“…연예인?”
“땡.”
여자가 고혹적으로 웃으며 승지의 손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괜찮아. 이젠 못 잊어버릴 테니까.”
“아, 아니 일단 좀 떨어지고….”
어색하게 그를 밀어내던 승지의 머릿속에 퍼뜩 생각 하나가 스쳤다.
모솔에게 전대 미문한 이 사태에 성좌가 안 나타나는 게 이상했다.
팔짱 낀 것만으로도 난리친 녀석이 지금 조용할 리가 없는데? 승지는 무게로 눌러오던 여자를 거꾸로 붙잡았다.
“당신 뭐야.”
그가 히죽 웃었다. 휘어진 눈동자가 가로로 가늘어진 것 같았다.
동시에 방문이 똑똑 하고 열렸다.
“승지 씨? 비명 소리가 들려서… 헉!”
“우와악!! 이거 오해다! 유월한테….”
“서큐버스!”
류의건이 승지의 다급한 설명을 자르며 소리쳤다.
엇, 사람이 아니었냐.
근데 서큐버스? 정기 빨아먹는?
승지가 저도 모르게 확 그를 떨쳐내며 이불을 당겼다.
그러자 서큐버스가 깔깔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뭐야아? 지금 그걸로 가린 거야? 귀엽다, 정말. 지켜만 보고 오라는 마왕님 명령만 아니었으면 벌써 낼름 삼켰을 텐데!”
“괴물이 여길 어떻게!”
류의건이 다짜고짜 칼을 꺼내자 서큐버스가 휙하고 천장 쪽으로 날아갔다. 그의 구멍 난 가죽 날개가 퍼득이며 귀에 거슬리는 소음을 냈다.
서큐버스가 히잉 하고 긴 손톱으로 제 뺨을 눌렀다. 분명히 아깐 사람의 모습이었는데 순식간에 괴물의 껍질이 드러나 있었다.
“괴물이라니. 듣는 괴물 서운하다.”
“나 지금 그대를 부르노니…!”
“아이, 신성 주문 외우지마. 지금 갈 거니까.”
서큐버스가 스륵 벽 너머로 사라지려고 하자 승지만 다급해졌다.
“야, 잠깐만! 사람 잘못 찾은 거 아니냐! 마왕이 날 왜 감시해!”
“그야 글라세로를 잡은 게 당신이니까? 앞으로 자주 봐, 자기!”
쪽하고 손 키스를 보낸 서큐버스가 그대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성좌의 대화창도 한꺼번에 띵띵띵하고 나타났다.
[흐어어엉!! 승지야!!]
[( ˃̣̣̥᷄⌓˂̣̣̥᷅ )]
[그대로 잡아먹히는 줄 알았어!!]
“너… 너 왜….”
[서큐버스가 매혹장을 펼쳐서 보면서도 간섭할 수가 없었어! 으앙! 승지 아래쪽 무사해?]
“야 이…! 너…!”
“괜찮으십니까?”
너무 큰 충격에 빠진 나머지 버벅거리던 승지가 양손으로 머리를 눌렀다.
“미치겠다. 방금 저거 꿈 아니지?”
“아 네…. 여긴 현실입니다.”
그걸 또 대답해주고 있네.
승지가 머리를 헤집다가 물었다.
“설마 나 또 저주 걸린 거냐?”
[아냐! 승지 몸은 깨끗해! 저주 같은 건 없는 걸!]
“그럼 방금 저건 대체 뭐냐고?”
[서큐버스!]
“마왕 클랩의 부하 서큐버스입니다. 저도 던전에서만 봤습니다만… 현실에서도 똑같이 능력을 펼칠 수 있다니.”
성좌와 류의건이 별로 도움 안 되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쓰읍. 그나마 다행이다. 아까 유월 어쩌고 얘기한 건 못 들었겠지?
이 와중에 승지가 안도했다. 아직 둘 사이에 뭣도 없는데 들키면 쪽만 팔리지.
대신 승지가 푸념했다.
“돌겠네. 저주도 없는데 왜 저런 게 따라 다니는 거냐고.”
“큰일이군요. 클랩의 부하들은 대부분 사람으로 둔갑할 수가 있습니다. 승지 씨는 경계 스킬이 없으니 너무 쉽게 위험에 노출되실 겁니다.”
“하… 그 부분은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만날 사람도 없고.”
[아니지! 유월 있잖아!]
“그러네. 혹시 서큐버스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냐?”
“그건 도플갱어라고 클랩의 다른 부하가….”
“젠장.”
아주 없는 능력이 없구나. 빌어먹을 이세계. 글라세로 잡은 지 삼일도 안 됐다. 망할 것들아.
승지가 이마를 짚고 있자 류의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유월 씨와 유청 씨에게 살해당한 자초지종을 듣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응.”
“괜찮다면 제가 같이 따라가 드려도 되겠습니까? 호위해드리겠습니다.”
넌 할 일 없냐?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굳이 호구 짓을 자처하는 데 말릴 이유도 없었다.
랭킹 2위 치고는 너무 한가한 태도에 승지가 물었다.
“근데 넌 평소에 뭐하고 사냐?”
“보통은 미션을 합니다. 메인 미션이 뜨면 다들 저한테 연락해주기도 하고, 서브 미션에 집중하거나 회사 일을 돕거나 하죠.”
“던전은 안 가고?”
“아… 다들 제게 던전 열쇠를 빌려주는 건 꺼리셔서요. 저 혼자 들어간 던전은 대부분 클리어가 되어버려 다시는 들어갈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호오.”
하긴 던전 하나가 건물 하나만큼의 가치가 있는 현실에서 류의건이 던전 깨기를 해버리면 거의 폭탄 테러나 마찬가지다.
저러면 나 같아도 안 빌려주지.
“굳이 클리어 안하고 나와도 되잖아?”
“일단 던전에 들어가면 제 성좌가 반드시 클리어 할 것을 요구합니다.”
“크엑.”
어쩐지 잠깐 안 본 사이에 저 놈 페널티가 더 늘어났더라. 고달픈 인생이다.
“그럼 딴 사람을 데려가면?”
“…승지 씨도 보았다시피 다른 사람이 있으면 제 힘을 쓰기 어려운데다가 중간에 던전에서 나가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흠. 로잉이 있는 던전에서 끝까지 내 시체를 찾자고 주장한 것도 실은 페널티 때문이었나?
시체를 수습해야 한다는 이유라면 던전에서 나갈 만하니까.
류의건은 괜히 구차해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서둘러 수습했다.
“저는 돈이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꼭 던전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난 돈 급한데. 결론이 딴 세상이군.
승지는 열쇠장이의 고리를 다시 가져왔다는 얘기는 접어두기로 했다.
나도 빨리 벌고 나가야지. 언제까지 여기서 비비냐. 계속 홈리스로 지낼 수도 없고.
“아무튼 알았다. 서큐버스 문제는 후우… 좀 있어보면서 대책을 세워봐야지.”
“예.”
잘 벌고 나가면 그동안 신세진 류의건에게 고기나 한 번 사줄 생각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미 금수저다. 보답으로 뭘 사줘야할지 감이 안 오니.
일단 돈이나 많이 벌고 보자.
* * *
승지는 약속장소에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깔끔하게 염색된 붉은 머리가 튀어 보이지 않을 만큼 정돈되고 세련된 차림이었다.
외출 준비를 하는 승지에게 류의건이 옷까지 빌려주는 호의를 보였던 것이다.
“뭐냐? 굳이 빌려줄 필요 없는데.”
“아 그게. 승지 씨가 유월 씨를 만나러 가시는 거니까….”
이 새끼. 아까 결국 들었잖아!
민망해진 승지가 거울에 머리를 박았다. 왜 서큐버스랑 있는 걸 들키자마자 유월 이름이 튀어나왔는지 진짜 모르겠다!
정확하게 들켜버린 승지가 씹어 먹듯 말했다.
“야, 진짜. 말하지 마라.”
“네. 말 안 하겠습니다.”
류의건은 명백히 웃음기가 다분한 표정이었다.
“유월 씨가 정말 예쁘긴 하시죠.”
“아예 하지 말라고!”
승지가 씩씩거리기 무섭게 류의건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럼 시계부터 보시겠습니까?”
“하, 너 이 자식. 여자한테 인기 많지?”
“하하.”
절대 부정을 안 하는 류의건을 믿고 승지는 그냥 몸을 내맡겼다.
[그래 모솔은 무조건 연애 잘하는 사람 말대로만 해도 중간은 간댔어! 괜히 뭐 해볼 생각 말고 시키는 대로 하자!]
“너 자꾸 어디서 그런 걸 보고 오는 거야? 인터넷 금지다, 이 자식아.”
[헤헷 난 인터넷으로 보는 거 아닌데!]
결국 승지는 바지만 빼고 다 빌렸다. 매우 짜증스럽게도 류의건의 키가 더 컸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뭐라고 하지 못할 만큼 좋았다. 어느 정도냐면 승지를 발견한 유월이 처음에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승지 씨?”
“좋은 아침입니다.”
[멘트 구려.]
닥쳐.
승지가 성좌를 무시한 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유월은 세미 정장 차림이었는데, 나름대로 공적인 자리라고 격식을 차린 건가 싶어서 너무 귀여웠다.
게다가 정장 뒤로 넘긴 긴 머리는 그야말로 미인의 아우라가 구현화된 거 같았다.
머리가 저렇게 길면 안 불편한가. 근데 저렇게 찰랑거리니까 뒤지게 이쁘네.
유월이 새삼스럽게 자신을 계속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한 번에 못 알아봤어요. 전이랑 너무 달라져서.”
“그래요?”
이거 잘생겼다는 거냐? 멋있다는 거냐? 좋았어! 류의건 짜식, 잘했다! 집사로 계속 두고 싶은데?
거지를 모실 부자 집사가 없어서 문제긴 하지만. 아주 쓸모가 있다.
자화자찬하는 승지에게 유월이 찬 물을 끼얹었다.
“머리를 염색하셔서요. 빨간색.”
“아, 예. 그거. 그것도 했죠.”
[푸하하하하!!]
승지가 내심 실망하는 게 너무 잘 보였는지 성좌가 배를 잡고 웃어댔다.
[아이고 나 죽어!! 승지야 진짜 귀여워서 미치겠다!! 우리 승지는 안 그래도 멋있어! 매력 폭발이야! 걱정하지 말라구~! 크핰핰핰!]
왜 성좌는 때릴 수 없는 걸까?
승지는 꿈틀거리는 입을 간신히 자제했다. 안 그러면 유월이 보는 앞에서 쌍욕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성좌를 다시 죽이기 전에 유월이 싱긋 웃었다.
“잘 어울려요.”
승지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입술에 힘을 꽉 줬다. 칭찬 한 번에 멍청이처럼 웃을 순 없었으니까.
그러나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리니 무슨 자식새끼 학예회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은 류의건과 연쇄살인범 같은 유청의 표정이 보였다.
에라이, 쓰벌. 이럴 줄 알았으면 둘이 만난다고 하는 건데.
괜한 소리를 듣기 전에 승지가 선수를 쳤다.
“그럼 들어가지?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길래 이렇게 꽁꽁 감춰놨나 궁금해 죽겠다.”
“하…….”
유청은 차마 죽인 놈을 다시 죽일 수 없어서 터진 복장마다 한이 서렸다.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을 납득시키려고 보여주는 거 아닙니다.”
“그럼 뭔데?”
“알고 계셔야 비로소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실지도 모르니까요. 꼭 승지 씨의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죠.”
유월이 유청 대신 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설득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확인만 얼마든지 하세요.”
너무 기대치가 낮은 게 아닐까. 유월의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오히려 자신 쪽에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지만.
정말로 보기 전까진 입을 다물고 있는 게 현명하지.
유청이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었다.
“들어가서 무엇을 보든 절대 놀란 티도 내지 마십시오. 류의건 씨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반복했다.
“아무리 놀라도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마세요.”